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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50주년, 한국세라믹학회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한국세라믹학회 창립과 초창기
최상흘 공학박사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세라믹학회 50년사 편집위원장
대한요업학회의 창립
1957년 3월 23일 오전 10시 대한요업총협회(서울 종로구 서린동 128-2) 회의실에서, 중앙공업연구소 소장 등 내빈과 각 연구기관, 학교, 관청 및 요업 업체에 재직중인 회원 30여명이 참석하여, 대한요업학회 창립총회를 개최, 정관을 심의 통과하고 김동일 초대 회장을 선출함으로써 학회가 발족하였다.
학회는 그 목적을 요업에 관한 학술과 기술의 진보 및 그 보급에 두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1) 학술 및 기술에 관한 강연회와 강습회의 개최, 2) 회지와 학술간행물 발행, 3) 연구의 장려 및 우수한 연구업적의 표창, 4) 회원의 복리향상 등 사업을 하기로 하였다.
총회에 이어 제1회 연구발표회 및 특별강연회를 가지고, 오후 6시 호수그릴에서 간친회를 하였다.
학회 창립 당시의 배경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요업의 전문적 교육기관과 연구기관이 설립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1907년에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서울공업고등학교로 이어짐), 1912년에는 중앙시험소(중앙공업연구소로 이어지고, 현재 요업부분은 요업(세라믹)기술원으로 독립됨)가 설립되고, 1916년에는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 공대로 이어짐)가 설립되었는데, 그 각 기관에 요업(도기)과 또는 요업부가 설치되어 교육과 시험 업무가 시작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을 때 국내의 요업계 인사는 그 수를 헤아릴 정도였다. 광복 직후 우리 과학기술인들의 당면 과제는 공백상태에 빠진 교육기관의 재건과 생산공장의 생산기능을 되살리는 일이었다. 당시 국내에서 가장 많은 과학기술인을 보유했던 중앙시험소의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공업기술연맹이 조직되었고, 가맹단체로 조선요업기술협회(대한요업총협회로 이어짐)가 들어 있었다.
당시 요업계 기업체로는 시멘트, 도자기, 내화벽돌, 탄소재료 업체들로, 삼척세멘트(후일 동양시멘트), 조선경질도기(후일 대한도기), 행남사, 조선내화, 밀양내화 등이 있었으며, 그 외 중소 기업체들이었다.
요업계의 부흥을 위해서는 산-학의 협동이 절실하다는 요업계 인사들의 의지는 업계와 학계의 유대를 굳혔으며, 1945년 9월 10일 중앙시험소에서 조선요업기술협회 창립 발기인회가 개최되고, 초대 회장으로 안동혁을 선출하였다. 회원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하고 지방의 업체도 점차 가입하였는데, 도자기 업자를 필두로 유리, 내화물, 슬레이트, 연마지석, 연필 업자들을 비롯하여 적벽돌, 옹기업자들도 가입하여 300명에 달하는 회원을 확보하였다. 요업인들은 자금난, 연료난, 시설난 및 기술난 속에서도 공장 재건과 운용, 기술상의 여러 문제를 협의, 타개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요업인들은 이와같은 역경 속에서도 협회를 중심으로, 대 정부 건의 등으로 요업 발전에 전력을 다 하는 한편, 주요 원료인 안양장석, 평택장석, 서산규석, 포천점토, 동래납석, 연평도 구석 등을 개발하여 회원회사에 공급 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이 미처 궤도에 올라서기도 전에 6.25동란이 일어났다. 정부 기관, 학교 등이 부산으로 이동하였으며, 협회도 부산에서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1953년 정부 환도에 따라 협회도 서울로 이전하였다.
이때까지의 요업제품들은 주로 생활 용품들이었다. 풍부한 원료를 사용하여 고도의 기술을 요하지 않는 제품을 만들었으며, 이런 제품을 만들어 내는 중소 기업형 공장이 건설되고, 요업은 수입 대체 산업으로 꾸준한 성장을 보였다.
1957년에 들어서면서 UNKRA 원조에 의하여 건설된 국가 기간산업 3개 공장 중 2개가 요업공장 (문경 시멘트공장, 인천 판유리공장)으로, 현대식 공장이 건설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요업 발전의 전환점으로, 이것이 기반이 되어 요업 기술 발전과 기술인 양성에 크게 이바지하여 요업이 국가 주요 전략산업의 하나로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 요업계는 협회를 통하여 산-학이 함께 상부상조하는 협동 체제였다. 이제 발전기에 들어선 요업계는 학계-산업계의 인사들이 뜻을 함께하여 요업에 관한 학문과 기술의 발전 및 보급을 목표로 한 학회를 창설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1957년 봄에는 학회 창립준비위원회(2월22일), 발기인회(1차 2월22일, 2차 3월 22일)를 거쳐 3월23일 요업학회 창립총회 및 연구발표회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요업학회 주보의 발간
학회의 발족 준비와 함께 학회의 첫 사업으로 ‘요업학회 주보(週報)’가 발간되었다.(1957년 3월 17일). 직접 원지에 손으로 써서 등사한 것이었으나, 역경 속에서도 매주 편집회의를 열고, 원고를 정리하여 발행하였다. 내용은 논설, 외국 문헌 소개, 학계와 업계소식 등이었으며, 강좌의 성격을 띤 것도 계재되었다. 비록 미미한 소책자였으나 실무진의 불굴의 열정과 희생적 봉사 그리고 전체 요업인들의 격려와 협조의 소산으로, 요업계의 생동하는 모습이었다. 주보는 호를 거듭할수록 내용도 충실해졌으며, 그 후 약 4년 발행 되다가 215호(1961년 5월 31일)를 끝으로 중단되고, 약 3년 뒤 1964년 ‘요업회지’ 창간호가 출간되었다.
