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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신한균
  • 편집부
  • 등록 2003-02-26 14:50:28
  • 수정 2016-04-17 21:5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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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동안 함경도 회령사발 재료특성 학술연구 재현에 몰두 중국 일본에서 맥이어간 회령재유 우리나라엔 없어 안타까워 역사 속에 잊혀지고 왜곡된 우리의 문화유산을 찾아내고 발전시키는 것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에 못잖은 의미를 갖는다. 도예가 신한균(44)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함경도 회령지방의 도자기를 연구하고 재현하는 작가이다. 회령 도자기에 대한 그의 관심은 1990년 일본의 후쿠오카에서 열린 ‘당진소(唐津燒)’전시에서 ‘오고려(奧高麗)’라는 이름의 문화재 도자기를 보게 되면서 시작됐다. 일본에서 말하는 ‘당진소’는 일본 큐슈의 당진(지명)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를 이르는 말로 조선 당진의 도공들이 일본의 큐슈로 건너가 정착한 도자기이다. “직감적으로 조선의 ‘당진’, ‘오고려’라는 이름이 우리나라와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 됐습니다. 많은 골동품 도자기들을 봐 왔지만 ‘오고려’는 한눈에도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신한균 도예가의 연구는 이미 10여년을 훌쩍 넘어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과 접근한다. ‘오고려’가 여진족이 중국 북방을 침범해 세운 ‘금’에 속해 있었고 지금은 백두산줄기가 닿아있는 두만강하류의 회령지방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라는 것이다. “여진족은 북방의 도공들을 자신들의 본거지인 흑룡강으로 강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게 이동된 도공에 의해서 중국의 균요가 생겨났습니다.”회령도자기에 대해 말하는 그는 적잖이 흥분해 있었다. 균요 도공들의 본거지였던 중국 북방이 곧 회령이라는 설명이다. 신한균 도예가는 지난 12년동안 회령사발이 갖는 재료적 특징과 학술적 연구와 재현에 몰두했다. 지난해 7월 서울 삼청동 ‘불일미술관’에서 선보인 그의 작품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국식이라느니 일본식이라느니 하는 평가를 내렸다. “우리나라에는 회령 도자기에 대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 답답할 따름입니다. 그 동안 연구한 것들을 올해는 지면이나 세미나 등을 통해 발표할 계획입니다.” 청자, 분청, 백자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도자기는 소나무와 참나무를 태운 석회질 재에 장석(규산)을 섞어 사용한다. 회령의 도자기는 장석을 석지 않고 짚재를 이용한 규산질 재를 기본으로 석회질 재를 혼합해 사용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유약에 첨가물과 조합비에 따라 유탁에서 검푸른 빛에 이르는 다양한 빛을 낸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맥을 이어 널리 쓰이고 있는 회령식 재유가 우리나라에만 없다는 게 말이 안되는 일이지요.” 회령도자기의 재현은 전통의 기법대로 유약과 태토를 만들고 재래식의 번조과정을 거치는 힘든 작업이다. 진정한 도자기의 미는 사용하면서 발견된다는 신념으로 통도사 인근 장작가마에서 새 ‘예술식기’작업에 심취 그는 ‘전통도자’의 재현에 있어 남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10년이 넘게 회령에서 만들어진 도자기 하나에 홀려 회령도자기를 연구해 왔지만 그가 직접보고 찾아낸 것들을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쓰여지지 않는 도자기는 도자기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진정한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사용하면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기법으로 만든 것이라도 현대에 잘 쓰여질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치를 지닙니다.” 