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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필 한국세라믹기술협의회 자문위원
  • 편집부
  • 등록 2005-07-03 03:53:34
  • 수정 2010-10-25 16: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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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제조이론 및 기술 연구 전수에 한평생 바친 전령사 박용필 고문이 세라믹스와 인연을 맺고 도자기공업의 발전을 위해 열정을 쏟아 온 지도 반세기가 넘었다. 해방 후 국내 도자기공업의 발전역사는 박용필 고문이 세라믹스 분야에 남긴 발자취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연구와 실험 끝에 얻게된 이론을 공장 설비에 직접 적용하거나 기술 전수로 도자기공업의 발전을 이루는데 한평생을 바친 박용필 고문. 도자기의 고급화 및 자기제조기술 혁신에 힘써온 박 고문의 열정과 노력은 결국 값진 결과를 이뤄내게 됐다. 박용필 고문은 1942년에 동숭동 소재 중앙시험소 요업부에 입소하여 세라믹스를 처음으로 접하게 됐다. 박 고문은 그 당시 요업부장실에서 규산염비속광물 화학분석을 담당했고, 해방 후 무기화학과에서 일반금속 또는 금속광물의 분석화학 연구 후 다시 요업과에서 연구·실험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분석화학에 대해 공부한 것이 세라믹스를 전공하는데 큰 밑거름이 된 것 같아요. 이후 요업과로 복귀해 세라믹스 원료, 소지, 유약 밑그림 채색료 등의 시험연구에 몰두하면서 세라믹스분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죠.” 해방 후 중앙시험연구소에서 경험을 쌓고 있던 박용필 고문은 6·25전쟁 발발로 1951년 1·4후퇴 당시 대구로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이를 계기로 박 고문은 대구에 위치한 계림요업유한회사에서 3년동안 공장 생활을 하게 됐으며, 1954년에는 중앙공업연구소 요업과로 복귀하여 본격적인 실험 연구에 돌입하게 된다. 최초 고급 커피세트 개발 등 도자기 기술의 신바람 일으킨 장본인 “공업연구소 요업과로 복귀하면서 중간공장(자기질 식기)를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도자기연구실에서는 도자기 원료, 소지, 유약, 밑그림용 채색료 등의 지속적인 시험개발과 동시에 대학출신 연수생들에게 기술연수장을 제공하는 등 세라믹스 기술자 양성에 전념했습니다.” 이외에도 박 고문은 도자기 중간공장을 운영하면서 소지와 유약 및 생산기술의 개발, 유상채색소성 muffle가마(700℃)를 개발 설치하고, 가마 소성방법의 확립으로 국내 최초로 고급 커피세트를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커피세트는 도침을 이용한 엎어굽기 기술을 이용해 컵 중량을 줄이고 유상채색전사지와 수금을 사용하는 등 기존의 도자기와는 차별화된 고급 디자인을 구축했다. 박 고문은 “오늘날의 커피세트는 일반적이고 흔한 상품이지만 그 당시 커피세트는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킨 품목이었다”며 “특히 두껍고 무거운 막사발, 대접 등이 주를 이뤘던 제품들을 대신해 백색도가 높고, 얇지만 잘 삐뚤어지지 않으며 가볍고 투광성있는 고급 제품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이다”고 덧붙였다. 박 고문은 고급 도자기 제작·생산기술 전수를 위해 당시 행남사, 밀양도자기 등 국내 여러 공장에 직접 기술 지도에 나서는 등 기술 전령사 역할을 거침없이 해냈다. 이어 박 고문은 1963년도에는 일본통상성나고야공업연구소에서 10개월간의 연수를 받게 되는데, 원료, 소지, 유약, 안료 등의 이론가인 가도엔스죠 박사로부터 도자기 제조 생산기술을 익히는데 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일본 전국을 누비며 생산기술을 익히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어요. 百聞, 百見, 百讀의 의지로 10개월을 보냈죠.” “도자기를 향한 철두철미한 사명감과 애착심은 곧 삶의 원동력” 도자기 관련 기술을 전수하려는 박 고문의 열정은 1965년 중앙도자기 상무직을 맡으면서 더욱 불붙기 시작했다. 중앙도자기의 공장 내 자기 제조기술의 혁신을 위해 고급 식기 생산 설비 전환으로의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한 것이다. 박 고문은 힘들었지만 의미있었던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당시 자기질 한식기와 도기질 접시를 생산하는 중앙도자기 공장에는 독일제 터널가마와 상회소성용 muffle터널가마 외에는 별다른 시설이 없어 질보다 양을 중점으로 생산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공장장을 겸한 저는 3개월 동안 공정개선과 소지, 유약의 안정화된 조합비와 분쇄시간과 내화갑의 개량, 고급자기로의 전환을 위한 석고형제작 등을 위해 남다른 각오로 일에 임했습니다. 제품의 고급화와 생산성 및 수율을 높이는데 중점을 두면서 저는 일하기 좋은 공장 환경을 만들기 위해 3개월간 종업원들을 대상으로 직접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제가 직접 종업원들의 손톱을 자를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생산기술의 월등한 향상을 이뤄내는데 성공하여 일류급공장 제품보다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당시 제게서 야단도 많이 맞고, 질책을 받았던 종업원들은 저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지만, 3~4개월 후 좋은 결과가 나오니 다들 전의를 가다듬어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데 전념했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뿌듯한 순간이었습니다.” 