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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도자기의 귀신이라 불린 ‘노리다카’
  • 편집부
  • 등록 2006-03-10 17:4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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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도자기의 귀신이라 불린 ‘노리다카’

글+사진 문옥배 _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 전무이사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 : 1884-1964)는 조선의 미술에 매혹이 되어 1913년 조선에 왔으며, 조선에 와서는 조선의 도자기에 반해서 조선 전역의 도자기를 수집하면서 수 많은 가마터의 발굴과 도자연구에 열정을 보였다. 그래서 조선 사람보다 더 조선도자기에 많은 역사와 지식을 가짐으로써  ‘조선도자기의 귀신’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손꼽히는 도자기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던 사람이다.


노리다카는 조선의 공예를 사랑하고 조선에 살다가 조선에서 죽어서 조선 땅에 묻힘으로써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으로 유명한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 1891.1~1931.4 / 지난 10~11월호에 연재되어 소개되었음)의 친형이며, 공예이론의 대가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와도 절친한 친구처럼 지냈던 사람이다.(사실은 야나기 선생 보다 5살이나 연상이었음)
노리다카는 1884년 야마나시현 기타코마군 가부토무라(현재의 다카네정) 고초다 294번지에서, 아버지 아사카와 조사쿠와 어머니 게이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1887년에는 여동생 사카에가 태어나고 1890년 7월 15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1891년 1월에 남동생 다쿠미가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아주 엄하고 성실한 여장부 같은 어머니와 깨끗하고 온정이 많은 할아버지 오비 시토모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성품은 ‘독립심과 성실, 엄격한 가풍, 그리고 정직과 다정’을 어머니와 할아버지에게서 이어 받았다.
노리다카는 다도와 꽃꽂이, 게다가 도자기 굽는 것까지도 할아버지에게서 배웠다. 그가 할아버지에게 배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의논 상대가 되어주고, 하이쿠(俳句 / 단카와 더불어 일본의 전통적 시가를 대표하는 단시)모임에서 사례금을 받아도 얼마인지 세어보는 것이 싫어 그냥 넣어두는 식의 삶의 방식도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소중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였다. 노리다카는 평생 성실한 기독교도였으며, 그는 효심도 지극하고 동생들도 무척 사랑하였다. 그의 누이동생 사카에는 노리다카에 대해 이런 얘기를 전하였다.

오빠가 고후의 사범학교에 있을 때에 농촌이 피폐해서 동생(다쿠미)을 할머니께 보내 학교에 다니도록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오빠는 자기가 집에서 돈을 얻어 쓰지 않고 혼자 힘으로 꾸려 갈 테니, 다쿠미를 집에서 농림학교에 보내도록 해달라고 했습니다. 오빠와 동생이 나라사키 근교 시오사키에 살고 있을 때 집에서는 어머니와 내가 누에치기 등을 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오빠의 급료로 생활하며 집에서는 한 푼도 받지 않았죠. 둘은 방학이 되면 곧장 집에 돌아와서 뽕을 딴다 풀을 뽑는다 하며, 떠나는 날 네시까지 일을 하다가 돌아가는 거였어요. 부속(현립사범학교 부속 심상소학교)에 있을 때 교회에 에이가쿠인(영어학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일요일에 예배를 보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일부를 무료로 제공받아 그리로 어머니를 모셔왔습니다...            

