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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김영기
  • 편집부
  • 등록 2004-01-26 15:4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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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의 현대화와 생활화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작가 변화무쌍한 작품에 담긴 그 만의 개성은 변함이 없다 도예가 김영기(38). 분청작가로 잘 알려진 작가다. 그는 대학에서 처음 도자기를 접한 후 10여 년간 줄 곳 분청작업만을 고집해왔다. 그가 펼쳐온 작업의 면모에는 우직한 듯한 단순함과 변화무쌍함이 공존한다. 상반된 의미로 어폐가 있는 듯하지만 분청이라는 한 영역 안에서 최대한의 다양함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주경야독하며 물레실력 쌓아 26세에 서울서 작업실 마련 공방운영 김영기는 1986년, 홍익공업전문대 공예디자인과 재학시절 그의 선배이자 당시 조교였던 김대훈씨의 영향으로 도자기물레성형과 분청작업에 매료되었다. 이후 89년 서울산업대 도예과 야간반에 편입학해 낮에는 이천의 한 요장에서 물레대장으로 일하며 학비를 마련하고 밤에는 서울서 학업에 매진했다. 졸업 후인 1991년, 그는 남들과 비교하자면 꽤 이른 나이인 26세에 서울 상도동에 25평짜리 공방을 마련했다. 당시 자신의 모습에 대해 “당찬 생각이었지만 3년여 동안 요장에서 일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실을 직접운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내 작업실이 생기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충만했다”고 전한다. 많은 경험에 의해 남다르게 뛰어난 물레실력을 지닌 그는 자신 있게 만든 생활도자기를 직접 들고 인사동의 아트숍을 찾아다니며 직접 납품을 성사시켰다. 91년 첫개인전, 청년작가로 발탁 ‘토도랑’서 초대전 95년 2회 ‘현대분청장군전’ 현대조형감각으로 재해석된 작품 평 김영기의 첫 개인전은 91년 서울 인사동 ‘토도랑’에서 열렸다. 당시 토도랑과 토아트스페이스 관장이었던 우병탁씨에 의해 청년작가로 발탁돼 ‘생활용기전’을 갖게 됐다. 이 전시에는 컵을 비롯해 테이블, 의자, 화병 등 컵으로부터 시작, 변형된 다양한 형태의 기능성 조형작품을 선보여 관심을 모았다. 2회 개인전은 서울산업대 대학원 두 번째학기였던 95년, 인사동 동호갤러리에서 가졌다. 주제는 ‘분청장군’이었다. 전시에는 전통분청의 형태에서 벗어난 현대분청장군 작품 30여점이 선보였다. 용기로서의 탈피와 형태의 변형을 시도한 전시였다. 그는 “당시에는 오지나 옹기로 만든 똥장군(똥을 담아 옮기는 통)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기존의 것과는 다른 현대조형적 감각으로 새롭게 해석한 분청장군을 만들어내고 싶었다”고 한다. 과감하게 휘어진 주둥이와 철재유를 바르고 환원 번조해 노란빛과 검은빛이 자연스럽게 융화된 독특한 형태의 이 현대분청장군 작품은 95년 서울현대도예공모전에 출품 특선을 수상해 “우리 문화를 해학적으로 재해석한 새로운 시도의 현대작품”이란 평을 받기도 했다.<사진1> 이어 96년에는 3회전으로 ‘분청접시전’을 인사동 통인화랑에서 초대전으로 가졌으며 97년에는 대학원 졸업논문인 ‘장군을 이용한 현대도자 연구’ 작품전을<사진2>, 98년에는 통인화랑서 4회 개인전으로 ‘분청항아리전’을, 99년에는 서울 목동 행복한세상 내 통인갤러리에서 ‘생활자기’전을 연이어 가졌다. 년 5회 이상 일본 방문 고이에 료지 작업실서 작업 일본진출 개인전 3회 통해 작품의 전환점 마련 김영기는 99년 7월, 일본 기후현 가미야하기에서 열린 ‘한일도예캠프’에 워크숍 작가로 참여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만난 고이에 료지 아이치현립대학 도예과 교수의 작업에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된다. 이듬해인 2000년 경희대에서 열린 ‘한일도예캠프’에서 고이에 료지 교수와의 두 번째 만남을 가진 후 그에게로부터 배움을 얻기로 다짐하고 1년에 5회씩 일본을 방문, 한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 진출은 이전까지 국내에서 연이은 작품전시 활동으로 활발한 전성기를 맞고 있었지만 무언가 또 다른 새로움을 찾고 있던 그에게 전환점을 마련해준 계기였다. 