요업학회가 창립된 곳은 종로구 서린동의 요업협회 사무실이었으나, 그 후 서울 중구 초동 2가 72-9 에 임시로 옮겼다가, 1959년 8월 7일 요업회관의 준공으로 협회와 함께 입주하였다. (중구 충무로 2가 30-2, 1963년 지번 변경으로 충무로 2가 49-18로 변경). 회관에는 총협회와 학회, 내화물, 도자기, 연와공업협회 등이 입주하였다.
1960년 4월 28일 문교 제577호로 사단법인 대한요업학회 설립을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5월 30일 서울 지방법원 제 883호로 사단법인 등기를 마쳤다. 1961년 8월 31일에 문교부에 사회단체 등록(제 32호)를 하였다.
학회가 창설되던 50년대 후반, 요업 분야의 교육 및 연구기관으로는 대학의 화공과에서 요업관련 과목을 설강-교육 하였으며 연구기관으로는 중앙공업연구소 요업과뿐이었다.
1960년에는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에 요업공학과가 설립되어 1964년에는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62년 8월 28일 제6회 정기총회에서는 제4대 회장으로 남기동이 선출되어, 전임 김동일 회장(제1~3대)으로부터 학회 회무가 인계되었다.
요업회지의 발간
1964년 4월 30일 요업학회주보의 뒤를 이어 대망의 ‘요업회지’가 요업총협회와 공동으로 창간되었다. 그동안 요업계의 인사 상호간의 정보교환과 새로운 기술정보의 매개체로서의 학술지 발간이 절실히 요망되던 중 이 회지의 발행은 우리 요업계의 큰 경사이며 비약이기도 하였다. 요업회지의 출판에는 여러 요업회사들의 원조와 바쁘신 중에도 원고를 집필하신 집필자 및 편집과 교정 등 수고하여 주신 실무진의 봉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표지의 불꽃모양 그림은 요업제품의 열처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요업회지의 발간 초기에는 연 1회 발행하였으며, 회지 운영 위원회에서 편집을 담당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요업은 특화산업 또는 전략산업으로 집중 육성되면서 한국 요업공업의 전환기적 구실을 한 시기였다. 대부분의 요업 제품은 국내 수요를 충족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해외에 수출(도자기, 유리, 시멘트 등)하기에 이르러 큰 발전을 하게 되었다.
산업계가 급속한 발전을 하고 있을때, 이에 발맞추어 학계도 연구활동이 활발해져 여러 대학의 요업계 교수와 중앙공업연구소 요업과 연구원 및 산업 현장의 기술진이 수행하는 연구과제도 많아지고 다양해졌으며, 산-학 협동 연구도 수행 되었다. 또, 대학의 요업공학과와 공고의 요업과 학생들의 산업체 실습도 산-학의 적극적인 참여로 활발한 현장교육이 이루어졌다. 한편, 도자기 공업의 기술을 국제수준으로 도약시킬수 있는 전문 연구소로 요업센터(요업센터 연구소장에는 지응업)가 출범하였다.
1965년 12월 22일 제9회 정기총회에서는 제5대 회장으로 이종근이 선출되어 학회업무가 인계되었다. 또 유리, 도자기, 시멘트, 내화물, 연마, 점토 등 전문 분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66년은 요업총협회가 창립된 지 20주년이 되는 해로, 요업회지는 협회창립 20주년 기념 특집호를 따로 발행하였다(9월 10일). 1967년에는 영남, 호남, 및 중부 지부를 조직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는 부산대, 전남대, 연세대, 고려대, 인하대에 요업공학과가 설립되고, 서울대에 재료공학과(후에 요업공학과로 개편)가 설립되었다.
요업계의 급속한 발전과 요업 인구의 증가 및 요업 관련 연구기관의 증대로 학회 활동도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연구과제도 다양해져 일반 요업제품의 품질향상 연구, 생산성 향상 연구, 수입대체 연구에서, 신요업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산-학-연의 연계가 잘 이루어졌다.
학회에서의 연구발표 건수도 많아져 지금까지 연 1회이던 연구 발표회도 1968년 부터는 연 2회(춘계 및 추계)로 늘어났으며, 학회지의 발행도 1968년부터 연 2회로 증간되었다. 또,해외 석학의 초청 강연도 갖게 되고, 한편 우리 회원들이 국제학술회의에도 참가하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1968년 10월 6일에는 일본 오사카대학 靑武雄교수를 초청하여 내화물협회와 공동으로 내화물 기술증진 강연회를 가졌으며, 10월 28일에는 양회공업협회와 공동으로 호주 Commo
nwealth Science and Industrial Research Organization의 H.E.Vivian 시멘트 담당 연구관을 초청하여 세미나를 가졌다. 1969년 3월7일에는 Dr. W.D.Kingery를 초청하여 U.S.I.S. 에서 특별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9월 22일에는 Dr. Brindley를 초청하여 U.S.I.S.에서 특별강연회를 가졌다.
한편, 1968년 10월에는 일본에서 개최된 제5차 시멘트화학국제회의(5th ICCC)에, 1969년 2월에는 일본에서 개최된 Characterization of Ceramic Material Seminar에, 9월에는 일본에서 개최된 국제점토회의에 우리 회원들이 참석 하였다.
10월 29일에는 본 학회가 미국 요업학회의 Complimentary Member로 되어 상호간에 회지를 교환하기로 하였으며, 10월 31일에는 미국요업학회지에 우리 학회지의 논문 초록을 게재키로 하였다.
1960년대 후반기 도자기 공업은 요업센터와 같은 근대화된 시설을 갖춘 공장도 준공되었고 공장수도 늘어나서 생산량도 급증 하였으며, 수출량도 100만 불을 넘어서게 되었다. 내화물의 품종도 원료가 많은 점토질 내화물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소량이긴 하나 규석질 내화물도 생산되고, 염기성 내화물 원료인 해수 마그네시아가 생산됨에 따라 염기성 내화물도 제조되기 시작하였다. 유리 공업은 섬유유리도 생산되었고, 광학 유리의 가공과 크리스탈 유리도 제조하게 되었다. 시멘트 공업은 총 생산능력이 675만톤에 이르며 실제 생산량도 500만톤을 넘었고, 제조방식도 효율이 좋은 SP방식을 채택하는 등 급진적 발전을 하였다.