노리다카는 1891년, 가부토무라의 무라야마니시 심상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897년에는 나가사카정의 아키다 고등소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리고 1901년 야마나시 현립 사범학교에 응시하였는데 체중미달로 불합격되어 아키다 심상고등소학교 임시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교사로 임명되었으며 아쓰나 국민학교 교사가 되었다. 1903년에 야마나시 현립사범학교에 다시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며, 1906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야마다카 심상소학교 교사가 되었다. 다음 해에는 시오사키 소학교,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야마나시 현립사범학교 부속 심상소학교로 전근되었다. 1912년 7월에 신카이 다케타로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조각을 배웠다.
1913년 5월 초순 그의 나이 30세에 당시 조선의 경성부 남대문 공립심상소학교에 부임되어 한국에 건너온 노리다카는 경성부 정동 11번지에 거처를 정하였다. 이듬해에는 신설된 경성부 서대문 공립심상고등학교로 전근하여 갔으며, 경성중학교 부속소학교 교원양성소 교육실습지도촉탁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사실 노리다카가 조선으로 온 것은 조선의 미술에 매혹이 되어서 자진하여 올 정도였다. 당시 그는 로댕에 심취되어 교육자로서보다는 예술가로서 입신할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다. 1914년 9월 지바현의 아비코로 야나기 선생을 찾아간 것도 야나기 선생이 보관하고 있는 로댕의 조각품을 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노리다카는 이처럼 조각에 관심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그는 조선에 건너 온 뒤에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도쿄에 가서 일본의 유명한 조각가 신카이 다케타로에게서 조각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 조선의 도자기에도 관심이 많아서 서울의 창경원에 있는 이왕가박물관(1912년에 개관)에 고려청자를 보고서 그 뒤에도 자주 찾아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고물상 앞을 지나다가 백자 항아리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반하여 그것을 사가지고 집으로 갔다. 이것이 노리다카와 조선시대 백자의 첫 만남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도자기의 수집에 나서게 된다. 이때에는 조선시대의 백자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싼값으로 많은 도자기를 사 모을 수 있었다. 다음 해에는 경성으로 이주해온 동생 다쿠미와 함께 고물상을 자주 돌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그는 조선의 도자기에 더욱 심취하여 도자사를 연구하고 직접 도자기를 만들기도 하면서 예술에 대한 그의 꿈을 키워갔다.
1914년에 조각가가 되려고 일시 귀국한 노리다카는 야나기 선생의 집을 찾아가 조선시대의 백자주초문각호(현재 일본민예관에 소장됨) 도자기를 야나기 선생에게 선물로 주었다. 1916년 야나기 선생이 조선에 가게된 것도 바로 이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서였다고 한다. 1919년 4월에는 교직을 그만두고 다시 신카이 제자가 되어 조각을 배웠으며, 1922년 4월 조각수업을 끝내고 3년 만에 조선에 돌아온 노리다카는 조선의 도자사 연구를 다시 시작하였다. 이때에 그는 왕궁 터 같이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유적지 주로 찾아서 도편들을 모으고 시대적 변천을 밝혔다. 그리하여 1922년 <시라카바> 9월호 조선시대 도자기 특집호에 ‘조선시대 도자기의 가치 및 변천에 관하여’라는 최초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또 조선 도자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하여 일본에 전래된 조선의 다완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쓰시마 섬과 간사이지역에 소장된 도자기를 비롯하여 1925년 4월에는 도쿄 각처에 소장되어 있던 조선 도자기들을 조사를 했다. 이때에 노리다카는 조선인이 만든 일본의 국보인 [기자에몬 이도]를 직접 손에 들고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서 그는 ‘명품 중에 명품’이라고 하는 물품 중에는 조선에서 전래된 것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 다완의 산지를 확인하기 위해 전국의 가마터를 조사하게 되는데, 1925년에는 계룡산과 강진의 가마터를, 1927년에는 분원의 가마터를 조사하였다.    

노리다카가 교직에서 물러난 후 생계는 부인 다카요가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일본어 교사와 숙명여학교의 영어교사를 해서 꾸려 나갔다. 1928년 7월부터는 다행히 계명회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 걱정 없이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노리다카는 ‘세종실록’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등의 고문헌을 독파하여 거기서 조선 도자기의 산지 3백여 곳을 찾아냈다. 그는 ‘도기기재용지’카드를 만들어 도편의 채집지, 추정연대, 형상 등을 기록하고, 도별로 조사한 시기와 구사기점 유적의 수 등도 빠짐없이 기록하여 조선도자사에 중요한 자료로 남겼다.
노리다카는 1929년부터 1931년까지 13도에 걸쳐 도합 678곳의 옛 도요지를 조사하였다. 1934년 7월 8일부터 14일까지 도쿄의 시라기야에서 ‘조선고도사료전朝鮮古陶史料展’을 개최하였는데, 이는 그때까지 그가 수집하고 연구한 결과를 집대성하여 펼쳐 보이는 자랑스럽고 영광스런 무대가 되었다. 이때 그는 전시장에 다다미 28장 크기의 조선 지도를 펴놓고 조선 각지에서 발굴한 도편 1만 여점을 각각 발굴지위에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12일에는 ‘조선도기의 시대적 변천’을, 13일에는 ‘조선분원의 관요자기’를, 14일에는 ‘일본에 전래된 조선 다완’에 대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그 후 1944년 2월부터 4월에 걸쳐서는 동아교통사 주최로 ‘도자기 강의’를 12회 연속 강연을 하는 등 그는 도자기에 대한 강의를 매우 많이 하였다. 노리다카는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각지를 뛰어 다니면서 옛 가마터를 조사하였다.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는 노리다카를 보고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총알’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도예가 하마다 쇼지는 그때 노리다카에 대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때때로 일본 본토에 돌아가서 오래 머무는 일이 있어도 집에는 연락하지 않은 듯, 그 본댁에서 내게까지 노리다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소식을 물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한번은 야나기와 조선을 여행하다가, 개성에 있는 신사의 경내에서 도편을 줍고 있는 노리다카와 마주쳤다. 바로 그날 경성에서 노리다카가 일본에 돌아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난 참이었으니, 아무리 노리다카라 해도 그것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이처럼 노리다카의 조선 도자기에 대한 조사와 연구의 열정은 참으로 대단하였던 것 같다. 온 조선 땅을 헤집고 돌아다닌 그는 조선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일반 조선식 가옥에 살면서 조선의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조선에 와서 살면서도 조선말을 배우려 하지 않았으나 그는 조선말을 배워 조선 사람들과 사귀려고 노력하였다. 이 무렵 노리다카의 생활상을 보았다는 일본인 사라토리 규조白鳥鳩三씨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남겼다

