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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계 신 직업 창출과 전망-현대공예에 있어 노동의 의미
  • 편집부
  • 등록 2006-01-12 15: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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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계 신 직업 창출과 전망
현대공예에 있어 노동의 의미  

 

글+사진 정연택 _ 명지전문대학 공예디자인과 교수

 

‘오늘날 현대사회는 일명 「자동화의 시대」이다. 19세기 이후 본격적인 산업사회의 출현으로 오늘날 생산체제는 기계화에 의한 대량생산체제로 확고한 자리를 굳혀 오고 있다. 특히 ‘마르크스가 잘 파악한 것처럼 자본주의에 의한 현대화는 천 년 이상 지탱되어 오던 손의 노동을 한꺼번에 없애는 “자동장치체계(오토메이션)”을 낳게 하였다.’ 
자동화에 의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마르크스의 사회비판에 있어 중요 대상이며, 인간의 노동을 인간자신의 창조적인 잠재력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은 단지 생존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로 만든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바대로 현대의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신의 주관적인 창의성을 발현한다는 것이 실로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음이 사실이다. 과연 공단에서 일을 하고 있는 많은 근로자들이 자신의 인간적 본능을 노동을 통해 구현하고 있는가? 이것은 또한 현대사회의 노동자 계급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노동자 계급 뿐만 아니라, 화이트칼라에게도 이러한 사실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직장생활을 통해 자신의 인간적 본질을 구현하고 있다고 믿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공예가는 예외적 일 수 있다. 공예가들뿐만 아니라 화가나 조각가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예술가와 공예가가 오늘날 노동문화 현실에 대한 비판적 문화세력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현대사회의 주도적인 생산세력- 즉 자동화된 자본주의 생산체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공예가나 예술가들이 자본주의 생산체제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독립적인 영역 속에 존립할 수는 없다. 이들 또한  자본주의 체제하에 자신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공예나 예술이 전통적으로 지니는 주관주의적인 노동의 특성은 현대사회의 비인간화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자리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오늘날 공예가나 예술가들의 주관적인 노동의 과정과 결과물이 과연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현대의 공예가나 예술가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주관주의적 노동의 성질을 지나치게 극대화시킴으로서 사회적 효용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일반 대중들이 감히 이해할 수 없게 된 현대예술과 공예의 수많은 주관주의적 상징물들은 그것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양식(조형언어)의 창출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공허한 문화적 유희물에 그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문제는 공예가의 주관적 노동의 특성을 사회적 차원의 문제와 결부시켜 그것의 문화적 의미를 확인케 하고 이를 사회화시키기 위한 실천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다. 윌리암 모리스가 이미 지적한 바대로 ‘노동문화의 질적 향상이야  말로 세계의 혁명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노동의 인간화’가 유적 존재로서 인간임을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주장했던 마르크스의 이론도 여기에 일치한다. 따라서 공예에 있어 노동의 의미는 노동문화의 질적 향상을 통해 노동의 인간화를 지향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데 있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
자본주의를 체제로 한 산업사회는 노동의 형태에 있어 전산업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이루어 냈다. 전산업사회가 개인의 신체적 수고를 통한 노동이었다면 산업사회는 신체적 수고의 분리를 통해 나타나는 노동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즉,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리는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조차 분리를 이루게 된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회적 생산물의 영역을 점유하고 있는 생산물에 있어 창조적 설계자와 노동자 사이에 개재하는 무서운 사회적 갭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설계자의 역할은 실제생산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끝나버리며, 한편 노동자는 일반적으로 거대한 생산기계 속에서 면밀하게 계산된 일련의 작용 이상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노동이란 크게 두 가지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첫째가 계획단계이며, 두 번째는 제작단계이다. 소위 전인적인 노동의 형태란 바로 이 두 단계 모두를 노동의 주체가 실행대상으로 삼고 있을 때를 가리킨다. 그러나 오늘의 노동문화는 이러한 전인적인 노동으로부터 거리가 멀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노동의 사회적 분리의 상황 하에서, 계획에 참여하는 정신노동자는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이 자연물(재료)에 직접적인 투영이 불가능하게 되며, 육체노동자는 노동을 통한 사유과정의 과정이 차단되어 진다. 이로써 현대인의 노동은 편협한 불균형 속에 빠져들며, 양자 모두 자기 소외의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기계화된 산업문명 속에서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여가를 통해 무언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 수 있는 노동을 원하며, 때로는 그러한 노동행위로부터 나온 문화물을 소유함으로서 자기소외를 극복하고자 한다.  사용하기에 간편하며, 값싼 산업생산물의 사회적 점유도가 높아 가는 가운데, 일반대중들의 수공예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가고 있는 것은 이를 증명한다.
