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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청화동채 양각 사군자무늬 각병
  • 편집부
  • 등록 2023-01-12 17:01:39
  • 수정 2024-07-04 16: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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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문화
[문화재 돋보기 22]
          
백자 청화동채 양각 사군자무늬 각병
白磁靑畵銅彩陽刻四君子紋角甁

 

글_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 평론가

 

메인 사진1)「백자청화동채양각사군자무늬각병白磁靑畵銅彩陽刻四君子紋角甁」
            조선시대 | 높이 31cm 입지름 6.5cm 굽지름 14cm


영조 28년(1752년)에 조선 왕실관요가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에 정착하여 1884년에 민영화가 될 때까지 사옹원 관리의 감독 아래서 132년 동안 다양한 종류와 기법의 백자가 제작되었다. 특히, 기물의 몸통에 동화채, 철화채, 청화채를 하여 붉은색, 밤색, 파란색의 도자기처럼 보이게 하는 기법도 시도되었는데 이중에도 동화채를 사용한 유물이 가장 희귀하다.
  사진1의 ‘백자 청화동채 양각 사군자무늬 각병’은 몸통의 무늬는 양각으로 조각한 후에 청화로 칠하고 바탕은 동화안료로 칠한 경우로 유물의 제목이 긴 만큼 여러 종류의 기법과 채색을 동원하여 한껏 멋을 부린 작품이다.
  몸통의 형태는 커다란 8각 병으로 비스듬하게 깎아내렸지만, 어깨부터 목과 입구는 그대로 원형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일반적인 병의 형태를 벗어난 특이한 모양으로 현존하는 유물의 수량은 매우 적다. 마치 8폭의 병풍처럼 깎은 몸통의 각 면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사군자무늬를 한 칸씩 띄워서 양각으로 새겨 넣었다. 경사진 어깨 부분에는 박쥐무늬를 형상화한 넝쿨무늬를 화려하게 양각으로 새겨 둘렀으며 몸통의 사군자무늬와 함께 청화안료를 칠하였다. 청화안료는 굽바닥 바로 윗부분과 밖으로 말린 입술 주변에도 칠하여 몸통의 동채(銅彩)와 대비하여 구분하였다.
  몸통 전체를 산화동안료로 칠하여 바탕이 붉게 만드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희귀한데, 대부분이 작은 기형인 연적이나 필통 등에 간혹 사용된다. 산화동안료의 특성상 칠해지는 면적이 넓을수록 소성할 때 휘발되어 색이 날아가는 확률이 높고 얼룩져서 실패하기 때문에 제작 수량이 적었고 따라서 현존하는 유물의 수량도 적다.
  사진7의 ‘백자 청화동채 수복무늬 병’은 몸통의 산화동안료가 몸통에 제대로 안착되지 않은 상태이고 사진8과 사진9의 ‘백자 청화동채 양각 장생무늬 병’도 가마에서 소성될 때 산화동안료가 휘발되어 날아간 흔적이 보인다.
  이러한 제작기법은 정조년간(1776년~1800년)에 자기의 몸통에 양각의 무늬를 두고 바탕을 청화채나 동화채로 모두 칠하는 ‘양각 화훼문 백자’를 제작한 기록을 보아 18세기 후반부터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19세기에는 연적이나 필통 등 문방구류의 소품 제작에 동채기법이 보이게 되지만 널리 상용화되지는 않는다. 이 시기의 산화동안료는 소성후에 검붉은 팥죽색을 띠는 특징이 있으며 특별히 주문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서구열강을 비롯하여 중국, 일본의 국권침탈 혼란기에도 사옹원에 소속된 사기장들은 다양한 기법의 도자기 개발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묵묵히 소임을 다하였으나 기울어가는 국운에 휘몰아치는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는 ‘조선백자의 단종’이라는 비극을 맞게 된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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