한편, 산업계의 발전에 발맞추어 요업센터 연구소와 KIST에 고체화학연구실 등 요업관련 연구기관, 그리고 여러 대학에 요업 관련 학과에서의 연구 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 1970년부터는 학회지를 연 3회 발간하였다.
1970년 7월 23일에는 미국 Bell Telephone 연구소의 김유성 박사를 초청하여 공업연구소에서 전자요업에 대한 특별강연회를 가졌고, 9월 8일에는 Dr. Brindley를 초청하여 공업연구소에서 층상 규산염과 결정화학에 대한 특별강연회를 가졌으며, 11월 5일에는 바텔 기념연구소의 Dr. Duckworth와 일본 무기재료연구소장 山內俊吉박사를 초청하여 특별강연회를 가졌다.
1971년에는 제7대 회장 임응극이 전임 이종근 회장(제5~6대)으로부터 학회 업무를 인수하였다.
학회지가 증간되면서 1971년 5월에 편집을 전담하는 학회지 편집위원회를 조직하여, 회지 운영위원회에서 하던 편집업무를 수행하도록 하고, 투고 규정, 심사 규정을 제정하였다.
또, 60년대 후반 이후, 요업관련 연구인력의 증가와 배출되는 요업학도의 증가, 산업 현장에서 종사하는 요업 기술인의 증가 등 요업인의 증가는 학회에 도자기, 유리, 시멘트, 내화물, 연마제, 점토 분과 위원회와 영남, 호남, 중부, 영동 지부에 이어 각 기관에 분회를 두게 되었다. 한편, 1971년 9월에는 대학 요업교육의 교과과목 및 교재 등의 토의와 횡적 교류를 도모하기 위하여 요업교육위원회를 발족 하였다.
또, 요업총협회와 공동으로 요업수첩 발행을 위하여 편집에 착수하여, 여러차례의 편집회의에서의 검토를 거쳐 1971년 12월에 발행하였다. 한편, 상공부 표준국에서 주관하는 공업표준화 계획의 일환으로 시행하는 공업규격 제정사업에, 요업분야의 규격제정에 우리 회원이 전문별로 분담하여 초안을 작성하고 심의하였으며, 전문위원회와 부회에 참여하였다. 또, 문교부에서 주관하는 실업계 고등학교 교과서 편찬사업에 전문별로 학회 회원이 참여하였다.
1973년에는 제8대 회장 이희수가 학회업무를 인계 받았다.
1973년에 들어서면서 전문 분과위원회의 활동도 활성화하기 시작하였다. 4월 15일, 시멘트분과위원회에서는 한국양회공업협회와 함께 제1회 시멘트 심포지엄을 한일시멘트(주) 단양공장에서 개최하였으며, 앞으로 매년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는 학회 전문 분과위원회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것으로, 산학협동의 본보기로서, 학교, 연구기관 및 산업체의 시멘트인들이 서로의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토의하고, 결과를 공유하는 시멘트인의 한마당을 이룬 것으로, 우리나라의 시멘트기술과 시멘트 과학의 발전에 견인차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6월 30일에는 도자기분과위원회에서는 Dr. Richard Ricker를 초청하여 요업회관에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용어제정 위원회에서는 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와의 용역 계약에 의하여 요업분야의 과학기술용어를 심의 제정하였다.
학회의 독자운영
70년대에 들어와서 학회 활동이 다양해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학회 활동에 짜임새가 있다고는 할 수 없으며, 회지 발행, 회원수, 학술발표회 등 앞으로의 과제는 산적해 있었다. 따라서, 학회 활동의 체계화와 운영의 혁신이 요망되었다.
1974년 학회는 학회 운영의 혁신과 내실을 다지기 위하여 지금까지 요업총협회와 공동으로 운영하여오던 학회지 발간사업 등 학회 업무의 일부를 학회 단독 운영 체제로 바꾸고 학회 사무실을 1월 10일에 국립공업표준시험소 요업과 내로 이전하였다
이는 요업학회 운영의 혁신이며 도약이었다. 그러나 학회의 단독 운영에 따른 고충과 애로는 상상외로 복잡 다단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유류파동에 따른 업계의 불황까지 겹쳐 학회 운영이 힘들 때도 있었다. 다행히 여러 회원의 협조와 회장 및 임원들의 노력과 과학기술총연합회와 요업계의 여러 기업체의 재정 보조, 또 용역비의 반을 희사해 준 관계 회원들의 봉사로 학회 활동을 무난히 수행할 수 있었다.
학회지도 단독 발간함에 따라 ‘요업학회지’로 개칭(Vol. 11부터)하고, 발간 회수도 연 4회로 계간으로 발행하였다. 한편, 편집 위원회도 개편하고 학회지의 체제를 개편하였다.
1975년 학회의 업무를 인수받은 제9대 회장 지응업은 학회의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하였다.
3월 4일 요업회관내에 독립된 사무실도 갖게 되었고, 전임 사무직원도 두어 학회 사무실의 면모를 갖추었다. 학회 업무의 원활을 기하기 위하여 정기 상임 이사회를 월 2회 갖기로 하고 평상시는 상임 이사가 하루씩 근무키로 하였다. 또 회원 카드도 정리하였다.
학회지 편집에서도 요업개론 강좌에 이어 요업기술자를 위한 결정학 강좌를 신설하기로 하고 결정학 기초이론 부터 시작 하였다. 또, 강좌 외에도 논설, 토픽, 초록란 등을 따로 두고, 논문의 체제 등도 개정하였다.
교육분과 위원회에서는 대학 및 공전 요업공학과 교과과정 및 강의 내용, 교과과정상의 문제점과 국가 기술자격법관련 사항 등을 토의하였다.