육체와 정신의 분리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나타난 마르크시즘의 혁명적 실천과정에도 실상은 이 같은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인정하게 되고 만다. 마크 포스터Mark Poster의 지적대로 ‘혁명에 있어서 지식인은 신체의 두뇌가 되고 노동자는 신체의 근육이 된다.’ 마르크스주의 혁명완수를 통한 사회구조의 재편성이 결국 지식인과 새로운 기술 관료주의자들에 의해 상부구조 즉 권력기구를 형성하고 이에 또 다시 노동자 계급은 이에 다시 종속되고 마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사회적 차원에서 이러한 육체와 정신의 분리는 최근의 근대화 과정으로부터 발생한 것이기보다는 고대사회로부터 비롯된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사상적으로 육체노동이 물질의 전이와 변화와 결부되어 있다는 이유로 불신하였다. 당시 사상가들에게 있어 우주는 본질적으로 고착되고 안정된 것이었으며, 그들이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는 세계는 단지 그것의 불완전한 반영체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따라서 변화하는 것은 그 반영체의 덧없음과 불완전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간주하였고, 나날의 임의성에서 벗어나 있는 진리 즉, 이데아의 완전성 보다 열등한 것으로 경멸했다. 다시 말해서 변화와 전이의 노동에 관여하는 육체노동자는 천한 것으로 여겼고 노예들의 것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죤 레텔에 의하면 육체와 정신의 분리는 사상체계 이전에 생산양식의 변화와 그에 의한 사회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오히려 인간의 사상이나 의식의 세계가 생산양식과 그것에 의한 사회통합의 기능에 의한 반영물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의식과 사상은 나중 문제라는 것이다.
죤 레텔은 육체와 정신의 분리가 생산의 사회로부터 점유의 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원시적인 공동사회는 생산의 사회였으며, 공동생산과 분배가 이루어졌다. 점유사회의 출현은 생산기술의 발전과 그에 따른 잉여생산의 발생, 그리고 그것에 대한 착취과정에서 비롯된다. 이집트의 예를 들어보면 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집단적인 공동생산양식은 보다 숙련되고 방법적으로 계획된 관계체제에 의해 보존되고 확장되었으며, 이에 따른 잉여생산의 증대를 낳게 하였다. 이러한 잉여생산은 그 자체를 명령하고 조직하는 지배자와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집단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모든 잉여생산물의 집적, 저장 및 분배를 위한 기구로 조직되었다. 이집트 문화는 이러한 점유를 토대로 해서 발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잉여생산물의 출현과 점유의 사회적 제도화는 노동을 머리와 손으로 사회적 차원에서 분리시킨다. 또한 이집트의 공적 점유로부터 그리스의 사적 점유의 시대로 이어지게 되고, 오늘날 자본주의의 상품경제 시대로 넘어오게 되면서 사적 점유가 더욱 가속화됨과 동시에 사회적 차원에서 머리와 손의 분리는 보다 첨예화된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생산수단이 자본가에게 점유되고 있는 상황은 개인적 차원에 있어서도 머리와 손의 분리를 더욱 강요받게 된다. 생산수단을 점유한 자본가는 합리적인 경제적 이윤의 극대화를 목적으로 생산자를 물신화시킨다. 상품만이 아닌 그것을 만들어내는 생산자까지도 물신화 되어버린다. 즉, 노동의 상품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더 이상 현대사회에서 적용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최소한 헤겔에 있어 노예는 보이지 않는 인간성 유지의 성공적 사례를 담고 있다. 노예가 행복한가? 아니면 주인이 행복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그는 노예가 행복하다고 답하고 있다. 그것은 전인적인 노동의 기회가 실제로 노예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노예는 자신의 노동행위를 통해 정신적인 자기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점에서 헤겔 조차 인간의 육체적인 노동의 결과를 정신적인 문제에 국한하여 결부시키고자 했다는 점은 그 또한 육체보다는 정신의 물신화를 의도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사례로 삼았던 노예와 오늘날 노동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헤겔에 있어 노예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인적인 노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생산수단이 자본가의 소유로 넘어간 오늘날의 상황은 다르다. 헤겔이 주장했던 ‘행복한 노예’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일반적인 생산자로 남을 수가 없는 것이다.
현대의 노동은 현대기술사회의 합리성에 기초한 기능과 능률을 강조하는 가운데 개인의 인격은 무시되고 따라서 노동을 통한 창조의 기쁨은 무시되어진다. 이율배반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의 문화는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또한 개성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개성주의 오히려 생산 활동에 있어 개인에 대한 구속과 억압과 맥을 같이 한다. 생산 활동에 있어 억압으로 인한 비개성주의가 소비활동에 있어 개성주의에 대한 욕망으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의 실현은 단지 사회적으로 상품화된 코드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의 개성을 창출하고자 소비대상물을 찾아보아도 개성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조정된 결과물인 것이다. “당신만의 개성창출을 위한 패션!”도 결국 대량생산화 된 획일성 속에 놓여져 있는 것일 뿐이다.

