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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평 도조제와 아리타초 도자기 축제 참관기
  • 편집부
  • 등록 2017-07-04 13:41:28
  • 수정 2018-12-27 06: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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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평 공 도조제 참석 및 도조신사(陶祖神社)방문 

 

이삼평 공(李參平 公)은 아리타 지역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자광(白磁鑛)을 발견하고 이를 원료로 사용하여 1616년 일본 최초로 자기를 생산한 조선인 도공이다. 아리타 지역은 이삼평 공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1888년에 도조신사(陶祖神社)를 세우고 그를 도조신(陶祖神)으로 모시고 있으며, 아리타야끼(有田燒)가 300주년 되는 1916년엔 도조이삼평비(陶祖李參平碑)를 아리타시 전체가 한눈에 보이는 산마루에 건립했다. 이후 1917년부터 매년 5월 4일 도조제(陶祖祭)를 치룬다. 한국도자문화협회는 이삼평 공의 고국인 한국을 대표하여 매년 아리타초(有田町)의 초청을 받아 도조제에 참가하여 추모사(追募辭)를 낭독하고 우리 선조 이삼평 공의 업적을 같이 기리고 있다.  

 

한국도자문화협회는 1984년 제1회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 개최를 통한 한일 간 세라미스트들의 교류가 계기가 되어 발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는 1980년대부터 차세대 산업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 일본의 뉴세라믹스 과학 기술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자 당시 국립공업시험원 전병식 원장(전 한국세라믹연합회 회장)이 일본 측에 요청하여 1984년 제1회 한일세라믹스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이때 이삼평 공을 기리는 아리타 도조제의 소식을 듣고 1985년 일본에서 개최된 제2회 한일세라믹스세미나에 참가한 전병식 원장을 비롯한 한국 측 대표단이 아리타초를 방문하여 도조 이삼평 공의 한국 출생지조사 등 관련 사업을 일본 측에 제안했다. 이후 1986년 2월 한일도업친선협의회가 발족되었으며 2003년 한국도자문화협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한일도업친선협의회는 한국 측 대표단으로 1986년 5월부터 도조제에 참가하기 시작했으며, 1986년 6월부터 이삼평 공의  출생지 조사에 착수하여 1989년 9월 출생지 조사보고서를 완료하였다. 이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삼평 공의 고향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로 추정하였다. 이후 조사보고서를 근거로 1990년 10월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에 이삼평 공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삼평 공 기념비는 아리타초의 도자기 생산업체와 관련 상인들로 구성된 기념비건립위원회가 비용을 부담하고 한국도자문화진흥협회가 제작을 맡아 공동 건립됐다. 이후 기념비 관리는 한국도자문화진흥협회가 하고 있다. 2013년엔 유성 공주 간 국도의 확장 공사계획으로 인하여 이삼평 공 기념비를 이전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에 한국도자문화협회와 공주시가 협의하고 공주시가 예산을 투입하여 2016년 10월 5일 반포면 온천리에서 학봉리로 이전을 완료했다. 이전 행사엔 공주시장, 아리타초 시장, 한국도자문화협회장, 한국세라믹연합회장, 공주 이삼평연구회 등 관계자 200여 명이 참석하여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공주시는 이삼평 공 기념비를 문화유산으로 보호하고자 이 일대를 문화공원으로 확장할 계획을 갖고 있다. 이번 도조제에는 한국세라믹연합회 전병식 명예회장, 신재수 회장, 이준영 전무, 한국도자문화협회 오유근 회장, 김승기 이사, 대한도자기타일협동조합 이기정 전무, 공주시청 심규덕 과장, 유상열 팀장, 공주 이삼평연구회 이종태 회장, 신용희 이사, 우성세라믹 이응원 회장이 참석하였다.  

