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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 꽃넝쿨무늬 합
  • 편집부
  • 등록 2022-06-30 14:41:19
  • 수정 2024-07-04 16:2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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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돋보기⑮]

 

백자청화 꽃넝쿨무늬 합
白磁靑畵 寶相唐草文 盒

 

글_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 문화재 평론가

「백자청화 꽃넝쿨무늬 합 白磁靑畵 寶相唐草文 盒」 조선시대 15세기. 높이 11cm 입지름 18cm 바닥지름 15cm

조선 초기의 백자청화(靑畵白磁)는 매우 희귀하다. 같은 무게의 금값보다 비쌌던 청화안료의 수입이 원활하지 못했고 워낙 고가였기 때문에 왕실조차 꼭 필요한 경우에만 청화백자를 주문제작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는 청화백자의 생산량도 적었고 5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보존된 유물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조선 왕실이 고가의 수입 청화안료를 대체하기 위해서 국산 청화안료(土靑)를 개발하고 화사기(畵沙器)를 번조한 사례와 토청 청화백자의 시험 제조에 관한 기록이『세조실록』과 『예종실록』에 나타나지만 청화안료의 개발이 활성화되지 못했고 다만 조선후기인 18세기에는 수입 청화안료와 대등한 국산 청화안료를 개발하여 상용화하게 된다.     
  『용재총화』나 『세조실록』에 의하면 청화백자는 세조(世祖)때 처음 생산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확인된 유물은 없고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청화백자는 세조의 장인인 정정공 윤번의 부인인 인천이씨(1383년~1456년)의 「백자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석」이다. 당시에 그릇의 사용에는 고가의 청화안료 사용을 엄격히 통제하였으나 유교의 영향으로 매장문화를 중시 여겨서 묘지석(墓誌石)의 경우는 예외로 수입 청화안료의 사용을 허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의 청화백자는 대부분이 한양에서 가까운 경기도의 왕실 관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도자기의 문양은 도화서 화원의 솜씨로 추정된다. 주로 병, 항아리, 전접시, 연적, 잔, 묵호 등에 청화안료를 사용하여 산수(山水), 사군자(四君子), 용(龍), 새(鳥), 물고기(魚), 소나무(松), 화당초(花唐草), 인물(人物) 등의 다양한 문양을 그려 넣었다. 대체로 이른 시기의 청화백자는 종속 문양과 주 문양이 구분되고 정형화된 문양이 주류를 이루며 그 다음으로 산수, 화조문양 등 회화성이 짙은 문양으로 변한다.
  사진1의 「백자청화 꽃넝쿨무늬 합」은 조선 초기(15세기)에 제작된 청화백자로 수입 청화안료를 사용하여 제작한 귀한 작품이다. 이 청화백자합은 뚜껑과 몸통에 연속된 꽃무늬와 넝쿨무늬를 배치하여 무늬의 상하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뚜껑의 중심부에는 커다란 원안에 다섯 송이의 작은 꽃을 배치하여 중심을 잡고 원둘레로 화려한 연판무늬를 종속무늬처럼 둘렀다. 몸통과 뚜껑의 꽃문양은 모두 5송이를 넝쿨무늬와 연속적으로 대칭이 되게 그렸다.
  합의 뚜껑과 몸통의 결합 부위는 유약을 닦아낸 흔적이 있으며 뚜껑은 가는 모래 받침을 사용하여 소성하였다. 몸통의 바닥 굽은 조선 초기 전형적인 굽의 형태로 굽바닥의 중앙부가 약간 올라왔으며 굽다리는 낮은 역삼각형을 이루고 한 줄의 청화 선을 둘렀다. 모래 받침을 사용하여 소성하였으며 굽다리의 모래는 곱게 갈아 내었다. 태토는 철분을 잘 걸러낸 하얀 백토로 상품백자에 알맞게 수비하였으며 맑고 밝은 담청색의 유약이 뚜껑과 몸체의 내 외면에 두껍게 시유 되었고 합의 크기도 큰 편이다. (사진2)
  뚜껑의 꽃무늬는 일본 데와자쿠라 미술관에 소장된 조선 초기에 제작된 ‘백자청화 꽃넝쿨무늬 전접시’와 무늬가 거의 동일하다. 당시 비슷한 무늬의 본을 사용하여 백자 합과 백자 전접시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3)
  본래 사진1의 「백자청화 꽃넝쿨무늬 합」과 2점의 동일한 유물이 한 소장가의 소장품이었는데 지금은 인천시립박물관과 호림박물관 소장품으로 소장처가 바뀌었다. (사진4),(사진5)
  사진4와 사진5의 작품은 바닥 굽부터 입구까지 소성할 때 가마에서 생긴 균열이 있으며 뚜껑에도 약간의 균열이 있어 보수하였고 보수한지 오래되어서 보수한 부분이 변색 되었으나 전체적으로 상태는 양호하다. 반면에 사진1은 몸통과 뚜껑이 모두 온전하며 보존상태도 완벽하다.
  약 30년 전인 1994년에 외국의 경매회사에서 조선 초기 ‘청화백자 전접시’가 308만 달러(약 35억 원)에 낙찰되었다. (사진6) 이 사건은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 초기 청화백자의 예술성을 세계인들이 인정한 사례이며 예술적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려주는 결과이다. 이 유물은 현재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소장되어있으며 이 유물과 쌍둥이처럼 닮은 유물이 일본 오사카시립 동양도자 미술관에도 소장되어있다. (사진7)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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