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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 교수의 문화재 기행 35_백자청화 산수인물무늬 항아리
  • 편집부
  • 등록 2024-01-29 16:36:01
  • 수정 2024-07-04 15:3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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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 교수의 문화재 기행 35]

 

백자청화 산수인물무늬 항아리
白磁靑畵山水人物文有蓋壺

 

글_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 평론가

 

사진1 백자청화 산수인물무늬 항아리

 

사진 1의 ‘백자청화 산수인물무늬 항아리’는 워낙 희귀한 유물이기도 하지만 특히 굽바닥의 명문이 학술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 몸통의 굽바닥은 가운데 부분이 약간 올라와 있으며 번조할 때 갈라진 틈이 있고 굽에는 모래받침의 흔적이 남아있으나 번조 후에 매끈하게 갈아 내었다. 굽바닥에는 청화로 쓴 ‘己巳閏九月 酒醉鄕眠叟(기사윤구월 주취향면수)’의 2행 10자의 명문이 있는데 ‘기사년 윤 9월(1509년), 주인은 술에 취해 별천지에서 잠든 노인’으로 이 도자기의 정확한 생산연도를 기록해 놓았다(사진7).


  우리나라 조선 초기 도자사와 회화사의 편년 기준이 되는 중요한 순간이다. 그동안 조선 초기 청화백자의 제작 연도가 확실한 작품은 한 점이었다(「백자청화 ‘홍치 2년’ 명송죽문호」, 동국대학교박물관).


  ‘己巳閏九月’은 1509년으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반정(反政)의 공신들이 조정을 마음대로 움직이며 활개 치던 중종 4년의 가을이다. 9월 5일(甲子) 밤에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우박이 쏟아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반정의 주모자와 방관자인 영의정 유순, 좌의정 박원종, 우의정 유순정이 중종에게 사직을 청하였다. 물론 중종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예상한 사직이었다. 반정이 성공했으나 백성들의 삶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고 사회도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건국 이래로 발전을 거듭한 도자기 생산기술은 새로운 기반이 잡혀가면서 명나라 백자의 틀을 벗어나 조선백자 정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 초기 청화안료로 무늬를 그려 넣는 경우(靑畵白磁)는 매우 귀했는데 왕실의 관요백자에서도 특별한 경우에만 생산하였다. 성현(成俔:1439년~1505년)의『慵齋叢話(용재총화)』에는 ‘세종 때 어기는 백자를 사용하고 세조대에 이르러 채자를 섞어 사용하였는데 중국 회회청을 구해 樽(준), 罌(앵), 盃(배), 觴(상)에 그리니 중국 것과 다르지 않았다’라는 글이 있다. 15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청화백자가 어기(御器)로 생산되기 시작하였고 그만큼 청화백자의 생산량 자체도 적었고 청화백자의 생산 기틀이 확립된 시기이다.


이 유물의 몸통에는 산수인물도가 그려져 있고 더불어 2행 10자의 명문까지 몸체의 윗부분에 전서체로 명기되어 있다. ‘桉上琴長在 尊中酒不空(안상금장재 준중주부공)’ 즉, ‘평상 위엔 거문고가 놓여있고 술 항아리에는 술이 가득하네’로 해석된다. 실제로 잔을 건네는 노인 뒤에 동자가 서 있고 무성한 가지의 소나무 그늘 아래 평상에는 거문고와 악보로 보이는 책이 놓여있다. 그 옆에는 국자가 담겨 뚜껑이 열린 항아리와 뚜껑이 닫혀있는 술 항아리가 나란히 있어서 조금 전에 술을 퍼서 바로 건네는 모습으로 조선 초기 사회상이 그대로 느껴진다.
  술 항아리 옆에는 술잔과 접시에 담긴 음식도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 뒤로는 괴석을 품고 있는 작은 나무의 잎이 무성하고 멀리 있는 산수의 경치를 그려 넣었다.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산수화로 구륵법(윤곽을 그리고 속을 채색하는 기법)이 소나무 가지 표현에서 보이며 여백 없이 세필로 청화안료의 농담을 조절하여 정성껏 그렸다.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와 인물 배치 및 묘사가 도화서 화원의 마하파 계통 화풍으로 추정되며 조선 초기 회화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초기 산수인물도의 청화백자는 일본에도 한 점이 있는데 지름 19.4cm의 전접시인 ‘백자청화 산수인물문 전접시’이다. 나귀 탄 노인과 두 명의 동자가 산수를 배경으로 운치 있게 그려진 명품으로 전해지고 있다(사진9).


  이 항아리의 어깨와 접지 부분에는 장식적인 종속 문양이 사라지고 주 문양만 표현되었고 뚜껑이 항아리의 입을 완전히 덮는 형식으로 명나라 백자의 뚜껑모양을 탈피하였다. 꽃봉오리를 그린 보주형 꼭지가 달린 덮개 식으로 표면에는 넝쿨 꽃무늬를 능숙한 솜씨로 그려 넣었다. 몸체와는 별도로 번조하였으며 뚜껑 안쪽 면에는 11곳의 받침 자국이 원형으로 가지런히 남아있다(사진5, 사진6).


  철분을 잘 걸러낸 하얀 백토의 태토에 담청색 유약이 골고루 시유되어 있고 빙렬은 없으며 청화 안료의 농담을 조화롭게 사용하여 산수인물도를 그려낸 최상품의 왕실 관요자기이다. 15세기 경기도 우산리, 무갑리, 벌을천, 도마치부근의 관요백자 생산지나 16세기 번천, 도마치부근의 왕실관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백자청화산수인물문항아리」는 국보급 문화재이다. 조선 초기에 생산된 청화백자는 제작 수량도 적었지만, 뚜껑까지 갖춰진 항아리는 몇 점에 불과하고 산수인물도가 그려진 3점 중에 한 점이며, 제작연도가 확실한 작품으로 높은 예술성과 학술성, 희소성을 모두 갖춘 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문화재의 발표는 전공자나 비전공자의 구분 없이 국민 모두의 관심 대상이 된다. 올바른 연구와 온전한 보존만이 후손들에게 남겨진 권리이자 의무인 것이다. 문화재는 개인이나 사립기관, 국가기관 등에 제한을 받지 않고 어느 곳이든 소장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의 매매도 가능하다. 그러나 문화재를 소유하지 않은 일반인도 누구나 문화재를 관람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소유권과는 별개로 문화재는 민족의 공동유산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문화재는 국가에서 지정(국보, 보물)하여 소장처에 관계없이 별도의 감독과 관리를 꾸준히 하고 있다. 중요한 문화재의 영구 보존을 위하여 국가가 관리하는 좋은 제도이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가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도 능동적으로 찾아서 연구하고 보존할 방법을 생각할 때이다.


  필자가 이 국보급 유물을 처음으로 실견할 때 기쁘기도 했지만, 해외의 개인 소장품으로 후손들이 항상 볼 수 없고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편치 못했던 기억이 난다.

 

-----이하 생략

<</span>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자세한 내용은 세라믹코리아 2024년 2월호를 참조바랍니다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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