 

이마리(伊万里) 오가와우치야마(大川內山) 답사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오가와우치야마(大川內山)는 비요(秘窯) 즉 ‘비밀의 도자기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1675년부터 봉건적 구획인 번(藩)이  폐지되고 현(県)이 설치된 1871년까지 사가나베시마번의 어용요(佐賀鍋島藩 의 御用窯)가 운영되었던 곳이다. 나베시마 번요(鍋島  藩窯)에서는 조정이나 쇼군(장군), 영주에게 헌상되는 최고급 도자기를 생산했다. 그 당시 생산된 도자기를 오늘날 고급 도자기 나베시마(鍋島)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전통을 계승한 것이 이마리(伊万里)도자기이다. 에도시대(江戶時代)부터 명치시대(明治時代)에 걸쳐 이마리(伊万里), 아리타(有田) 지방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이마리항을 통해서 출하되었다. 때문에 이마리의 지명이 도자기의 대명사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그 당시에 생산된 도자기를 고이마리(古伊万里)라고 부르고 있다.  

 

오가와우치야마(大川內山) 마을 입구 주차장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은 마치 우리나라 청송 주왕산 입구에 들어선 것 같았다. 삼면이 깎아 지르는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마을 입구 앞으로는 산에서 내려온 개천이 깊게 파인 도랑을 이루며 흐르고 있었고 그 개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야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조그마하고 깊게 파인 개천을 대천(大川)이라고 하다니 과장이 좀 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를 건너기 전 마을 입구 왼편 산언저리에는 880여 개의 이름도 모르는 한국 도공의 비석을 한데 모아 쌓은 도공무연탑(陶工無緣塔)이 있었다. 그 도공무연탑 뒤편 산 중턱에는 고려인의 묘(高麗人의 墓)가 자리 잡고 있었다. 관광안내 자료에는 번요(藩窯) 이전시대, 즉 1675년 이전에 일본으로 온 도공의 무덤으로 한국이 있는 북쪽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어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고 있다고 적혀있었다.  과거 일본 막부(幕府)시대에는 군사들이 오가와우치야마(大川內山)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어 도공들이 마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말하자면 우리선조 도공들의 강제 사역장이었다. 

 

마을 뒤편 깎아지른 바위산을 바라보니 그 설명이 이해가 된다. 좁은 골짜기에 갇혀 도자기 생산에 평생을 바친 도공들이 죽어서야 개천 건너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처음에 느꼈던 호젓하고 아름다웠던 마을 풍경이 더 이상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마을 안쪽 숲에는 우리 선조들의 한이 이끼를 이루고 아직도 서늘하게 떠도는 것 같았다. 관광안내 자료에는 고려인의 묘(高麗人의 墓)는 번요(藩窯) 이전시대에 일본으로 온 도공의 무덤이라고 적혀있는데, 아마도 고려시대의 도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번요(藩窯)가 설치된 1675년 이전 임진왜란(1592년)과 정유재란(1597년)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들과 그 후손들의 묘라고 생각된다. 일본 사람들은 왜 그 묘를 고려인의 묘(高麗人의 墓)라고 이름 지어, 마치 고려시대  도공들이 오가와우치야마(大川內山) 마을에서 고려청자를 생산했던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만들었을까? 그렇지 않아도 역사왜곡이 많은 나라인지라 고려시대 청자를 이 계곡에서 생산했다고 주장 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게 하였다. 일본 자료에 의하면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납치한 조선사기장의 총수는 600여 명이 넘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사기장 한 사람 밑에는 최소한 10명의 도공들이 달려 있다면 약 6000여 명의 도공들이 끌려갔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일본 학자는 임진왜란 때 납치된 조선 도공이 2만에서 3만 명에 달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삼평 공 후손 방문  

 