 

예술과 노동의 분리 
16~17세기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상승하면서 인간의 정신과 육체라는 외적 물질을 더욱 구별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함께 태동하기 시작한 낭만주의에 있어 정신과 육체라는 이원론은 모든 논의의 과정에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된다.
17세기 초반의 데카르트는 인간존재의 정의에 있어 인간은 이성을 통한 정신적 사유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입증하고자 했다.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그의 철학적 명제는 정신과 육체의 차별성을 공식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점에 있어 육체와 정신의 완전한 분리를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불가능한 것으로 비판하고 있지만,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이러한 사실은 일반화된 경향으로 고착되어 갔다. 예를 들어 예술가란 일종의 외적 현실의 세계를 자신의 정신적 통찰력과 상상력으로 꿰뚫고 밝힐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바라보는 경향이 일반화되어간다. 예술가가 외적 현실의 세계를 단순히 모방하거나 기술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전통적 인식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예술가란 자신의 주관적 정신의 활동으로부터 얻어진 결과를 통해 현실을 해석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의 소유자로 인식하고자 하는 관점이 지배적이게 된다.
예술가가 단순한 육체적 노동자로부터 정신적 노동자로 인정받는 데에는 헤겔의 노동이론이 또한 중요한 기점을 이루고 있다. 헤겔의 변증법적 차원에서의 노동이론은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의식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노동은 정신의 노동이라고 본다. 노동이란 정신의 변증법적인 자기발전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헤겔의 이러한 노동이론은 육체노동을 단순히 노예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주요한 근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 노예가 주인보다 행복할 수 있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노예는 그의 사회적 신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기의식을 전개시킬 수 있는 전인적 인간의 형태를 띄게 된다.
그러나 헤겔의 이론은 노동을 정신적 문제에 국한시킴으로써 오히려 노동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태도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인간의 의식세계 -정신세계에만 노동의 문제를 결부시킴으로써 그의 노동이론은 관념적인 세계에 결박당하고 만다. 물질적이거나 육체적인 또는 사회적 삶의 세계로부터 고립된다. 정신적 노동자로서 예술가는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과 체험 속에서 진리를 찾고자하는 정서적 분위기에 지배되고 스스로를 현실과는 동떨어진 주변적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이로써 예술은 일반적 노동과 차별화 되며, 예술가는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호벽을 치게 된다. 물질과 육체의 세계는 자본주의의 시장에 의해 쉽게 상품화되거나 노예화될 수 있었지만, 정신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인식된다. 예술은 자본주의에 대치하기 위한 정신적 세계에 안주하기 시작하고, 이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자본주의의 노동문화에 대한 적대감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예술과 노동의 분리는 이 같은 시점에서 더욱 공고히 하게 된다.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은 자본주의 체제에 물들지 않기 위한 투쟁적 의지를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 헤겔의 이론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예술을 정신적 문제의 세계에 국한시킴으로써 육체적인 노동의 세계와 분리되고 만다. 예술과 노동은 이분법적 차원에서 정신과 육체로 분리되며, 수직적 차원에서 가치서열적인 차별화가 이루어진다. 산업사회의 노동은 더 이상 헤겔식의 자기실현을 위한 정신적 활동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오로지 예술만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로 인식되어진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자신의 주관주의적인 정신세계의 표현에 몰두하게 된다. 낭만주의의 예술이 보여주는 자기표현이라는 예술행위는 예술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더구나 자본주의 체제의 규범화된 삶에 대응한다는 차원에서 개인의 개성과 새로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가세하기 되면서 예술은 보다 더 주관주의적 경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주관적 차원에서 예술은 극단적인 그 어떠한 왜곡도 서슴지 않으며 새로움과 다양화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현실세계는 파편화 되어 그려지거나, 무의식적이고 즉흥적인 판단에 맡겨지게 된다. 무의식적일수록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방어된 세계를 표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지배적이게 되고, 그럼으로써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의 세계를 그리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현대의 예술은 주관주의적인 자의식만이 난무하게 된다. 보편성보다는 개별성이 존중되며 우선 시 된다.

