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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한국도예계를 돌아본다 -2005년 한국 현대도예 - 현대도예의 범주적 고찰
  • 편집부
  • 등록 2006-02-23 14: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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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한국도예계를 돌아본다
2005년 한국 현대도예 - 현대도예의 범주적 고찰 
글 윤두현 _ 박여숙화랑 큐레이터

현대도예의 2005년은 어느 해 못지 않게 풍성한 한 해였다. <경기도세계도자비엔날레>,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등 대규모의 국제적 행사들이 연이어 열렸으며, 이 외에도 <아시안세라믹네트워크ACN>, <소통과 확산 : 한중일국제도예전> 등의 국제교류 행사를 비롯한 크고 작은 도예전시들이 곳곳에서 이어졌다. 하지만 이렇듯 양적 풍성함에도 불구하고 깊이와 다양성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여전히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 글에서는 현대도예의 현재에 대한 구체적 진단과 방향성을 서둘러 언급하기 보다, 이의 범주적 인식의 문제를 먼저 고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현대도예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하나가 인식적 범주의 오류에서 기인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의 방법론에 있어서는, 현대도예의 양상을 ‘도자적 도예’와 ‘비도자적 도예’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전자는 전통도자의 정신성 및 형식적인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양상이다. 이는 전통에 근거하여 현재적 차원의 계승과 발전을 꾀한다. 후자는 전통도자의 정신성이나,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나 벗어나 있다. 이는 도예의 재료적 특성에 근거하여 조각적이거나, 설치적인(조각, 설치 등 포괄적인 미술의 차원임) 작업을 하는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소간의 억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러한 방법론을 선택하고자 하는 이유는 미적 지향점이 어디인가에 따라 작업에 접근하는 방법과 관점 역시 달라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도자적 도예
이는 전통도자의 정신성이나 형식적 특성을 근거로 하는 양상이다. 그렇지만 엄밀한 구분을 위한 별도의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도자적 도예는 대체로 전통도자의 형식적 특질에 기반한 정신성을 계승하고, 나아가 현시대적 정신성을 반영하고자 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김익영의 기면을 칼로 깎아 내어 백자 고유의 아름다움을 한 차원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들이나, 이세용의 철저한 재료 연구와 꾸준한 회화적 훈련으로 정제된 회화성과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는 청화백자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렇다면 ‘도자적 도예’의 전제조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이러한 양상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는 전통도자의 재료, 형식 그리고 정신성에 이르기까지 작가 나름의 철저한 연구와 노력을 통한 인식적 토대의 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목적이 전통도자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이 시대의 정신성이 투영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 이데올로기의 표상적 상징과 전통도자의 형식적 아름다움을 잘 조화시키고 있는 최지만의 백자와 청자 작업들은 ‘도자적 도예’의 상당히 이상적 예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동시대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백자나 청자의 재료와 형식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이해를 작품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창의적인 ‘도자적 도예’를 위한 노정은 많은 노고를 작가에게 요구하게 된다. 나아가 장인적 측면이 강요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식적 접근으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한 직접적 실천이 동시에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제 없는 오늘은 없듯이, 자신의 존재적 근거를 알지 못하고선 제대로 된 미래가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자신의 뿌리를 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아는 것이며, 또 그것은 어떻게 알아지는 것인가? 더 나아가 동시대성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 질문은 곧 2005년 한 해 동안 현대도예라는 그물망 안에서 작업하고, 전시를 통해 작품을 발표해 온 모든 작가들의 몫이다. 동시에 그 주변부에서 이들을 바라보기하고 있는 모두(필자를 포함한)의 몫이기도 하다. 아울러 이의 답을 위한 실마리를 찾는 과정의 하나가 바로 범주적 고민이다.
 
비도자적 도예
도예라는 장르적 특성을 벗어나는 양상들을 ‘비도자적 도예’로 칭할 수 있다. 전통도자의 형식성이나, 정신성의 틀 바깥에 위치한다. 여기에서 흙이라는 재료와 기법들은 조각 혹은 설치 작업 등에 있어서 선택 가능한 하나의 재료와 기법으로서 다루어진다. 아프리카 조각의 원시적 조형요소를 반영하고 있는 신상호의 작품, 현대사회 인간의 소외적 내면을 담고 있는 이태흥의 작품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듯하다. 아울러 이경수의 미니멀 회화나, 색면 추상을 연상시키는 도벽작업 역시 이에 속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작품을 판단함에 있어서도 다른 관점과 기준이 요구된다. 흙이라는 재료의 특성과 기법에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전통도자의 맥락에서 이러한 작품들을 보는 것은 적지 않은 무리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도예라는 장르적 특성에서 벗어나 있다라는 말은 도예의 바깥에서 작품의 판단 기준이 형성된다라는 말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즉 도조에서의 흙이나 기법은 주로 조각에 있어서 요구되는 조형미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이다.
그럼 ‘비도자적 도예’의 존재조건은 무엇인가? 이 역시 ‘도자적 도예’의 그것과 큰 맥락에서는 결코 다르지 않다. 자신의 존재근거에 대한 인식적 토대, 그리고 이에 근거한 자기언어의 발견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양상들이 도예적 재료와 기법을 차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존재근거는 결코 도예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존재근거의 핵심은 미술사적인 흐름(도예와 구분되는 분류적인 측면의 의미, 즉 회화, 조각 등등)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아직 ‘비도자적 도예’의 양상들은 범주적 인식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범주에 대한 인식적 오류 때문에 작품 역시 부정적인 측면에서 모호한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미술사적인 차원에서 이미 해묵은 담론이나 양식적 특성을 최소한의 재인식과정이나 검증절차 없이 답습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아가 도예를 전공하고, 흙을 다루었었기 때문에 가장 익숙한 재료를 사용한다는 이유 외에 작업 성격과 관련한 당위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른 재료를 사용해서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면 굳이 복잡한 절차와 노고를 필요로 하는 재료를 선택해야 할 이유는 적다. 작품의 효과적 표현을 위한 최적의 매체로서 차별적 특성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출발점에 서서
현대도예를 이처럼 ‘도자적 도예’와 ‘비도자적 도예’로 나누어 살핀 이유는 서두에서 밝혔듯이 범주적 자기인식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선행된 후 퍼즐을 맞추듯 흐트러진 파편들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고 무엇이 어디에 어떻게 자리를 잡아야 할지 가늠해 보아야 한다. 작가가 스스로 어디에 어떻게 서 있는지를 알아간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몸이 가진 구조와 특수성을 보다 넓은 지평에서 알아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통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노력, 그리고 자신이 다루고 있는 담론의 실효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계속되어야 한다.      
어느 곳을 향해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는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필자약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예술기획 전공
현, 박여숙화랑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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