어느 여름날 아침 일찍, 기묘한 차림새의 일본인이 찾아와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모시 바지저고리를 입은 그 사람은 꾀죄죄한 잿빛 당나귀를 타고 온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서대문) 형무소 뒤에 경성의 3대 명수 중 하나로 꼽힌다는 약수가 나는 샘이 있어서 매일 아침 그것을 마시러 다니던 중에 우리식 문패가 눈에 띄어, ‘이런 곳에도 일본 사람이 살고 계신가 하고 반가워서 찾아왔습니다.’하고 인사했다. 이 사람이 훗날 조선시대 도기연구로 명성을 떨친 아사카와 노리다카씨 였다.’       

노리다카는 한국의 도예가들과도 교분을 나누었는데 특히, 그는 한국 현대도예의 대가인 지순탁池順鐸씨를 도예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지순탁씨는 원래 목공예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1928년 골동품 점에서 서로 알게 되어 맥이 끊어져간 고려청자의 전통을 되살리겠다는 의지로 함께 10년 동안 수많은 가마터를 조사하고 고려청자의 재현방법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노리다카는 회령의 도예가인 최황재씨와도 1925년부터 20년간 도자기 제작 지도를 하면서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교제를 나누고 지냈다고 한다.
노리다카는 조선에 와 있는 일본인 와타나베 히사키치, 하마구치 요시미쓰, 아베 요시시게, 도이 하마이치, 다카하시 야스키요, 아베, 우에노, 하야미 등 많은 친구들을 두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의 예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어서 1928년에는 이들이 모여 <조선 취미를 이야기하는 모임>을 만들었으며 나중에는 이 모임이 <조선공예회>로 발전하였다. 일본에 살고 있던 사람들 중에 노리다카와 가깝게 지낸 사람으로는 야나기 무네요시외에도 도미모토 켄키치, 아카보시 고로 씨 등이 있었다.   
 
여러 방면에 다재다능한 노리다카는 글 쓰는 솜씨도 좋아 많은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1922년 ‘조선시대 도자기의 가치와 변천에 대하여’라는 논문 발표 이후 ‘조선시대 도자기의 사적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동명>잡지에 11월부터 6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또 1926년 5월에는 월간 조선 예술잡지 <아침>에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를 발표하였으며, 1930년 7월 ‘부산요와 쓰시마요’에 대한 글을, 그리고 1945년 3월 <조선의 회고>에 ‘조선의 미술 공예에 관한 회고’ 등 조선 도자사에 대한 글을 남겼다. 이 밖에도 노리다카는 ‘일본공예에 미친 조선공예의 영향’ ‘농민 공예에 관하여’‘민예방면에서 본 조선’ ‘모쿠지키 님에 관한 두세 가지 문제’ ‘도미모토 겐키치 씨의 요예’ ‘선전잡감’ ‘토목건축에 관한 두세 가지 문제’ ‘조선기물의 문양에 대하여’ 등 많은 논문과 글을 남겼다. 
그는 또 1922년 <시라카바> 9월호에 조선 항아리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항아리’라는 시를 발표하고, 1923년 <조선> 3월호에 석굴암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석굴암에 머물다’라는 시를 발표하는 등 때때로 시를 쓰기도 하였다. 그는 단카와 하이쿠에도 소질이 있었다. 그의 고향 야마나시현 다카네정에 있는 아사카와 집안의 가족 묘비에는 ‘밤을 지새우며 멀리 생각하면 비오듯 하는 벌레 소리’라고 쓴 노리다카가 지은 하이쿠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노리다카는 고서도 많이 수집했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계율서’ 몇 권은 가장 오래된 종이로 평가 받고 있기도 하다. 문예방면에 다재다능한 노리다카는 화가로서도 조선미술전에 자주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1923년에는 ‘저녁놀’이, 1924년에는 ‘꽃과 연적’이 입선되었고, 1926년에는 서양화 ‘조선의 도자기’가 특선으로 입상을 하기도 하였다. 
     
