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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와 전문서적- 전문서적의 교육적 가치와 필요성
  • 편집부
  • 등록 2006-07-12 15: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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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와 전문서적 전문서적의 교육적 가치와 필요성
- 사료에 나타난 도자사를 중심으로

글 이헌국 _ 경희대학교 예술디자인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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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이야기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잦은 안개와 비가 가져다 주는 기후환경조건의 영향으로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많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런한 판타지이야기들은 책으로 만들어지고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그 예로 「해리포터」는 책으로 1조억원, 영화로 1조6천억원의 수익을 창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또한 이야기가 많은 나라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숨어 있는 책으로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인들은 책을 끔찍이도 좋아했으므로 전적典籍의 나라라고 불렀는데 그 뿌리는 참으로 심원하다. 멀리 8C신라시대의 대다라니경은 현존하는 최고古의 인쇄물로 추정되며, 그 뒤 고려시대에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해 사용했다. 이는 잘 알려진 독일의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70여년 앞선 1377년 7월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어낸 「직지심체절요」로 전해진다. 또한 정교의 극치와 방대한 분량에서 최대를 자랑하는 목판 「팔만대장경의」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또 조선시대에 와서는 지속적으로 개량한 자형字形에 의한 주자鑄字사업과 아울러 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같은 호한한 편찬, 그리고 민간에서의 사림士林층의 왕성한 문집류의 간행은 그 뚜렷한 예증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옛부터 서적의 발달과 학문을 통해 고유사상과 종교의 발달에 뚜렷이 기여해 왔으며, 문화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 확립의 규범으로 삼았다.
 
2   
책은 문자와 그림으로 표현되는 정신적 소산을 체계 있게 담은 물리적 형체다. 초기에는 대나무 나무 직물 잎 가죽 등의 재료로 만들어 지기 시작했지만 그 뒤 점차로 종이가 사용되었다. 상고上古시대에는 상호간의 믿음 또는 약속의 부호로 의사를 소통하다가, 문자가 생긴 이후 그 글자를 적어 이것을 체계적으로 엮어 발전한 것이 책이다.
15세기에 활자와 종이의 발명은 출판의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으며 처음에는 종교서적들이 이후 18세기에 들어서 비로서 현대적의미의 책들이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국민교육이 시작되었고 도서관들이 설립되기도 했다.
R.E.M.봔덴 부린크는 자신의 저서 「새로운 매체 속에 있어서의 도서의 변화」에서 ‘이미지의 정지성, 전달수단을 들고 다닐 수 있다는 점, 정보의 반복 기능성, 도서관을 통해서 언제나 신속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책의 특징으로 지적했다. 책은 과거의 여러 문화적 유산을 전달하며 또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며, 미래를 위해 보다 좋은 계획을 세울 수 있게 한다.
또한 학교 및 사회교육의 일부를 담당하고 사람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등 일반적 기능이 있다. 그러나 책은 다른 커뮤니케이션 형태와 다른 특징이 있다. 차배근의 「커뮤니케이션개론」에 의하면 종이에 영속할 수 있는 잉크로 인쇄되고 단단한 장정으로 제본된 항구성 특질과, 매체로서 문화의 보호성과 전달성 및 그 창조성을 갖고 있다. 또한 매체로서 서적은 전달범위가 커 번역과 중판 등의 복제성을 지니고 있기에 그의 생각을 세계전역에 수십억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어 대중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즉 전문적인 내용과 교육으로서 책은 인간의 가장 괄목할만한 창조이며 인간이 세운 유일한 영속물의 세계다.
클레런스 데이Clarence Day는 “기념비는 무너지고 국가는 사라지고 문명은 쇠퇴하며 암흑기가 있는 다음 새로운 민족이 문명을 세운다. 그러나 서적의 세계는 여전히 젊게 살아있고 집필하던 때와 마찬가지고 아직까지 새롭고 몇 세기 전에 죽은 사람의 마음을 지금의 사람들에게 아직도 이야기 해주고 있다”라고 했다.
이렇게 책의 현대화와 대중화가 이루어져 대중매체로서 가장 오랜 역사를 거쳐 중세 이후 기능을 가지게 되었고, 그 영향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과학 사상 등 그 어느 분야와도 관련되어 인류문화 발전에 지속적으로 크게 기여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문서적은 작은 부피에다 고도의 현실적이고 지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쉽게 옮겨질 수 있고, 마음대로 복사하고 대량생산할 수 있다. 또 주어진 한시점에서 많은 양의 음성, 이미지 감정 사상 정보자료 과학적 지식들에 대해 시공간의 문을 열어줌으로써 그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게 할 수도 있다. 나아가 다른 전문서적들과 결합하여 여러시대와 대륙에 걸쳐 또 다른 시점으로 흩어져 있는 수많은 자료들을 무난히 결집시켜 재집성하여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공을 초월하는 다양한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도구인 것이다.