그는 “일본에 들어가 고이에 료지 선생의 작업장에서 배움을 갖는 시간은 항상 나에게 새로운 도전을 갖게 하는 시간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작가로서 필요한 많은 것을 깨닫고 있다”고 전한다. 김영기는 일본에서의 활동을 통해 우리보다 훨씬 대중화 된 일본의 도자식기 사용문화를 통해 도자식기의 중요성을 느꼈다. 그 깨달음은 일본에서 열린 도자기축제 참가와 3번의 개인전 등을 통해 드러났다. 2001년 11월 요코하마 인근 지역인 오다와라 지역의 마츠리(축제)에 일본공예협회 초청으로 부스를 마련해 참가한 그는 행사기간 내내 도자기를 구입하기 위해 인파가 몰리는 광경을 보고 일본인들의 생활도자기 쓰임의 범위가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넓은 것에 놀랐다. 이어 2002년 9월 동경의 이누이갤러리에서 가진 일본에서의 첫개인전에서 또 한번의 깨달음을 얻는다. 이 전시에서 그는 구멍난 치즈 덩어리 형태를 응용해 뚫기 기법으로 만든 화기 작품 50여점을 선보였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실용성이 부족한 생활도자기였기 때문이었다. <사진3> 이듬해인 2003년, 마시코 ‘토코갤러리’에서 열린 일본에서의 2번째 전시에서는 그가 일본에서 제작한 장군작품과 생활도자기를 함께 선보였다. 전시기간이 마시코지역 마츠리와 같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전시장에는 많은 현지인과 외국인들이 방문했다. 방문객들은 한국인 도예가가 한국전통의 정서를 담은 작품을 일본에서 만들어 선보인다는 것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사진4> 일본에서의 3번째 전시는 지난 10월 나고야의 ‘안리갤러리’에서 가졌다. 이 전시에는 한국에서 제작한 분청생활용기 작품을 직접 들고가 선보이는 시도를 했다. 표면에 문자를 박지문으로 장식한 작품이었다. 작가의 지난 전시를 지켜봐온 몇몇 사람들은 한국과 일본의 재료가 다름에서 오는 전혀 상이한 느낌의 작품을 통해 개성 있는 한국인 도예가 김영기의 새롭고 독특한 시도에 더욱 관심을 나타냈다. 04. 12월 서울 청담동서 가진 ‘백명일기전’ 치열한 삶의 내용 문학적 감성 일기로 표현 최근 몇 년간 일본을 지속적으로 드나들며 활동 중이던 그가 국내서 오랜만에 개인전을 가졌다. 지난 12월,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갤러리토마도’에서 가진 ‘백명일기(百皿日記)전’은 오랜만에 국내에서 갖는 반가운 전시였다. 전시에는 특유의 화장토 흘림기법을 담은 분청접시 100개를 선보였다. 접시에는 작가의 아동기에서부터 청소년기, 최근의 것까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들을 담았다. 접시 표면을 걸쭉하게 흘러내린 화장토 위에 갈겨 써 옮겨진 작가의 과거일기는 분청의 텁텁함과 잘 어우러졌다. 7세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접시, 흙작업에 대한 회의, 질책 등의 메시지를 담은 접시, 작업을 돕는 후배의 아픈 추억을 담은 접시 등은 작가의 과거 회상으로 보는 이를 끌어들인다. 이 전시의 작품은 “문학적인 감성과 자신의 치열한 삶의 내용들을 기록한 지극히 사적(私的)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분청과 상감기법 등으로 표현된 접시들은 전시장 안에 늘 자리하고 있었던 것처럼 차분하고 친숙한 모습”이라는 평을 받았다.<사진5> 김영기는 “작가는 작가다워야 한다. 지속적인 연구, 답습이 아닌 나만의 개성을 지녀야 한다”고 전한다. 분청이란 한 줄기 안에서 계속 변화되는 그의 작업이지만 그만의 독특함이 담긴 분청은 변함이 없다. 그는 조만간 13년간 정들었던 작업실을 정리할 계획이다. 또 다른 그만의 분청세계를 펼쳐보이기 위해 서울을 벗어나 가스가마가 아닌 장작가마를 손수지어 그 만의 분청 작품을 구워내고 싶어 한다. 일본 진출이후 두 번째의 새로운 도전이다. 김영기의 작품세계에 있어 두번째 전환점이 되길 지켜봐야겠다. 김태완 기자 anthos@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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