일본인들이 우리 옛도자기를 경외하는 이유도 예쁘게 보이려고 만든 게 아니라 사용하기 위해, 사용하기에 가장 적절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일본 고미술 경매시장에서는 소장자(곧 사용자)가 누구였는지도 낙찰가에 큰 영향을 준다. 도예가 신한균은 도자기에 대한 자신의 철학대로 쓰여지는 도자기들을 만든다. 생활 속에서 가까이 두고 사용하면서 사용자가 그 도자기의 참맛을 느끼고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이다. 회령도자의 태토와 유약을 연구하고 재현해 낸 그는 후원인의 도움으로 식기작업만을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다. 그의 부친인 원로도예가 신정희선생의 요장이자 그가 현재 작업하고 있는 경남 양산의 통도사 인근의 ‘신정희 요’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대숲을 끼고 있는 아늑한 터에 새로 장작가마를 짓고 작업장을 꾸미고 있다. 올 봄이면 새로운 작업장에서 ‘예술식기’를 작업하게 될 기대에 부풀어 있는 그의 모습에서 젊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원로도예가 신정희선생의 아들로 4형제가 도예가 NHK에서 회령도자기 제작과정 일본전역에 생중계 그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대학강단에 서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도예가가 된 것을 필연에 대한 항복일 수도 있다. 그의 부친은 일제 강점 말기에 출생해 전쟁의 혼동기를 거치면서도 사발에만 매달려 일본의 중앙방송과 황실에서 이도다완의 재현작가로 인정받은 도예가 신정희선생이다. “아버지는 가족보다도 도자기가 우선이었던 분이셨습니다.” 어린 시절 눈만 뜨면 옆에 있던 사금파리들이 지겨웠다는 그는 철이 들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 지 깨달았다. 외곬의 도예가 한사람의 지순한 열정은 네 형제를 모두 도예가로 만들었다. 1990년 동경에서 첫개인전을 열고 이후 94년에 두번째 개인전을 가졌다. 부친의 작업을 전수 받은 그에게 있어 ‘회령도자기’와의 만남은 작업 세계의 큰 획이 됐다. 1997년 일본 매체로부터 회령도자기 재현을 인정받았고 2001년에는 일본의 공영방송 NHK에서 한국으로 방송장비를 동원해와 그의 회령도자기 제작과정을 일본 전역에 생중계하기도 했다. 지난해 9월에는 일본 후쿠오카에 이와카야 미술화랑초대전과 삼청동 불일미술관 초대 ‘신정희·신한균 부자전’ 갖기도 했다. “올해 6월에 계획돼 있는 전시로 일본 교토의 다카시마야 미술관 초대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계획 중 제일 큰 것은 회령도자기에 대한 연구결과를 책으로 펴내는 것입니다.” 흙은 3~5년 묵혀 사용하고 9칸짜리 가마에 불오르면 20일 가기도 “저희 요장에는 아버지 제자들이 항상 4~5명씩 있습니다. 그래도 저 가마 일년에 3번 밖에 불을 못 땝니다.” 모든 공정을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이용해 직접 손으로 해내기 때문에 그 이상 만들어 낼 수가 없다. 파온 흙은 3~5년씩 묵혀놔야 되고 짚을 태워 만드는 재는 시간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9칸짜리 가마에 불이 오르면 몇날몇일간을 헤아리기도 버거운 긴 불이 이어진다. 불은 때때로 20일을 넘기기도 하고, 첫칸에만 5박 6일동안 장작을 넣기도 했다. “장작을 넣다 보면 불이 닿지 않은 마지막 한 개의 도자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넣은 장작 한 개비 때문에 그 칸을 망쳐버리기도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차라리 하나를 포기하지 왜 그렇게 하느냐고 되묻는 질문에 ‘그런게 있다’고 ‘해본 사람만 안다’고 뭉뚝하게 답한다. 기자가 신한균 도예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TV다큐멘타리를 통해서였다. 물론 그 방송은 그의 부친인 신정희선생의 삶과 도자기를 소개하는 것이었으나 그 후계자인 신한균씨의 열정도 못지 않아 보였다. 누군가의 후광을 받는다는 것은 때로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기자가 만난 도예가 신한균은 훌륭한 스승의 제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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