11월7일에는 공업진흥청 주최 내화물공업협동조합 후원으로 학회가 주관하여 내화물 산-학 협동 세미나를 개최하여, 내화물 제조에서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에 대하여 토의하였고, 국산 내화물과 외국산의 비교 전시도 하였다.
70년대 전반기에는 새로 개발된 topfiring 소성방법이 주목을 이끌었으며, 내화물 업계에서는 염기성 내화물을 제조하기 시작하였다. 또, 시멘트 업계에서는 1975년에는 생상량이 일천만톤을 돌파하였고 그중 이백만톤을 수출하였다.
1976년 10월 29일 이사회에서는 학회명을 사단법인 한국요업학회로 고치는 안을 토의하고, 제20년회 추계총회에서는 차기 회장으로 김기형을 선출하였다.
필자약력
한양대 화공과졸업(학사)
한양대 화공과 대학원(석사)
동경공대(공학박사)
한양대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동경공대 연구원
요업학회 회장
한양대 명예교수
창립 50주년, 한국세라믹학회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한국세라믹학회 전환기
-한국요업학회 시대 (1977-1999)
이홍림 공학박사 연세대학교 세라믹공학과 교수
김철영 공학박사 인하대학교 신소재공학부 교수
파인세라믹스 시대로 진입
1977년부터 2000년 사이의 기간은 시멘트, 유리, 내화물, 도자기 등 우리나라 전통 세라믹스 업계가 제품과 생산시설 및 장비의 국산화와 제품 생산실적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가운데 그 당시까지의 전통세라믹스(conventional ceramics) 중심의 최고의 전성기를 꽃피우면서도 새 시대를 여는 파인세라믹스(fine ceramics)의 연구가 활발해지게 되는 파인세라믹스 중심의 시대로 바뀌어가는 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부터 파인세라믹스(fine ceramics), 뉴세라믹스(new ceramics), 특수 세라믹스(special ceramics) 또는 고도기술세라믹스(hitech-ceramics) 등의 용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세라믹스에 관한 기술은, 특히 전자세라믹스는 물론 구조세라믹스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게 되고 일본의 세라믹 업계는 세계 시장을 압도하면서, 전통세라믹스에 대하여 파인세라믹스라는 용어가 미국과 유럽으로 역수입되어 파인세라믹스라는 용어는 뉴세라믹스 또는 특수세라믹스라는 용어를 능가하는 위치를 점하게 된다.
1984년 역사상 처음으로 ‘뉴세라믹스’라는 용어를 사용한 한·일 뉴세라믹스 세미나가 국립공업시험원과 한국세라믹학회의 주최로 5월30일부터 6월 1일 사이에 국립공업시험원에서 개최되어 그 후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이 기간 동안 액상반응법, 졸겔법, 기상반응법 등 화학반응을 이용하여 마이크론 이하의 서브마이크론(sub-microme
ter) 크기의 입자를 가진 미세분말을 만들고, 이것으로부터 고기능성의 세라믹스를 제조하는 연구가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연구대상의 재료로는 응력유기 상전이를 이용한 고인성의 부분안정화 지르코니아(PSZ)와 질화규소와 탄화규소 등 엔지니어링 세라믹스와 센서, 유전재료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전자기적 기능성 재료에 관한 연구개발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구조재료의 연구에는 KIST와 쌍용중앙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엔지니어링 세라믹스를 개발하여 세라믹 자동차 엔진 개발을 목표로 하는 새 시대를 열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엔지니어링 구조세라믹스의 개발은 고온과 취성(brittleness)이라는 세라믹스 특유의 문제점과 비용 등의 제약 조건들 때문에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는 연구개발에 차질이 빚어지게 되었다.
한편, 센서, 유전체, 페라이트 등의 전자재료에 대한 연구는 구조재료와는 대조적으로 비교적 낮은 온도와 높은 인성과 강도가 요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연구 진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파인세라믹스 분야의 주력 산업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자재료 분야의 연구 및 생산에 대표적인 연구기관과 기업체로는 KIST와 삼화콘덴서 등을 들 수 있다.
LG전자, 삼성전자, 하이닉스 등의 반도체 제조 회사들도 바로 이 시기에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면서, 이제는 세계 제일을 다투는 기술경쟁을 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전통세라믹스 산업도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한국유리에서는 1977년에는 판유리 제조기술 최신공법인 플로트공법을 도입키로 하여 1981년에는 군산 플로트유리공장에서 두께 2mm부터 19mm까지의 고품질 판유리를 연간 275만 상자 이상 생산함으로써 본격적인 플로트유리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또 자동차 안전유리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한국안전유리공업주식회사를 1985년에 설립하였고, 또한 유리사업 다각화의 일환으로, 최신 공법으로 단열-흡음용 유리섬유를 생산하게 되었다.
조선내화(주)에서는 내화물 제조기술 국산화를 위해 주력하였으며 그 결과로 58종 이상의 KS 규격을 획득하였고, 1981년에는 기술 연구소를 설립하여 국제경쟁력 강화에 노력하였다.
도자기 산업도 1960~70년대의 국가 경제개발 정책에 따라 도자기 생산량과 수출량이 역시 크게 신장되었다.
시멘트 산업에서는 1981년에는 수출 500만 톤을 돌파하였고, 생산량도 1983년에는 2000만 톤 돌파하는 성장세를 이어갔으며, 품종도 내황산염 시멘트, 슬래그 시멘트 등도 생산하는 등 제품 다양화를 이루었다.
1977년 1월 7일 전임 제9대 회장단(회장 지응업)으로부터 제10대 회장단(회장 김기형)으로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다.
