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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관 도예가
  • 편집부
  • 등록 2003-08-25 23:2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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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예술인생에 영향을 준 3인의 조언 글/사진 박순관 도예가 나는 도예에 입문한 이후로 한번도 도예가로서의 길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거나 조금의 망설임 없이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꾸준하게 흙을 만질 수 있었다. 그렇게 된 데는 많은 분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돌이켜보면 예술계의 경험 많은 옛 어른들이 들려주신 단 한 마디의 가르침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작품의 변화나 기술적인 이야기보다는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동안에 깊게 자리 잡는 인간관계와 그 영향에 대한 삶의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민대호 선생과의 약속 나는 벽돌과 기와를 만드는 데 필요한 흙이 무진장하게 펼쳐진 한강변의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기와공장을 하셨던 아버지는 대학에서 전공을 도예로 바꾸려는 나를 말리려 했다. 그러나 나의 결심은 이미 굳혀졌고, 드디어 아버지는 당신보다 더 오랜 동안 흙과 씨름하면서 평생을 도자기와 화분을 만들며 사셨던 민대호 선생께 나를 데리고 갔다. 그 때가 1979년 군 제대를 하고 나서의 일이다. 그 어른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네는 어렵지 않은 생활환경에서 자랐으니 흙을 만지는 일을 권하고 싶지는 않네.” 미리 아버지의 귀띔을 받으신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다시 나의 결심을 분명히 표했다. “그래도 자네가 꼭 도예를 하고 싶다면 나하고 약속을 할 수 있겠나? 흙과 함께 산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거니와 그것을 배우다 말면 인생살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네. 그러니 자네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앞으로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끝까지 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서야하네. 만약 조금이라도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면 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 게 더 나을 걸세. 그럼 생각을 해보고 다시 만나세.” 나는 일주일동안의 고민도 없이 어른께 혼자서 찾아갔다. 그리고 반드시 그 길을 가겠다는 약속을 드렸고, 어른께서는 열심히 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주셨다. 결국 한 학년을 낮추어 전공을 바꾼 후에 도예가로서의 길은 시작된 것이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배움에 대한 즐거움으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보니 역시 도예의 길이 만만치는 않았다. 초창기에 민대호 어른의 난초 화분 공방에 다니면서 조각을 배우고 작품을 굽기도 했었다. 그 때 지켜본 그 어른은 언제나 도자기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셨고, 여러 개의 특허를 내면서도 사업은 계속 부진을 면치 못 하셨다. 그래도 언제나 해박한 이론을 겸비한 채, 자신이 만든 화분에 난을 키우며 꼿꼿하게 사시다 돌아가셨다. 한편 아름다움 모습이라 생각했지만, 또 한편 그런 현실에 나는 가슴아파했다. 예술을 포기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지속적인 권유는 계속되었고, 그게 정 안되면 벽돌공장을 운영하면서 도예를 겸하라는 회유도 있었지만 나 자신이 이미 결정한 도예의 길을 포기하거나 바꾸는 것은 곧 나 자신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마음을 추스르면서 나의 길을 고수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른과의 약속이 있었음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손일근 관장의 조언 졸업 후 3년이 지나서 개인전을 열겠다는 학생시절의 결심은 계획대로 이어져 1984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주위의 도움으로 1985년에는 주일 한국문화원에서의 두 번째 개인전이 이어졌고, 일본에서 모든 작품이 팔리고 나니 해외공보관에서는 미국에서의 전시를 잇달아 주선해 주었다. 나는 신이 나서 열심히 일했고 자신감을 가지고 활기 넘치게 활동했다. 그럴 즈음에 첫 개인전에 오셨던 백상기념관 손일근 관장께서 내게 조용히 조언을 해 주셨다. “서두르지 마세요. 예술은 깁니다. 서두르다 한번 그르치면 돌이킬 수 없는 인생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뜻은 말씀으로, 혹은 신년카드에 적어 보내시는 등, 3년 동안 지속되었다. 나는 느닷없는 그 어른의 조언에 의하여 주춤했고, 일본전을 준비할 때의 용기는 점점 사그러들었다. 뉴욕 문화원에서의 개인전은 연기되었고, 그 이후에 전시를 주선해 준 해외공보관의 직원이 바뀌며 그 두 번 다시 있기 힘든 기회는 연기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 이후로 좋은 기회를 놓친 일에 대하여 가끔은 후회스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미국에서도 잘 되었다면 파리로, 런던으로… 계속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지금쯤은?’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원망도 후회도 없다. 화랑계 원로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은 바로 나였고, 여러 가지의 자유로운 상상만 떠다닐 뿐, 아무런 결론은 없는 일이다. 안찬주 교수의 조언 1989년에 작업장을 옮기고 일하는 동안에 조각가 안찬주 교수님이 오셨다. 당시에는 새로운 작업장을 차리고 나니 남의 작품을 소성하는 일도 많아지고 상품을 만들어 여기저기에 한창 늘어나는 공예상점에 납품하러 바쁘게 돌아다니곤 했다. 교수님은 다 둘러보시고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신 가운데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려울 때에 오히려 좋은 작품이 나오는 법이다. 편하면(돈을 알면) 좋은 작품은 나오지 않는다.” 당시에는 ‘그 말씀이 정말로 맞는 것인가? 아니면 용기를 주시려고 억지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에 대하여 의아심을 가졌다. 한편으론 우리네 보다 한 세대를 더 사신 예술가의 말씀이니, 오랜 경험에 의한 결론일 것이라는 긍정적인 해석을 하기도 했다. 그러한 말씀이 머릿속 허공을 떠도는 사이에 조금씩 공방 운영방식은 나도 모르게 조금씩 바뀌었고, 상품을 생산하기보다는 창작품을 만드는 일에 더 정성을 기울일 수 있었다. 끝으로 다시금 생각해 본다. 1986년에 뉴욕 개인전이 성사될 뻔했던 이후로 17년이 지난 지금, 난 9회 개인전을 하러 뉴욕으로 간다. 프로스트의 시에서처럼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신비감과 현실의 괴리를 느끼면서 지낸 17년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쉬움과 함께 했던 나의 꿈이 오늘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열심히 했으니 나의 능력만큼 평가를 받을 것이고, 앞으로 흙 만지는 일을 더 즐길 것이다. 그리고 항상 나의 작업을 지켜보며 성원해 주는 주위 분들에 대한 고마움이 더욱 깊어짐을 느낀다. 필자약력 1955년 생 단국대학교 도예과 졸업 개인전 9회 1999 국제 장작가마 심포지움 발표자 및 초대작가(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2001 세계도자기엑스포, 민속도자 워크샵 시범자(여주 행사장) 2002 아오모리 세계장작가마대회 시범자 및 초대작가(일본, 아오모리) 2002 21세기 한국현대도예작가 초대전(성균관대학교 박물관) 2003 한국도예 ‘전통과 변주’ 초대전(미국, 샌디애고 시티칼리지) 현재 도예공방 거칠뫼(031-792-6350)운영 http://my.dreamwiz.com/po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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