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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조각의 개척자·현대도예의 아버지 피터볼커스
  • 편집부
  • 등록 2003-03-18 16:40:13
  • 수정 2016-04-17 20:4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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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조각의 개척자·현대도예의 아버지 피터볼커스 January 29, 1924~February 16, 2002 글/편성진 예원대학교 디자인학부 도예전공교수 불과 얼마전 도예가 피터볼커스(Peter Voulkos)가 운명하였다. 내 앞에서 작업을 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도예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그가 생전에 20세기 현대도예에 끼친 자취를 지면을 통해 도예인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피터볼커스(Peter Voulkos)는 도예의 일반적 개념을 뒤바꿔놓은 당대의 가장 영향력이 있던 거장 중 한 명이다. 피터는 1950년 몬타나 주립대학교에서 페인팅을 전공하였는데 이때까지도 그는 도예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4학년 때 그는 부득이 졸업학점을 위해 도예과목을 신청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흙에 매료됐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부터 그의 천재성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피터는 1952년 오클랜드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원에서 도예 석사학위를 받는다. 그의 학위전은 뚜껑이 있는 항아리였다. 대학원 재학 시 그의 구체적인 반-공예적 태도는 이미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1953년 여름, 피터는 노스케롤라이나에 있는 에쉬빌의 블랙 마운튼 대학에서 3주 동안 강의를 맡았는데, 그곳에서 죤 케이지(John Cage),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로버트 롸첸버그(Robert Rauschenberg) 등과의 운명적 만남을 갖는다. 그 계기를 통해 그는 그 해 여름 현대미술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던 뉴욕시(맨하튼)로 발길을 돌린다. 당시 뉴욕에서는 추상표현주의가 그 절정에 이르고 있던 시기였다. 뉴욕에서 피터는 당대의 추상표현주의 운동을 이끌던 윌리엄 드쿠닝, 잭슨 폴락 등을 만나 서로 교감을 나누게 된다. 1953년 여름부터 추상표현주의자들과의 지속적인 만남은 현대도예의 아버지로 불려야할 피터 볼코스의 획기적인 도예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미술사조와의 만남을 통해 곧 그는 더 이상 공예적 제한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흙을 통한 실험을 시작했다. 새로운 열정과 함께 몬타나주의 헬레나로 돌아온 피터 볼코스는 이때 그에게 많은 도예적 영향을 준 하마다 쇼지를 비롯한 버나드 리치 등을 만나게 된다. 1954년 L.A로 돌아온 피터는 훗날 Otis Art Institute로 불리게 되는 로스엔젤레스 미술학교의 도예학과 학과장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그의 특이하고 열정적인 도예작업은 도예를 포함한 공예를 다소 폄하하던 순수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Otis를 만난 피터는 피카소의 도예작품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인다. 1950년대까지도 미술세계에서는 비전통적인 순수미술의 매체로부터 생성되는 예술표현적 공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예를 들면, 조각의 매체에 있어서 3대 요소였던 나무, 돌 금속 등은 타 재료로부터의 불가침 영역을 굳건히 구축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피터의 등장이후 흙은 그 가능성을 인정받게 되고 조각의 한 매체로 빠르게 자리잡았다. 추상표현주의-도자조각을 창조한 점토로서의 예술적 표현은 일반적 도예를 의미했던 그릇의 새로운 표현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혁신적인 심미적 표현을 요구하던 형이하학적 서구개념에 대해 관심을 보였던 고갱처럼 뒤샹은 고갱에게, 피카소는 뒤샹에게, 그리고 피터 볼코스는 피카소의 영향을 받았다. 피터 볼코스의 작업은 점점 더 거대해져 같고, 접시 형태로서의 최고의 작품은 1977년에서 1979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장작소성을 한 느낌을 가졌지만 사실은 상업용 유약으로 가스가마에서 소성을 한 것들이었다. 1978년 피터는 동료 도예가인 피터 쎌라스(Peter Cellas)를 만나게 된다. 그로부터 ‘분리된 가마’ 라는 명칭의 아나가마(Anagama)를 접하게 된 피터 볼코스는 장작소성 방법을 배우게 된다. 쎌라스의 아나가마는 당시 미국 내에서는 가장 먼저 형성된 장작소성 가마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장작소성을 통한 작품들은 흙과 불 속에서 생성된 미묘하고, 다양한 색에 의하여 확연히 구별이 된다. 직접적이고 강렬한 열을 기물에 지속적으로 가해주면 강하면서도 다양한 표현이 나타나게 되고 뿐만 아니라, 점토 표면에 나무재가 녹아 흘러내려 자연스러운 재유의 효과가 나타난다. 브론즈로 작업을 하던 시기를 이어, 장작소성은 피터 볼코스의 흙에 대한 사랑에 활기를 띠게 했다. 뉴저지에서 쎌라스와의 지속적인 소성 후 피터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형태(거대하게 포개서 만든 형태, 쭈그려 놓은 그릇 같은 얼음 물통 형태, 그리고 두껍게 만든 접시)의 작업성향을 보였는데 이 작품들은 근력과 우아함의 혼합적 형태이다. 미국의 오클랜드박물관 차석 큐레이터인 스지모토에 의하면 “피터의 장작소성 기물들은 아마도 작품의 폭(넓이)과 다양성 등 그의 경력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며 강력한 작품이다”라고 하였다. 피터 볼코스가 1950년대 매체에 추상표현주의를 도입하여 도예계를 깜짝 놀라게 하기 전, 미국 도예는 다분히 기능적이고 전통적이며 유럽적이었다. 피터 이후 비로소 도예는 조각적이고 부조적 페인팅이 될 수 있게 된다. 피터의 최종적 기물은 보통 흙과의 호전적 투쟁을 통해 그 특징이 나타난다 : 갈라진 틈, 긁고, 파내고, 깎고, 비틀고 찌르고 때로는 porcelain덩어리를 억지로 깨진 석기 구멍 속으로 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는 밑바탕의 우아함과 이러한 열광적 표면의 나열에 리듬감이 있는 것이다. 커다란 접시의 경우, 선들은 종종 우아한 기하학적인 토대 안에서 합쳐지고 서로 메아리를 이룬다. 기물들은 그렇게 되어지기 위해 잘려나가고 또한 타협하지 않는 강성함을 나타내기 위해 특징적으로 섬세함을 추가로 표현한다. 실질적으로, 그의 후반기 작업 속에서 피터의 감각적인 경향이 점차적으로 명백해진다. 피터 볼커스는 독창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불은 그의 필수적 요소였으며 피터는 대담한 스케일로 작업을 하였다. 그의 덩어리적 무거운 형태는 피카소에게서 가져왔고 다양한 색의 표현은 추상표현주의 페인팅에서 가져왔던 것이다. 피터 볼코스의 예술형태로서의 도예발전에 관한 공헌은 이처럼 복잡했다. 많은 작가들이 미국의 도예계에 참여를 했을지라도 1950년대 60년대를 통해 피터 볼코스가 그 리더의 역할을 담당했다 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피터 볼코스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소수의 미국내 도예가들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젊은 도공의 실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의 조각과 접시는 진정으로 동적이고 아름다운 내적 정신의 추상표현주의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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