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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미학의 담론화
  • 편집부
  • 등록 2005-10-12 11: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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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미학과 담론의 활성화
도예미학의 담론화 
글 윤두현 _ 박여숙화랑 큐레이터

 

현대 도예미학의 현주소
전통도예에 대해 미학적 차원에서 처음 기여한 이는 이른바 ‘비애미’의 주인공인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일 것이다. 물론 그가 펼친 이론에 있어서 적지 않은 한계와 문제점은 이미 밝혀진 것과 같다하더라도 동양미학적 접근으로 서구의 미학의 굴레를 극복하고자 시도했다는 점은 현재적 차원에서 다시 그를 주목해 보아야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 “서구의 전통적인 미학사는 비범의 미학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며 그런 점에서 ‘평범’의 개념에 근거한 야나기의 민예론이나 조선예술론은 서구의 미학적 논의나 예술론에서는 단서를 찾기 힘들다” 라는 이인범의 평가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야나기 무네요시가 국가간의 미묘한 대립적 차원을 넘어 한국의 도예미학에 음과 양으로 끼친 영향은 크다. 이후의 최순우, 김용준, 김원룡, 이동주 등에서도 ‘자연스러움’이라는 차원에서 야나기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발견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점에 비춰 볼 때 현대 도예미학의 현주소는 어떤가?
과연 현대도예에 현재적 차원의 도예미학이 존재하거나 했었는가라는 질문은 도예계에 뼈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 이후 한국의 현대도예에 더 이상 미학적 차원에서 언급할 논의의 여지가 없기 때문은 분명 아니리라 믿는다.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에 따르면 현재 도예계의 현실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지 조차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문제의 이면에는 현대도예의 출발 자체가 주체적 과정으로 보기 힘든, 즉 애초에 전통과의 맥이 끊긴 채 서구적 영향권 하에서 시작된 데 그 원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논리를 내세우더라도 현재의 빈약한 잔고殘高는 설득력을 갖기 힘들게 한다. 아무튼 본 지면 상에서 상세히 논의하기엔 분명한 한계가 있지만, 도예 작품에 대하여 “이건 그냥 예술이야!”라는 단순히 선언적이고 자기주장적인 문구가 아니라, “이것이 어떠한 이유에서 차별적 예술이 될 수 있다!”라는 미적 근거와 논리를 제시하는 것이 바로 도예미학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요구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적 도예미학을 외부에 요청하기엔 이론가들을 포함한 도예계 바깥의 도예에 대한 관심은 극히 미미하다. 사실 기존의 미학계에서 이루어진 야나기에 대한 반론이나 비판 역시도 대부분 도예의 내부로 적극 개입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또한 그와 같은 이론들이 전통도예에서 현대도예로 폭넓게 확장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미술사적 연구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통도자에 대한 도자사적 연구는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것이 현대도예로 폭 넓게 확장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도예미학과 담론 활성화의 요청근거
필자를 포함해 가끔 자리를 함께 하는 몇몇 젊은 큐레이터들이 술자리에 모여 나름대로 한국 미술계의 미래를 이야기하며 시간을 쪼곤 하던 기억이 있다. 얼마 전쯤 이들과 자리를 같이 했을 때 한 큐레이터의 한국 현대미술에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한국화’와 ‘도예’라는 말을 듣고 모두 공감을 했던 적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와 같은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한국화’나 ‘도예’가 아직까지도 정체된 채 뚜렷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장르적 특수성에서 기인하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거대 명제에 강박적으로 억눌려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듯하다. 도예미학의 부재에도 상당 부분 그 원인이 있다. 더불어 이는 도예의 문제를 도예 자체로서만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일반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지평에서 접근해야 하는 필요성의 반증이다. 왜냐하면 문제의 파악을 문제 내부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나와 전체적인 맥락에서 파악하고자 할 때 비로소 정확한 파악과 해결이 가능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울러 도예미학의 요청근거에 있어서, ‘김치’를 비롯한 우리 음식문화의 세계화를 일본의 경우와 대비시켜 보는 것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독창적인 음식문화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스스로 일찍 인식하지 못했으며, 또한 과학적으로 검증하거나, 설득력 있는 근거로서 합리적으로 설명하거나 소개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 굳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국 현대도예의 현재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결국 도예미학과 담론의 활성화의 요구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고민의 요구이다. 그리고 이렇듯 자체의 연구와 고민이 전제되었을 때 현대도예의 차별성을 설득력 있는 근거로서 설명하고, 소개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도예미학과 담론의 활성화는 한국 현대도예의 미적 가능성과 차별성을 그것의 근거가 동양미학이든, 서양미학이든 학문적 연구로서 체계화하는 작업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현대도예에 대한 지평, 나아가 다양한 가능성의 확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실상은 어떤가? 현대도예의 양상에 대한 체계화와 정리를 위한 미학적 접근은 거의 전무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그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라는 문제에 대해 전문적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기록되고, 반성되지 않는 어떤 시간 혹은 경험이란 말 그대로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현대 도예미학과 담론 활성화의 전제조건 
현대 도예미학과 담론의 활성화를 위한 선결과제로서 도예계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우선 보이지 않는 벽에 의한 폐쇄성을 극복하는 일이다. 전시가 이뤄지는 양상만 보더라도 대부분 마치 게토Ghetto에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벽에 의해 외부와 격리되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 해 동안만도 무수한 전시가 인사동을 비롯한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과연 소모적이지 않은 전시는 얼마나 되는가? 거칠게 표현하여 그간 도예전시들 중 어떤 생산적인 기여도 하지 못한 채 자기만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유사한 맥락에서 볼 때 각각의 논의를 담론화하고, 이를 보다 확장시켜 나갈 수 있는 채널 자체도 여러 가지 이유로 다양하지 않다.
타 장르, 다양한 감상자들과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은 현재의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매우 절실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도예계 내에서 먼저 외부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일이며, 또한 손을 내밀고자 하는 적극적 의지와 노력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장르의 폐쇄성에 대한 해체의 요구는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르의 특수성까지 해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포스터모더니즘의 주요 개념인 ‘탈 중심’이란 궁극적으로 사고나 관념의 경직된 폐쇄성에 대한 해체의 의미이다. 기실 개념 없는 형식적 실험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도 ‘탈 중심’의 개념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본질적인 탈 중심이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사고나 관념의 경직된 폐쇄성 해체를 우선적으로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객관적 관점으로 도예를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은 절대 필요하다.
지금까지 도예계는 스스로 너무 관심이 없거나, 너무 묵인하거나, 너무 몰랐다. 하지만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의지를 상실한 채 무기력증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막상 도예계를 벗어나 손을 내밀고자 하더라도 도예에 대해 더욱 관심이 없거나, 더욱 모른다. 여기서 도예미학과 담론의 활성화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적지 않은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함을 알 수 있다. 자,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인가? 정리하자면, 도예계의 미래를 위해 도예미학과 담론의 활성화는 절실히 요구되며, 그러기 위해 서로 끊임없이 만나야 한다. 그리고 대화해야 한다.