대한요업학회에서 한국요업학회로 개칭
1977년에 학회는 대한요업학회에서 한국요업학회로 개칭 등기하였다. 1977년 연초부터 매주 1회 열리는 상임이사회에서는 사단법인 한국요업학회의 정관을 기초하고 사단법인 등기를 위한 서류를 갖추는 작업을 하고, 4월 29일 총회에서 정관을 심의 의결하였다. 학회 종신회비(현재의 평생회비) 적립금(200만원)을 법인체 출자금으로 하여 사단법인을 신청하여, 8월13일에 과학기술처의 허가(과학기술처 제48호)를 얻고, 9월1일 법원 등기(등기번호 1514호)를 하였다. 또, 요업발전에 공로가 많고 학술 및 기술발전에 이바지한 회원을 포상하는 학회상 제도를 제정하여, 춘계학회에서는 공로상과 학술상을, 추계총회에서는 학술진보상과 기술진보상을 시상하기로 하였다.
학회 사무실 이전
요업회관의 이전으로, 1977년 12월 12일 학회 사무실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대현동 53-20 요업회관 202호실로 이전하였다. 1980년 1월 1일부터 학회 제11대 회장단(회장 박용완)이 취임하였다.
1980년 부터 지금까지의 임원 제도와는 다르게 간사제도가 도입되었다. 지금까지 학회의 실무를 담당해오던 전무이사, 총무이사, 재무이사, 편집이사 등 이사제를 간사장, 총무간사, 재무간사, 편집간사로 개편하였으며, 회장, 부회장 및 간사진으로 구성된 실무회의를 갖기로 하였다. 한편, 이사회는 전임 회장 및 현 회장단을 주축으로 원로회원으로 구성하였다.
1981년 3월 5일 남기동 전회장은 3.1 문화상 수상 상금 150만원을 학회에 기탁하였다. 기탁 받은 3.1문화상 상금은 학회 창립 25주년 기념사업에 사용하기로 하였다.
10월 26일 이사회에서는 도예연구소 설립 추진 건 및 출자방법 등을 논의하였으며, 학회 마크 제정 설명, 학회 창립 25주년 기념 ‘25년사’ 편찬 위원회 설립에 대하여 토의하였으며 위원장에 이종근을 선출하였다.
학회 마크의 제정
학회를 상징하는 마크가 1981년 추계 총회에서 제정되었다. (제안자 박용완)
<마크의 상징>
1.요업광물의 기본 단위인 SiO4 사면체 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2.이것을 큰 원으로 둘러쌓음은 요업학계의 단합을 나타낸다.
3.모든 구도가 원으로 이루어짐은 원만을 뜻한다.
4.5개의 원으로 이루어짐은 5대양(세계)으로 뻗겠다는 의욕을 나타내고, 동시에 5행의 목(木)(=연료), 화(火)(=불, 온도), 토(土)(=점토), 금(金)(=금속산화물),수(水)(=수화물) 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요업의 기본요소와 상통된다.
5. 가운데 원을 기준으로 해서 3개의 요자가 부각되어 있다.
1982년 제12대 회장단(회장 박금철)이 취임하였다.
7월 22일 학회 25주년사 편집위원회(위원장 이종근, 간사장 한기성, 집필 실무 최상흘)에서 그간 집필 편집해온 내용을 논의하고 25년사 발간을 위하여 업무를 분담하였고, 연말에 발간하였다. 이듬해 1월 13일에는 요업학회 25년사 출판기념회를 하이야트 호텔에서 개최하고 남기동 전 회장에게 감사패를 증정하였다.
1984년 1월 1일 제13대 회장(이전)이 선출되었다.
1984년 5월 31일·6월 1일 제1회 한일 New(또는 Fine) Ceramics 세미나가 요업학회와 공업시험원의 공동주최로 공업시험원에서 개최되었다. 세미나는 특별강연, 분야별 강연(6분야), 좌담회 등으로 진행되었다.
학회 제28년회 추계총회에서 학회지를 현재 연 4회 발행에서 연 6회 발행하자는 안이 건의되었다.
요업재료의 과학과 기술 발간
1986년 제14대 회장단(회장 한기성)이 취임하면서 학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학회의 정기 간행물로 ‘요업학회지’외에 소식지로서 ‘요업재료의 과학과 기술’지가 1986년 7월 창간되었다. 영문 이름은 ‘CERAMICS’로 하였다. 1986년 첫해에는 연 2회 발간하고 1987년부터는 계간지로 바꿔 연 4회 발간하기로 하였다.
부회 활동으로는 시멘트 부회만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있었으나 1986년부터 유리 부회와 내화물 부회가 각각 제1회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제1회 유리 심포지엄은 8월 2일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에서 147명의 유리 연구자와 엔지니어가 모여 가졌으며, 제1회 내화물 심포지엄은 10월 24일 경남대학교에서 197명의 내화물 관련 연구자와 엔지니어가 참석하였다.
선거에 의한 학회장 선출
1986년에는 처음으로 선거관리 위원회를 발족하였다. 현재까지는 전임회장단 회의에서 차기 회장을 추천하였으나, 앞으로는 선거로 회장을 선출하기로 하였다. 회장선거는 간접선거 방식을 택하였다. 먼저 80명의 평의원을 선출하고, 이들이 회장과 이사를 선출하는 방식이다.
한-미 요업학회 교류
1987년 10월 16일 라마다 올림피아 호텔에서 개최된 제31년회 추계 총회 및 연구발표회에는 한-미 공동 심포지엄도 개최 되었다. 그간 지속적으로 토의된 한-미 요업학회 교류사업은 지응업(국제교류위원회 위원장)을 조직위원장으로 하여 준비되어 왔다.
먼저 서울에서 1987년 10월 양국 학회의 공동 세미나를 개최하고, 1988년에는 Cincinnati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1988년 미국 세라믹학회에서 발간하는 Bulletin에 Korea session 특집호를 발간하기로 하였다. 이 특집호에 실릴 원고는 각 부회에서 작성하기로 하고 우리나라 요업 분야를 전체적으로 소개하는 것으로 하였다.
1987년 10월 14일 한국을 방문한 미국 요업학회 대표단은 총 34명(일부 대표단 부인 포함)이었으며, 10월 16일 한국 요업학회 추계총회시 한-미 공동 심포지엄이 개최되었고, 이어서 유관 산업체 및 연구소를 방문하고 관련 강연회를 가졌다. 주요 내용은 ‘요업재료의 과학과 기술’ 2권4호 특집호에 실려 있다.