 

대안으로서의 공예
오늘날까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 그리고 예술과 노동의 분리는 지속적인 분화의 과정을 거쳐 오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공예는 과연 얼마만큼 자유로울 수 있는가? 대답은 그렇지 못하다. 지난 근대 이후로 공예의 노동 또한 예술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공예가 역시 자신의 주관주의적 정신세계의 표현에 몰두해 왔으며, 한편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육체노동과 자신과의 차별을 주도해 왔다. 결과적으로 현대공예는 현대예술의 역사적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현실의 초월은 고립을 낳았으며, 대중의 몰이해는 양쪽 모두의 문화적 소외를 불러일으켰고, 공예의 문화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만들었다.
그러나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그리고 예술과 노동의 분리라는 문제점의 대안 선상에 공예가 위치해 있음은 자명하다. 그 이유는 공예의 특성이 계획과 제작이 일체가 되는 노동이기 때문이며, 스스로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공예가는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전인적인 노동을 보장 받게 된다. 독자성과 자율성을 지닐 수 있다. 또한 공예의 실용성은 극단적인 주관적 노동행위에 치우치는 것을 방지하며, 문화적 소외와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공예에 대한 칸트의 기술 분류 즉, 일반적 기술과 예술적 기술개념의 적용은 공예가 일반적 기술 또는 단순 제작을 위한 노동이라는 인식을 낳게 한다. 일반적 기술의 영역은 노동의 동기가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타자로부터 오는 것이며, 따라서 노동의 목적 또한 타자에게 종속된다고 본다. 때문에 자신의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용성을 추구하는 공예의 노동은 이 같은 일반적 기술의 개념에 속하는 것이며, 정신문화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쓰임-실용성은 단지 물질적인 사용가치의 범주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평가되는 건축물은 그것이 단지 사용을 위한 가치만이 아니라, 그것이 전하는 다양한 시대적 메시지를 담고 있기에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의 세계를 포괄하고 있기에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생활에서 쓰여 지는 하나의 일상적인 공예품에서도 우리는 그 같은 해석을 가할 수 있다. 공예품이 단순한 물리적 기능을 함유한 도구 이전에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도구적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예문화를 통해 사회적 통합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대안적 관점에서 보면 공예에 있어 노동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전인적인 노동의 형태를 지님으로서 노동의 문화적 가치를 실현한다. 나아가서 노동의 윤리적 가치 즉, 노동의 상품화 또는 물신화로부터 인간적 가치를 지키는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공예의 실용성은 노동의 동기나 목적이 개인주의적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고 사회적 가치로의 환원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예의 문화적 기반 즉, 생활공간에 뿌리를 둔 제작활동에서 가능하다. 공예에 있어 노동의 진정한 의미와 문화적 정체성은 바로 이 점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필자약력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졸업
개인전 3회
논문, 현대산업사회에 있어서 공예의 문화적 의의(1986, 서울대),
현대공예의 탈도구성에 대한 비판적 소고(1992, 명지전문대),
공예의 역사적 개념에 관한 연구(1995, 명지전문대),
공예유통 활성화를 위한 전문교육(2003),

한국도자학회 학술대회 연구논문 발표(2004, 논문제목 : 현대공예의 노동의 의미) 등
현, 명지전문대학 공예디자인과 부교수, 한국미술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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