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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John Jessiman의 나의작품 나의세계⑴ 삶의 깊은 향기
  • 편집부
  • 등록 2003-11-24 23: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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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존 제시먼 도예가 번역/최석진 도예가 우리는 젊은 시절 도덕적, 정신적 그리고 심미적 사고를 형성하게 하는 다양한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필자는 작업을 하는 동안 내가 선택한 방법들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아 왔다. 왜 작품의 표면에 선을 그리고 덧붙이기를 하는지, 왜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지 않는지, 왜 용기라는 제한성에 안주하는지, 왜 장작가마소성을 하는지, 왜 작품의 기능성을 생각하는지… 이런 어려운 질문들에 대한 답변으로써,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본인이 걸어온 예술가의 길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나는 심한 자동차 사고로 요양하고 있던 중 치료요법의 하나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결국 이것이 미술대학에 입학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처음 만난 도예 선생님 ‘마브 레이첼’은 매우 인상적인 분이셨다. 그의 수업에서 가장 기억나는 두 가지는, 그의 비평적인 자세 그리고 그가 강조했었던 ‘기교와 테크닉은 결코 궁극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비평적 평가에 대해 힘이 들었지만 결국 비평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무너뜨리게 되었다. 마브 선생님은 비평적이셨지만 또 한편으로 나의 특성인 단순성을 길러야 할 필요성을 파악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내가 비평과 실패를 기꺼이 받아드리겠다는 마음을 기르도록 해 주셨다. 나는 미술교육을 전혀 받아 본적 없이 벨 주립대학 미술프로그램에 들어갔다. 하지만 대학에서 배우는 비평수업과 작품에 대한 이해의 적절한 밸런스 덕분에 성공적으로 수업을 할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학생들 개개인이 비평에 얼마나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이해는 많은 학생들과 적절히 교류하는 방법을 깨닫게 해주었다. 발 쿠싱(Val Cusing)은 내가 알프레드 대학원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 중 한 분이다. 대학원의 모든 선생님들이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발은 평생 스승님이셨다. 난 그의 조교가 되었고 그는 내 작업을 통해 아직도 계속해서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신다. 내가 알프레드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서, 발은 나를 바닥부터 천장까지 졸업생들과 유명한 도예가들의 작품으로 가득찬 글로리홀로 안내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하마다(Hamada), 리치(Leach), 솔드너(Soldner), 오티오(Autio), 타캐주(Takaezu), 프라이스(Price), 쉐너(Shaner), 그 밖의 많은 분들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중국, 일본, 한국의 전통적 작품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런 과정 중에 나는 예전에 경험해 보지 못하였던 다양성에 압도당하게 되었다. 내가 글로리 홀에 처음에 방문했을 때를 되돌아 생각해 보면, 일본 도예가 ‘로산진’의 그릇에 매료되었던 것이 기억난다. 특히 30센티미터 높이의 실린더형 화병에 이끌렸다. 그것은 투박했고, 시유되지 않았으며 표면에 긁힘이 있던, 짙은 회색계열이었고 크기에 비해서 매우 무거웠다. 나는 이 용기들의 역사적인, 문학적인 또는 철학적인 이해가 전혀 없었지만, 그 방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고 또 다른 로산진 작품들이었다. 로버트 마더웰은, “사람이 어떠한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데에 완벽한 이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발은 그 작품들이 바로 비젠의 장작가마에서 소성된 것들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 당시만 해도 소수의 학생들만이 일본의 장작가마 기물들을 보았을 뿐이다. 어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그렇게 새롭게 발견한 작품들에게 매혹 당하게 되었다. 분명 그 그릇들은 나의 기준에 비해 너무나 무거웠다. 시유되어 있지 않았으며 표면도 거칠었고 비대칭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 방에서 어느 것이든 가질 수 있었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 그릇들을 선택할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마브 레이첼이 언급했던 것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은 최종적인 선택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그 그릇들은 정신적인 면, 삶, 그리고 문화 그 자체를 내포하고 있었다. 비록 이런 그릇들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거나 알 순 없지만 그 그릇들은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이 경험은 예술을 대하는 모든 사고방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부터 도예용기의 기교나 기술로서 작품성을 평가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그 기가 갖는 다른 아름다움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숙련공들은 기교적으로 얼마나 잘 만드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나의 할아버지는 공들여서 지어진 남부 로드아일랜드의 주택에 타원형이나 원형의 계단을 많이 만드셨던 훌륭한 기능인이셨다. 접착제나 못 없이도 서로 정교하게 들어맞는 멋있는 가구들을 만드셨다. 나는 그의 기술에 대해 존경심을 품으면서 자랐다. 