1987년의 부회활동으로는, 8월7일 제1회 석고-석회심포지엄이 태원물산 주관으로 울산 코리아나호텔에서 개최되었으며, 11월 28일에는 제1회 도자기심포지엄이 마산 도자기시험소에서 개최되었다.
학회 사무실 마련
1987년 말 학회는 독립된 학회 사무실을 갖게 되었다. 학회는 현재까지 사용하던 신촌의 요업회관을 떠나 방배동에 새로운 사무실을 마련하였다. 학회가 요업회관에 있을 때는 그 건물에 대한 지분이 없었다. 당시 학회에는 약 6800만원의 기금이 있어 새 사무실을 물색 하던 중(이 임무는 안영필, 이응상이 맡음), 방배동의 현 사무실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금만으로는 모자라 사무실의 일부를 2000만원에 전세를 주어 해결하였다.
12월 18일 사무실을 이전하고, 12월 29일 입주식을 하였다. 그 후 남기동 전 회장이 2000만원을 기부하여 전세를 내 보내고 사무실을 전부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후일 한기성의 제안으로, 학회에서 이 2000만원을 다시 마련하여 기부자의 호를 딴 양송상의 기금으로 하였고, 그 후 추가 기부로 오늘날의 양송상 기금이 되었다.)
1988년 최초로 선거에서 당선된 안영필이 학회장으로 취임하여 제15대 회장단(회장 안영필)이 학회를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5월 1~5일 미국 Cincinnati에서 열린 제90차 미국 세라믹학회 총회에 우리 학회를 대표하여 안영필 등 25명의 대표단이 참석하였다.
이번 방문은 전년 미국 요업학회 대표단의 한국 방문의 답방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로서 양국 협회의 교류가 증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 대표단은 학회 참석 후 산업체를 방문하였다.
1988년 9월 American Ceramic Society Bulletin지에 Korean Issue라는 한국 특집기사가 실렸다.
이해 9월 29일에는 영남지부가 부산 경남 지부와 대구 경북 지부로 분리되어 대구 경부 지구 창립 총회가 열렸다. 초대 지부장으로는 조상희(경북대)가 선출되었다.
부회 활동으로는 제1회 구조 세라믹 심포지엄(엔지니어링부회)이 KAIST에서 열렸다.
이 해에는 연 4회 발간되던 총설지(요업 과학과 기술)가 2회만 발간되었다.
1990년 제16대 회장단(회장 장성도)이 취임하였다.
본 학회가 후원하는 한-미 fine ceramic seminar가 3월 15~16일 양일간 서울대학교에서 개최되었으며 seminar는 조직위원장인 김도연이 주관하였다.
이사회에서는 4회 발간하던 ‘요업재료의 과학과 기술’지를 연 4회 발간에서 2회 발간으로 줄이고, 그 대신 학회지 발간을 연 6회에서 8회로 증편하기로 하였다.
5월 이사회에서는 성옥기금과 양송기금을 운영할 성옥기금위원회와 양송기금위원회가 결성되었다. 1991년부터 ‘요업의 과학과 기술’지에 정밀요업협회(현 파인세라믹협회)가 공동으로 참여하기로 하고 그 쪽의 소식도 전하기로 하였다. 또, 한동안 2회 발간되던 ‘요업재료의 과학과 기술’지는 다시 연 4회 출판하기로 하였다.
한-소 요업학회 교류
국제 교류 위원회 간사인 윤기현이 지난해 7월 소련을 방문하였고 이때 소련 요업학회로부터 우리 학회와의 학술 교류 제안을 받아, 학회에서는 1991년 3월과 10월 에 걸쳐 대표단 교환 방문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한-소 교류는 3월 25일 한국측 대표단 21명이 제2회 소련 요업학회 총회에 참석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대표단은 27일 소련 요업학회에 참석하여 특별히 마련된 Korea session에서 한국 요업학회 및 산업계 현황을 소개하고, 소련 연구소를 방문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요업재료의 과학과 기술’지 6권 2호에 소련 특집으로 보도하였다.
1992년 제17대 회장단(회장 이응상)이 취임하였다.
한-일 요업학회 교류
1993년 12월22일 학회장(이응상)과 국제협력위원장(조상희)이 일본 요업학회를 방문하여 일본 요업 학회장(H. Yanagida)과 양 학회의 학술교류 협정서에 조인하였다. 협정서에는 연구자 및 사절단의 교류, 공동 심포지엄 개최, 공동 연구 수행 등을 협력하기로 하였다.
1994년 제18대 회장단(회장 최상흘)이 취임하였다.
2월 열린 편집위원회에서는 소식지 ‘요업재료의 과학과 기술’을 연 4회에서 6회(격월간)로 증간하기로 하였다.
Poster session 도입
제38년회 춘계학회 부터는 Poster session을 만들어서 일부 논문을 포스터로 발표함으로써 많은 연구 발표를 효율적으로 발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추계학회 때부터는 Ceramo
graph 시상을 하기로 하였다.
추계총회에서는 성옥상 수상자로 남기동을 시상하였는데, 수상자는 상금 500만원을 학회에 기증하였다.
한-호 요업학회 교류 및 한-이·한-유럽 요업학회 교류
1994년 7월 23일 23명의 학회 대표단이 호주를 방문하여, 한국요업학회(회장 최상흘)와 호주요업학회(회장 Rodney Stead)는 양 학회간의 학술교류 협정을 체결하고 협정서에 조인하였다. 우리 대표단은 7월 23~27일 열린 Austceram ´94 에 참석하여 13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이어서 7월 28일 Australian Nuclear Science and Technology Orgamisation(ANSTO)에서 열린 한·호 symposium 에서는 12편(한국측 6편, 호주측 6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1994년 12월 13일에는 한국-이태리, 한국-유럽 요업학회간의 교류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태리 요업학회 학회장 G.N. Babini(유럽 요업학회장 겸임)등 10 여명은 12일 한양대학교 세라믹소재연구소에서 주관하는 세라믹 소재 세미나에 참석하였으며, 다음날 한국-이태리, 및 한국-유럽 요업학회 교류를 합의하고, 협정서에 조인하였다.