도자기 축제가 열리는 아리타초(有田町)는 예로부터 도자기 생산이 번성했던 사가현의 서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면적은 65.80㎢, 인구 20,242명(2014년) 정도이며, 북쪽에는 이마리시(伊万里市), 동쪽에는 다케오시(武雄市)와 인접해있고 서 쪽에는 나가사키현(キ崎県)의 사세보시(佐世保市)와 인접해 있는 도시이다. 우리나라엔 이미 9세기에 고려청자라는 자기(磁器)를 만들었지만 일본은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까지도 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킬 당시 자기를 만드는 기술은 첨단 기술이었다. 아리타에서 일본 최초의 자기가 제작된 것은 17세기 초반(1616년)이다. 1592년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반도를 침략했을 당시 아리타는 봉건제후로 전쟁에 참전한 나베시마(鍋島)가 통치하던 지역인 사가(佐賀)지역 나베시마번(鍋島藩)에 속해 있었다. 나베시마가 임진왜란 때 한반도의 사기장 이삼평(李參平)과 그의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이후 이삼평 공이 자기의 원료가 되는 백자광(白磁鑛)을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발견하여 이를 원료로 사용한 일본 최초 흰색자기(白磁)를 1616년에 만든 것이 아리타야키(有田燒), 즉 아리타 도자기의  시작이다. 이삼평 공의 일본 이름은 가네가와 삼페이(金江三兵 또는 金江三兵衛) 이다. 가네가와는 고향인 공주 금강(金江)을 성(姓)으로 개명한 것이고, 삼페이(三兵衛)는 ‘삼평이’를 일본식으로 읽은 한자 발음이다. 현재 아리타에는 이삼평 공의 14대 가네가와 쇼헤이(金江省人)가 철도원 생활을 접고 도방을 이어받아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으며 13대후손인 가네가와(金江義人)씨는 2017년 4월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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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시에는 300여 개의 도자기 공방이 있다. 그 중에서 역사가 깊고 품질이 뛰어나 과거부터 조정(朝廷)이나 쇼군가(將軍家) 등에게 훈장을 수여 받고 최고급 도자기를 생산했던 가문의 도자기 공방을 에몬가마(右衛門窯)라고 한다. 아리타시에는 겐에몬가마(源右衛門窯), 가키에몬요(柿右御門), 이마에몬 가마(今右御門窯) 등 3개의 에몬가마(右衛門窯)가 있다.  본 참관기에서는 위 세 곳의 에몬가마(右衛門窯)와 아리타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이노우에만지(井上萬二) 도자기 공방을 소개하고자 한다.  

 

 

1|겐에몬가마(源右衛門窯) 

 

겐에몬가마(源右衛門窯)가 처음 세워진 것은 약 260년 전으로 역사가 깊으며, 숙련된 도공들이 물레성형, 건조, 밑그림 그리기, 유약 바르기, 채색하기, 소성하기 등 모든 공정을 분업화하여 수공업형태로 제조하고 있다. 또한, 소성 가마의 경우 아직도 일본 적송을 사용하여 불을 때고 있었다.  

겐에몬가마는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제후 나 영주 등 귀족들의 소장품용 예술품 도자기만 생산했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예술품 도자기 뿐 만 아니라 주전자와 사발, 컵과 접시, 조미료 통, 와인 잔 등 생활도자기 및 주방용 실용도자기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최고급의 생활도자기를 만들어 내어 예술품 도자기를 일반 가정에서도 감상 할 수 있게 한 공로를 인정받아 겐에몬은 1943년 일본정부로부터 공예기술품문화재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겐에몬가마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너무 고가로 일반 서민이 생활용 주방용 식기로는 사용할 수 없고 진열장에 보관하며 감상하는 소장품용으로 판매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작은 커피잔 세트가 50~100만 원 정도이며 주전자 접시 등은 수천에서 수억을 호가하는 것도 있다.  

 

2|카키에몬가마(柿右御門窯)  

 

카키에몬가마(柿右御門窯)가 유약 위에 채색을 입히는 방법(上釉)을 개발하기 이전에는 아리타야끼(有田燒)는 유약을 입히기 전에 푸른색 안료(下釉)로 문양을 그리는 것이 전부였다. 도공 사카다카키에몬(酒井田柿右御門, 1592 – 1666)이 중국에서 이미 유행하던 유약 위에 채색을 입히는 방법(上釉)을 배워 이 방법을 완성시켜(1624-43) 1640년대 초 붉은색(감색) 문양을 가진 백자를 처음 개발한 했다. 이후 이를 발전시켜 1670년 카키에몬가마 양식이 확립되었다.  