노리다카는 한동안 경성의 남산에 있던 민속박물관의 관장을 지냈다. 그는 이렇게 조선의 예술에 심취하여 조선에서 많은 활동을 하면서 조선의 도자기를 조선 사람보다 더 깊이 연구하고 사랑하였다. 정말이지 그는 그의 아우 다쿠미와 더불어 조선의 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던 일본인 이었다. 그는 시간만 나면 등산 모자에 운동화를 신고서 전국에 있는 도요지를 찾아 다녔고, 인부를 사 흙을 파내고 도자기 파편을 수집했다. 그리고는 그 파편들을 정리하여 우리 도자사 연구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이후 일본인들이 거의 일본으로 철수한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미군정청의 특별허가를 얻어서 조선요지의 조사를 계속하였다. 노리다카가 1946년 11월 일본으로 돌아가기 까지 발굴한 옛 가마터는 700곳이 넘었다. 그리고 그는 일본으로 돌아갈 때 수천 점의 파편 자료와 수집품들을 한국에 기증한 뒤에 귀국하였다.
1946년 11월 3일, 그의 나이 63세에 33년 반 동안 머문 조선을, 그의 동생 다쿠미를 묻은 조선을, 그리고 그의 젊음과 그의 생애의 절반을 바쳐 사랑한 조선의 미술과 공예 그리고 도자기를 뒤로하고 조선 땅을 떠나 하카다에 상륙하였다. 일본에 돌아간 뒤에도 노리디카는 도기 손질과 다도 등에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때로는 도요지를 조사하거나 원고를 쓰고 강연도 하였다. 1956년에는 <조선시대의 도자>를 1960년에는 <조선시대 백자.청화.철화>를 저술하였으며 도쿄의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도자기 작품 전시회를 갖기도 하였다.
이렇게 그는 도자기에 묻혀 살다가 1964년 1월 14일 오후 9시 농흉(늑막강에 고름이 괴는 병)이란 병이 악화되어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일본민예관은 1964년 <민예> 3월호에 아사카와 노라다카 추도호를 발행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 하였는데, 거기에 실린 애도 글들은 아베 요시시게, 하마다 쇼지 등을 비롯한 아홉 명의 유명인사들이었다. 그중에서 1920년대 천재도예가로 명성을 떨쳤던 가와이 간지로는 노리다카와 그의 동생 다쿠미를 다음과 같이 평하는 글을 남겼다.

특히 한일합방 이래 조선에 건너간 우리 동포가 그 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취급했던가에 생각이 미치면 지금도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됩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아사카와씨 등이 매사에 그에 대한 속죄를 하시던 일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복자가 패자에 대해서 저지른 과오, 그런 야만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당신들이야말로 인간의 무지에 빛을 비추어 주신 분들이었음을 새삼 의식하게 됩니다.(중략)     
  
미국 외교관이었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1964년 <도설> 4월호에 ‘아사카와 노리다카의 죽음을 추도한다’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노리다카는 조선 도자사에 위대한 연구자였다’고 평하였으며, 다나카 도요타로(조선시대 도자보 저자)는 ‘이 분야에서는 누구나 다 귀신이라고 일컬을 만큼 정통한 제1인자였다’고 평했다. 또 동양 도자기 역사 연구가인 고야마 오지오도 그는 ‘조선의 옛 도자기에 대해서는 귀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조선 도자기에 가장 정통했던 사람’이라고 평할 만큼 일본에서도 그는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일제의 강점기에 조선의 도자기에 반해서 조선에 살면서 조선의 도자기를 수집하고, 그의 동생과 함께 조선의 강산을 누비며 옛 가마터를 발굴하여 도자사를 연구한 이사람, 당시 조선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을 피하려 하는 것이 싫어서 가깝게 지내려고 조선의 바지저고리를 입고 조선식으로 살았던  아사카와 노리다카는 한국의 도자사에 큰 업적을 남겼으나 한국의 현대 도예가들 중에는 아직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조선을 강제로 압제하고 조선인을 탄압하며 인권을 유린한 일본과 일본인들이 아무리 죽이고 싶도록 밉더라도 [아사카와 노리다카]처럼 조선과 조선인 그리고 조선의 도자기를 사랑한 이런 사람은 민족적인 감정을 떠나서 조선도자기에 바친 그의 업적과 생애를 높이 기리는 뜻에서 우리의 도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진정한 도예인 이라면 모두의 가슴속에 한번쯤은 새겨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글을 쓰게 되었다. 이글을 쓰고 나니 을씨년스런 늦가을 어스름한 새벽녘에 안개가 걷히면서 상쾌하게 밝아오는 아침을 맞은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왜 일까. 아무튼 노리다카는 상당기간 내 마음의 가마에 장작불을 피어 올릴 것 같다.


사진1 노리다카
사진2 누이동생 사카에
사진3 노리다카의 백자호
사진4 장날풍경
사진5 노리다카


필자약력
1972 건국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 졸업
1994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 전무이사 취임
1998 전국공예대전 본선 심사위원
1998 전국관광기념품공모전 본선 심사위원
1999 청주공예비엔날레 기획위원
2000 한국공예문화진흥원 비상임이사
2002 우수산업디자인(GD마크) 상품선정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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