영문판 논문지 ‘The Korean Journal of Ceramics’ 발간
지난해 10월 12일 이사회에서는 1995년부터 국문지에 이어 영문판 논문집을 연 4회(계간) 발간하기로 하였다. 1995년 1월 20일 영문 학회지 편집위원회에서는 투고 규정, 심사방법 등을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그리고 영문 학회지 명칭을 ‘The Korean Journal of Ceramics’로 정하였다.
한편 소식지 편집위원회에서는 ‘요업재료의 과학과 기술’지의 한글 이름을 ‘요업 기술’ (영문 이름 ‘Bulletin of the Korean Ceramic Society’)로 개칭하였다.
4월에는 미국 Cincinnati에서 열린 96차 미국 요업학회에 학회 대표로는 최상흘(학회장), 김철영(총무)이 참석하였고, 10월 7일 개최한 제4회 European Ceramic Society Conference 에는 최상욱(부회장), 한상목(간사장)이 참석하였다.
또 지난해에 이어 역대 회장단과의 좌담회(2월28일 4명, 4월26일 4명, 6월14일 5명)를 갖고, 학회운영과 앞으로의 학회가 해나갈 방향 등을 자문 받았다.
11월 24일에는 요업 관련 각종 용어를 수집 통일하여 표준 용어를 제정하고자 학회내에 요업 용어 제정 위원회(위원장 박용완)를 설치하고, 그 실무작업에 들어갔다.
한편, 학회 회원들의 각종 자료를 KIST 어용선 박사가 제공해 준 프로그램으로 전산화하여 회원 관리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1996년 제19대 회장단(회장 김종희)이 취임하였다.
6월26일 이사회에서는 직선제 회장 및 임원 선출 규정에 대한 논의 사항을 우선 회장단에게 자문을 구하기로 하였다.
7월15일~17일 호주의 케언즈(Cairns)에서 열린 제2회 International Meeting of Pacific Rim Ceramic Societies (Pac Rim 2)에는 많은 우리학회 회원이 참가하여 7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1998년 Pac Rim 3 총회를 한국 경주에서 9월 20일~23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고, 이 국제회의의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는 김유성(포항공대)이 선임되었다.
20년이상 근무한 직원 지경숙실장이 개인사정으로 1997년 2월말에 퇴직을 했으며, 배지원이 신임직원으로 채용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1998년 제20대 회장단(회장 오근호)이 취임하였다.
요업관련 세 단체(한국요업학회, 대한요업총협회 및 한국정밀요업협회)에서 발행하던 잡지를 통합하여 새로운 잡지 ‘세라미스트’지를 발간하였다. 그 동안 세 단체에서 발간한 기술지는 요업분야 각각의 고유한 영역에서 기여해 왔다. 그러나 다가올 새로운 21세기에 힘찬 도약을 위하여, 또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때에 경비 절감을 통해 슬기롭게 이겨 나가기 위하여 세 단체가 하나로 힘을 모으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본 학회의 ‘요업기술’과 요업총협회의 ‘Ceramic Bulletin’ 그리고 정밀요업협회의 ‘파인세라믹스 뉴스레터’를 통합하여 ‘세라미스트’로 새롭게 창간하게 되었다. 따라서 ‘요업기술’지는 1997년 12월 제19권 제6호로 마감하였으며, 1998년에는 세 단체와의 편집 방향의 조율 등으로 ‘세라미스트’는 2호만 출간되었다.
Pac Rim 3 개최
Pac Rim 3 (조직위원장 김유성)는 경주 현대호텔에서 24개국으로부터 929명(국내 698명, 국외 251명)이 참가하여 10월 20~23일 간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대회일정은, 10월 20일 등록 및 환영만찬, 21일 연구발표, 22일 연구발표, 견학 또는 관광 및 간친회, 23일 연구발표로 이루어졌다. 발표된 논문수는 총 677편으로 초청강연은 55편이었다.
1988년 5월 3일~7일 미국 신시네티에서 개최된 미국요업학회 100주년 기념행사에 오근호(회장)와 김득중(재무간사)이 참석하였으며, 학회 기념품으로 도자기를 증정하였다.
교육위원회(위원장 최상욱)에서는 지난 2년간 사업으로 대학 학부용 실험교재를 8월30일 발간하게 되었다. 실험교재 편집위원장은 최상흘(한양대)이 맡았으며, 집필에는 전국의 대학 및 연구기관에서 실험을 담당하고 있는 교수와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연구자 등 40여명이 참가하였다. 수익금은 학회의 경상운영비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학회장 임기 1년제로 정관 개정
10월 21일 임시총회에서는 9월9일 이사회에서 의결된 정관개정안(회장임기 1년,간선제, 수석부회장제 도입)에 대하여 토의하고, 전원 찬성으로 정관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개정된 정관에 따라, 3월 17일 2000년도 수석부회장후보로 이경희를 선출하였고, 9월29일 2001년도 수석부회장후보로 오재희를 선출하였다.
또 학회에 대학 학생 지부회를 두고 그 지부를 활성화하는 목적으로 양송상을 시상하기로 하였다. 양송상은 양송 남기동 선생이 출연한 기금으로 제정한 상이며, 수상자는 대학 학생 지부회 학생회원으로 세라믹을 전공하는 자로서, 춘·추계연구발표회에서 우수한 논문을 발표한 학생으로 하기로 하였다.