박 고문에게서 새로운 도자기 분야의 개발, 발전을 위한 철두철미한 사명감과 애착심이 느껴진다. 공장기술 지도 및 전문 기술자 양성을 위한 박 고문의 열정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박 고문은 1973년 진흥요업의 상무직을 맡고, 1977년에 모자이크 타일 생산 자동화공장 설립을 통해 700만불 수출 실적을 달성해 화제가 됐다. 또한 저팽창 cordierite 내화갑을 개발하는데 성공하여 제품의 100% 국산화를 이뤄냈으며, 신라호텔 외장타일용으로도 쓰였던 철적색유를 국내 최초로 개발하여 또 한번의 국내 도자기술의 신바람을 일으켰다. 신체마비도 물리친 박 고문의 열정 이후 1979년에 잠시의 휴식기를 갖고 외부원고 및 고문, 기술지도, 잡지사 원고 투고 등의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박 고문은 예기치않은 신체 마비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갑작스러운 신체 마비로 말도 못했으며 제대로 걷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에게 기술고문으로 일해 달라는 삼보도기 측의 제의를 받게 됐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매일 회사에 나가 하루도 빠짐없이 공장 일지를 써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마비되었던 내 몸은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건 아마도 일에 대한 열정이 내 몸을 건강하게 만든게 아닌가 합니다.” 불편한 몸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회사를 오가며 열의를 불태웠던 박용필 고문에게서 진정한 프로정신을 배운다. 이후 박 고문은 가람도자기와 영풍산업 기술고문으로서 소지 유약개발은 물론 과학적인 원료선택방법의 도입으로 원가절감에 기여했으며, 자기의 안정성있는 소지유약개발 및 색유약개발로 특색있는 신제품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진정한 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체험하고 자신만의 지식기반을 확립해라! 건강이 허락하는 한 세라믹스 발전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는 박 고문은 현재 세라믹분야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 소견을 밝혔다. “인건비가 싼 중국 도자기의 영향으로 점점 도자기 산업이 쇠퇴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도자기만의 브랜드 파워가 중요합니다. 가령 외국의 도자기 업체의 경우, 브랜드 파워가 강한 대기업은 중소기업 위주의 OEM제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중소기업 위주의 OEM체제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도자기 산업에서도 OEM체제를 통한 완전 분업화로 제품을 생산하는 시스템 도입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기술전수 현장을 떠나온 지금도 박 고문은 도자기 기술과 관련된 논문 및 원고투고, 번역 일에 열심이다. 일을 향한 끝없는 열정으로 기적처럼 건강까지 되찾은 박 고문은 도자기 산업에 도전하는 후학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도자기 산업에 뛰어든 후배들이여, 실제 경험을 많이 쌓고, 국내·외의 도자기 기술 발전 상황을 항상 유의하고, 관찰하십시오. 또한 과학을 기초로 한 기술 개발의 중요성을 깨닫고, 도자기의 기본기술이 해결되면 그 다음은 디자인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앞서 제가 말한 것들을 열심히 체험하고 공부해서 자신만의 축적된 기술기반이 확립되도록 일생을 바치십시오.” 윤나리 기자 요업총협회 연구발표 당시 모습(1970, 11) 일본 구주가고시마 작품 및 유물견학 기념 사진(1987.5) 요업(세라믹)기술원 주최로 개최된 ‘제4회 요업원료 심포지움’에 참가한 박 고문(1992.12) 요업총협회 47주년 기념 공로상 수상장면(1993.9) 박용필 고문 주요 약력 1942~1964 국립공업연구소 요업과 공업연구관 1959~1960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도예과 강사 1965~1972 중앙도자기(주) 기술상무, 공장장 1973~1979 진흥요업(주) 전무이사 1974~1975 단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요업공예과 강사 1979~1980 한국종합화학공업(주) 도자기부 고문 1981~1989 삼보도자기(주) 상임 기술고문 1982 대한요업총협회 편집위원 1985~1990 한국세라믹기술협의회 창설, 회장 1987 국립공업시험원 도자기시험소 자문위원 1988 월간세라믹스 편집위원 1989~1990 서울도자기 기술고문 1989~1998 (주)가람도자기 기술고문 1990 공업진흥원 기술지도위원(공산품품질향상) 1990~현재 한국세라믹기술협의회 자문위원 1994 산업표준심의회 요업부회 타일 및 도자기 전문위원 1994~1998 영풍산업(주) 기술고문 1996 직업훈련교재 편집위원(도자기공예이론·기술) -노동부 한국산업인력공단 1996~현재 흙붙이 연구회 정회원 1998~2005 요업(세라믹)기술원 도자기센타 기술고문, 자문위원 1999 품질표준원 산업표준심의회 요업부회 식품용 도자기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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