3   
우리나라도 예부터 인쇄술 개발의 활성화로 유사와 사기, 수많은 실록과 대전大典을 편찬했다. 특히 조선조시대에는 대전의 편찬을 통하여 통치 근간으로 삼았고 그 내용을 정확하게 잘 기록하고 보존하여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어 지배사상과 문화 정치 사회현황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교육에 잘 활용되고 있다.
역사이래로 우리 문화의 변천 사회상을 시대적으로 이해하고 미래사의 새로운 사관과 정체성을 이어가고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사초에 의해 편찬된 사료에 근거하여야 한다.
특히 사료에 의한 도자문화의 변현과 발달과정을 시대적인 독특한 특성에 따라 조형미를 연구분석하고 교육적인 자료나 전문적인 서적을 집필하는 데에는 가장 소중한 자료로서의 근거와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사료와 실록의 기록에 의한 내용들을 수집 발췌하여 편저한 진홍섭 박사의 「한국미술사료집성집 Ⅰ,Ⅱ,Ⅲ」을 대표적인 미술사 관련 자료집으로 들 수 있다. 문화와 미술의 전분야에 관련된 왕조의 기록과 시대적 사회상은 민중의 통치와 생활상은 물론 문화예술의 근본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제1권은 삼국시대의 고려조, 제2권은 조선 전기 회화, 제3권은 조선전기 건축 조각 서사 공예 등 희귀한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출처와 더불어 편집되어 있다. 공예 편에는 조선조 도자문화사와 관련해 왕조실록, 경국대전, 경제집敬齊集 동문선東文選 허백당집虛白堂集 등에 기록된 내용이나 분량이 그리 많지 않다.
방대한 양의 실록과 각종 사료에 비해 극히 소수의 내용이 존재함은 세계적으로 뛰어난 도자문명국이었던 것에 비해 의아스러울 정도로 빈약함을 느끼면서 몇 가지 사료를 통해 그 내용들을 해석하고 분석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조선왕조 오백년간 도자문화는 품격과 실용적 기능을 갖고 일상용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며 왕실이나 사대부들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세조실록, 전 1권 세조 원년(1455년)윤 6월19일 발해조發亥條」 “공조청조工曹請造 중궁주방금잔中宮酒房金盞, 명이화자기대지命以畵磁器代之, 동궁적용자기東宮赤用磁器”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풀이하면 “세조원년에 공조가 중궁주방에 금잔 만들기를 요청하였는데 이에 임금이 그림자기로 대체하고 동궁에서도 자기를 쓰도록 하라”고 명했다는 내용이다. 1464년 「세조실록 권 30,9년 5월 왕자王子 24일」 “전라도 경차관 구치동, 득회회청어강율이진得回回靑於康律以進”의 기록으로 전라도 순천과 강진산의 토청원료가 되는 광물을 채취하게 회회청 즉 코발트를 수입하여 왕실용 청화백자를 만들게 한 것은 알 수 있겠다. 따라서 세조때(1456~1468년)에는 백자와 청화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었고 중국으로부터 고가로 회회청을 수입하여 제작된 청화백자를 법적으로 왕실 외에 구 사용을 제한하였고, 서민은 남녀를 불문하고 사용을 금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부터는 민간무역이 발달하여 중국과 일본의 자기가 유입되고 있었으나 밀무역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이에 성종실록에 경연經筵에 강론을 마치자 김영유가 아뢰기를 “지금은 부호들 집에서 다투어 청화자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당 물건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수입해 오는 사람이 반듯이 있으나, 그 폐단을 헤아릴 수 없으니 엄금을 청하니 ‘왕이 이르되 당唐물건을 수입하지 말라’고 일찍이 입법하였으니 그것을 거듭 밝히도록 하자” 고 하였다.
<성종실록, 권77, 8년 윤 2월 戌申,1477년> “어경연강흘(중략)금영유왈, 금호부지가경용청화기今豪富之家競用靑畵器, 당물唐物, 비능자래非能自來, 必有輸來之者必有輸來之者, 기상불적其尙不籍, 청통금상왈請痛禁上曰, 물무당물物貿唐物, 회기립법會己立法, 기신명문其申明文”의 기록처럼 고가의 명나라 청화백자의 밀무역을 금지하고 사용을 제한하는 법령을 제정하여 국민의 근검절약을 국가적으로 권장했음을 알 수 있겠다.
또 「승정원일기, 권262, 숙종3년 11월 21일조」 “매년 왕의 어기御器로 사용하는 백자를 법조할 때 많은 물력과 힘든 공역을 들여 구운 갑번匣番백자를 사사로이 권력층의 개인이 분원공장工匠에서 만들어 오게 하며 번조하여 갖다 주면 발색과 질이 나쁘다하여 다시 구워오라”등의 위법이 권력층에 의해 비일비재하게 성행했다. 그러나 백자의 발색과 그 질에 대단히 민감하였던 당시의 정황과 사회적인 폐단을 가늠해 본다면 갑번도자의 수준과 양질의 도자를 생산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세가지 사료의 예시를 통해서 그 옛날 조선조시대 백자나 청화백자와 관련된 시대적인 정황과 사회상을 이해하는데 유일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료들은 고려 조선조의 지배사상과 신분제도에 의해 지배자의 시각이나 도자문화의 수혜자의 시각에 의하여 집필된 사료이므로 피지배자의 관점에서 도자문화창조자 즉 장인들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책이나 사료가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하겠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전문서적은 “과거의 여러 문화유산을 전달하며 또한 새로운 문화를 창조 한다” 또 “전문적인 내용과 교육으로서의 책은 인간의 가장 괄목할 만한 창조…”라고 하였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2000년대 초부터 인재육성 방법론으로 멘토링Mentoring이 불같은 기세로 확산되고 있다. 이 멘토링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왕의 친구이자 그의 아들 텔레마쿠스를 훌륭한 왕으로 성장시킨 스승 멘토, 이 멘토와 텔레마쿠스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멘토링은 멘토Mentor도움을 주는 사람가 상호존중의 관계를 맺고 멘티의 잠재력을 개발해 인재로 육성하듯이 연구자와 전문서적, 전문서적을 매개로한 교육자와 피교육자는 바로 멘토와 멘티의 관계로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이 관계는 인류의 문화와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 것이며 또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며 그 가치와 필요성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약력
이학박사
호주 멜번 모나쉬대학교 초청방문 교수
현, 경희대학교 예술디자인대학 교수

위 사진은 본문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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