그러나 그것이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되었을 때 갈등하게 되었다. 나는 아직 그의 작업들을 아주 경탄해하며 좋아한다. 그러나 그가 만든 계단과 가구는 이미 만들어진 모형대로 되어질 뿐 그의 어떤 예술성도 표현되어져 있지 않다. 예술을 언제나 기술 위에 존재하며 경험의 다양성과 깊이를 반영한다. 알프레드에서의 첫 학기동안 나는 화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도예가 댄로드를 위해 가마를 다시 만드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의 집에서 일하는 동안 아시아철학과 예술사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다른 아시아 국가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불교의 선 사상, 비젠 용기 그리고 일본인들의 다양한 전통양식을 설명해 주었다. 댄의 경험과 삶은 아시아 문화에 대한 지식과 애정에 의해 많이 영항 받아 왔으나 그의 작업은 그곳에서부터 나온 것은 아니다. 그는 매우 의욕적이었으며 커다란 형태를 제작하는 여러 가지 새로운 방법들을 개발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도예 기법들에 대해 만족하기보다 새로운 방법들을 모색하라고 가르쳤다. 그는 아이디어가 지극히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한 아이디어는 재료의 속성과 제작과정이 동시에 생각되어져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였다. 어느날, 필자가 빈 메릴 홀에 거의 다다랐을 때 폭스바겐 한 대가 나의 창문쪽에 세워져 있었다. 바로 폴 솔드너와 킨 퍼거슨의 방문이었다. 그날 나의 작업은 자연적으로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그 날 오후에 폴, 킨과 함께 뉴욕 웨이랜드의 루쓰 맥킨리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필자는 루스의 작업실에서 처음으로 장작가마를 보았다. 로산진의 용기들과는 다르게 루쓰의 도자기들은 소성하였을 때 나오는 불꽃들이 만들어낸 무늬들로 인한 섬세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이었다. 소성과정은 비슷했으나 결과는 아주 달랐다. 그리고 비록 그 당시 이러한 경험들을 지적으로 분석할 수 없었지만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자리하면서 나의 작업의 풍부한 자원이 되었다. 필자가 대학에서 가르치기를 시작했을 때 스스로 많은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하고 많은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하는데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이 답변들은 학생들에게 많은 작품을 보여주면서 해줄 수 있지만 이런 방법들은 좋지 않은 답답한 강의라고 생각했다. 목표는 의문점을 가질 때 발전되어진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훌륭한 교수이라면 새로운 질문들이나 도전에 의해 야기되는 질문들에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교수으로서 학생들의 심미적 여행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절대로 그들의 목표나 종착점을 결정해서는 안된다. 교수는 학생들을 특별한 심미적 관점으로 가르치면 안된다. 학생들이 그들의 관점을 개발하도록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관점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경험에 비추어 보면 나에게 가장 훌륭한 선생님은 내가 새로운 답을 찾도록 도전하게 하는 선생님이었다. 물론 몇몇 비평가들은 부정적일지는 몰라도 좋은 선생님은 학생들이 좀더 깊이 있는 다른 새로운 대안을 찾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선생님으로서 학생들에게 해답을 일방적으로 주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질문을 던지거나, 스스로 답을 찾는 방법을 제공하려고 노력해 왔다. 답을 제공한다는 의미는 다른 의미에서 보면 예기치 못했던 해결법을 찾는 길을 빼앗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각 비평의 순간마다 학생들에게 계속 성공적인 작업을 한다고 해도 그들은 침체기에 있을 수도 있고 또한 예술가로서 성공한다는 의미는 실패 또한 포용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어제 만든 작품이 예술세계의 외부에서는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다고 하더라도 예술가들에게 그것은 이미 침체인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안 나는 자주 학생들에게 학교 미술커리큘럼에 대한 불평을 듣곤 하였다. 그들은 왜 드로잉이나 디자인사를 이수해야하는지 의구심을 갖곤 했다. 이러한 질문들은 학생들이 경험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수업들이 그들의 초기 목표로부터 많이 벗어난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지금껏 여러번 그러한 질문을 받아왔다고 말해주면서 이 같은 수업들이 그들에게 최상의 도움이 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도록 노력했다. 예를 들어 테드랜돌(Ted Randall)은 많은 책을 읽고 토론을 해야 하는 꼭 이수해야 하는 세미나를 열었다. 그들은 알프레드 대학교의 책상에 앉아서 철학을 논하러 온 것은 아니다. 몇 년 후 나는 이런 과목을 이수하였고 더불어 지적 확신과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여러 과목의 미술사, 문학을 들으며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학생들과 동료들과 토론하는 능력이 크게 향상되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이 글은 Ceramics Monthly 2002년 11월호 38페이지의 글을 미국 도예협회(www. ceramic.org)의 동의 하에 번역한 것입니다. “Reprinted from Ceramics Monthly, November 2002, page 38. Reprinted with permission of the American Ceramic Society, www.ceramics.org. Copyright 2003.” 작가약력 BA 볼 주립대학 졸업 MFA 뉴욕주립대학, 알프레드 졸업 1963-1997 뉴욕주립대학, 코트랜드, 교수역임 작품소장 스미소니언박물관, 알프레드대학, 이타카 대학, 아치브레이 재단, 롱우드대학, 제록스 코퍼레이션, 어빙블럼 컬렉션, 골드화브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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