도공 사카다카키에몬(酒井田柿右御門, 1592 – 1666)이 1643년에 일본 최초로 도자기에 감색(persimmons)을 입히는데 성공하자 사가현(佐賀県)의 영주가 “앞으로 너희 가문을 감나무 시(柿)자를 의미하는 카키에몬으로 부르게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현재 사카다카키에몬 15대가 가문을 이어 받아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카키에몬의 특징은 모든 도자기에 빨강, 초록, 노랑, 보라, 군청 다섯 가지 색깔을 담고 있는데 각각의 색이 서로를 보완하고 어우러져서 완벽한 은은함을 자아낸다는 점이다. 겐에몬가마의 자기는 색상과 문양이 강열하고 화려한 반면 카키에몬 도자기는 문양이 소박하고 세련돼 일본 특유의 절제되고 단아하면서도 고도의 치밀한 장인 정신이 느껴진다. 카키에몬 도자기는 독일의 Meissen 뿐 만 아니라 프랑스의 Chantilly, Mennecy, Saint-Cloud 그리고 오스트리아 Vienna 공방 등 18세기 유럽의 도자기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독일의  Meissen은 진품 카키에몬 도자기와 거의 유사한 복제품을 생산한 적도 있다.  

 

3|이마에몬가마(今右御門窯)  

 

이마에몬(今右御門)도자기의 특징은 폴리크로믹 안료(polychromatic overglazing)를 상유(上釉 overglazing)로 사용한 것이다. 16세기 말-17세기 초 사가(佐賀)지역을 통치하던 영주 나베시마(鍋島)는 이마에몬 만을 대대로 공급하도록 유일한 가문으로 지정하였다. 봉건 영주에게 바칠 폴리크로믹 안료를 사용하는 도자기 중 가장 세련된 기법을 갖고 있는 가문이기 때문이었다. 이마에몬 도자기의 안료 혼합비와 채색기법은 철저한 비밀로 유지되고 있으며 오직 자식들에게만 전수 되고 있다.   

 

이마에몬 도자기는 황실 진상품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크롬색과 회색의 절묘한 조합으로 다른 도자기와 확실히 다른 멋을 풍긴다. 히로히토 전 일본 천황이 미국 레이건 대통령을 만났을 때 선물로 준 도자기가 이마에몬 도자기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마에몬 12대 때 마침내 에도시대의 도자기에 필적할 만한 도자기작품을 만들어 황실 진상품으로 지정되었으며 이마에몬가마(今右御門窯)는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선정되었다. 이마에몬 13대는 spray 방법을 사용하여 cobalt blue나 light grey 안료를 채색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02년 그의 아들 마사토가 가문을 이어 이마에몬 14대가 되었다. 이마에몬 14대 또한 자신 만의 독특한 기법을 개발하여 2009년 일본 정부로 부터  메달을 수여 받았으며, 2014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마에몬 14대가 만든 도자기중 하나는 푸른색 바탕에 흰 눈송이 문양을 그려 넣었는데 흰 눈송이 결정체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그려져 있어 문양과 색의 조화가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4|이노우에만지(井上萬二)  

 

이노우에만지(井上萬二)는 일본 도예가로 1995년 인간문화재로 인정되었으며 현재 아리타 도자기협회의 고문이다. 이노우에만지는 화려한 문양과 채색 중심의 아리타에서 철저하게 백자에만 몰두하는 독특한 도예가이다. 그는 1958년 카키에몬가마에서 퇴사하고 아리타 요업시험장에서 기관(技官)으로 근무를 했으며 자신만의 디자인과 유약개발에 힘써왔다. 이후 1968년 제15회 일본전통공예전에서 첫 입선을 하였고, 1977년엔 전국 전통공예품전에 통상장관상을 수상하였다. 1987년에는 제34회 일본전통공예전에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였고 1995년 5월 31일 중요무형문화재에 백자보유자로 인정을 받았으며, 1997년 자수포상을 수상한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아리타 도자기업계에서 백자의 제1인자, 성형의 명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며, 그의 작품은 백색의 순수함의 극치와 단아하고 우화한 자태를 갖고 있다.    

 

 

이준영 

한국세라믹연합회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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