무엇이든 처음부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일이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다시 원론적 차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토양을 가꾸고, 씨를 뿌리고, 수시로 보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국제 미술계에서 영국이나 중국 등의 작가들이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국가적 차원의 자국 미술계에 대한 전략적이고 전폭적인 지원이 곧 그 것이다. 말인즉슨, 도예의 담론화를 위해 필요한 대화의 축, 즉 작가 이외의 이론, 비평, 기획, 매체, 감상자 등의 다양한 분야에 대해 내부에서 먼저 공동의 뒷받침과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현재 도예계의 상황에서 당장 도예미학이나 담론의 활성화가 적극적으로 성취되기는 아직 시기상조일 수 있다. 기본적인 토대가 미흡한 상황에서의 섣부른 시도들은 오히려 피로감만 높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긴 호흡을 갖고 꾸준히 좋은 토양을 가꿔 가는 것이다.
아울러 구체적인 차원에서 무엇보다 영향력을 갖고 있는 기관이나 단체들에서 도예 관련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체계적 정책과 이에 따른 재정적 지원들이 보다 다양하게 펼쳐져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원과 더불어 각각 도예인들이 상호 건전한 격려와 대화를 지속해 나갈 때 바람직한 도예미학과 담론의 활성화는 바야흐로 현실화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약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예술기획 전공

현, 박여숙화랑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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