필자약력(이홍림)
연세대 화공과(공학사)
연세대학원 화학공학과(공학석사)
동경공대(공학박사)
연세대 세라믹공학과 교수
연세대 공과대학 교학과장
한국세라믹학회 수석부회장
필자약력(김철영)
한양대 요업공학(학사)
Alfred University Ceramic Engineering(공학박사)
한국세라믹학회 회장
Asian Oceanian Ceramic Federation회장
인하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창립 50주년, 한국세라믹학회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한국세라믹학회 현재
-한국세라믹학회 시대 (2000년~현재)
송종택 공학박사 단국대학교 신소재공학과 교수
한국세라믹학회로 개칭
2000년은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의 도래이며, 새로운 정관에 의하여 학회 명칭이 한국요업학회에서 한국세라믹학회로 출발하는 해였다. 또, 학회 회장의 임기가 2년에서 1년으로 바뀌는 해이기도 했다. 회장의 임기가 2년에서 1년으로 변경됨에 따라 학회의 연속성 있는 운영을 위해서 수석 부회장 제도를 도입하여, 1년간 학회 업무 파악 과정을 거쳐 차기 회장으로 취임함으로써 학회 업무 수행을 원활히 할 수 있게 하였다.
2000년 제21대 회장단(회장 이경희)이 앞으로 1년간 학회를 운영하게 되었다.
제44년회 춘계 연구발표회에서는 전자세라믹스 심포지엄및 미세구조 심포지엄이 함께 개최되었으며, Short course 2편의 발표가 있었다. 석·박사과정을 위한 Short course는 학생회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어 계속 개최하기로 하였다. 또한 포스터 발표의 관심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편집위원회(위원장 김 환)에서는 학회의 정기간행물(국문지, 영문지, 세라미스트)을 모두 A4크기로 정했다. 지난 1998년8월12일 영문학회지의 SCI등재 준비위원회 설립에 대한 김형준(서울대)이 세미나를 가진 이래로 세라믹학회는 2000년부터 학회지의 SCI등재 추진방안에 대하여 심도있게 생각하게 되었다.
세라믹 용어집 발간
용어제정위원회(위원장 박용완)는 4월21일 세라믹 용어집을 발간하였다. 이 용어집의 작업은 1995년7월에 착수하여 만 5년여 동안 43회의 회의를 거듭하면서 12명의 제정위원들의 헌신적인 노고로 열매를 맺게 되었다.
2001년 제22대 회장단(회장 오재희)이 취임하였다.
추계 연구발표회에서는 나노소자 심포지엄 및 초전도체 심포지엄도 함께 개최되었다.
학회의 논문발표가 증가하면서 학회장소 확보가 힘들어져, 학회에서는 발표공간과 시간을 효율화하기 위하여 구두와 포스터 발표로 분리하였는데, 올해 들어와서 포스터 발표가 구두 발표보다 3배 이상 많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구두발표자는 박사과정의 학생 또는 2년 이상의 연구경력자로 자격제한을 두어 발표의 질을 높이도록 하였다.
아시아-오세아니아지역의 세라믹 발전과 협력을 위한 조인식
외국학회와의 교류로서 오재희 회장은 일본세라믹협회의 초청으로 9월27일 일본세라믹협회 추계총회에서 아시아-오세아니아지역의 세라믹 발전과 협력을 위한 조인식을 가졌으며, 한국학회 대표로 연설하였다. 이날 조인식에는 주최측인 일본과 한국, 중국, 대만, 호주의 5개국 대표가 참석하였다.
미국요업학회 총회에는 국제교류위원장인 김철영(인하대)과 사업운영위원인 유상임(서울대)이 참석하였으며, ICF(International Ceramic Federation)회의에는 학회대표로 김유성(포항공대)이 참석하였다.
8월22일 제3차 이사회에서는 SCI 등재를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하여 세라믹학회지에 영문논문을 게재하기로 하였으며 2001년도 영문지 The Korean Journal of Ceramics 3호 및 4호의 발간을 보류하기로 하였다. 또한 정관 개정(안)을 다음과 같이 승인하였다.
- 평의원 임기 : 4년 → 2년
- 평의원 정수 : 100인 이상 150인 이내 → 150인 이상 200인이내
한국화학관련학회 연합회의 가입 및 활동
관련학회단체와의 교류로서는 지난해에 가입한 한국화학관련학회연합회의 연례행사에 세라믹학회 회장 또는 임원이 참석하였다. 연합회의 창립 배경은 대한화학회와 화학회로부터 독립된 한국화학공학회, 한국고분자학회, 한국공업화학회가 서로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1999년에 탄생하였으며, 세라믹학회는 2000년부터 연합회에 합류하게 되었다. 따라서 연합회는 국내 화학 관련 분야 학회들의 공동발전과 산·학·연협력체제의 구심체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 후, 한국화학관련학회연합회의 회장학회로서 2004년도는 한국세라믹학회가 맡기로 되어 있어 24대 윤기현회장이 1년간 연합회의 살림을 운영하게 되었다.연합회는 국내 화학 관련분야 학회들의 공동발전과 산·학·연 협력체제의 구심체 역할을 위해 설립된 것이며, 5개 학회(대한화학회, 한국화학공학회, 한국고분자학회, 한국공업화학회 및 한국세라믹학회)가 돌아가면서 회장을 맡고 있다. 연합회 활동으로는 6월4일 연세대학교에서 제6차 산학심포지엄 - 차세대 화학기술의 미래 - 차세대 성장동력과 정밀화학 소재와 10월29일 호서대학교에서 제4회 화학산업진흥 심포지엄 - 디스플레이 및 전자재료 산업과 화학산업이 개최되었다.
2002년 제23대 회장단(회장 김환)이 앞으로 1년간 학회를 운영하게 되었다.
세라믹학회는 Web site의 효율적 운용을 위한 정보화 준비위원회(위원장 윤기현)를 구성하고 web-site를 구축하였으며, Domain명은 www.kcers.or.kr과 www.ceramic.or.kr의 2개를 동시에 사용하기로 하였다. 인명정보(소속, 연락처, 전공등)는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되, web site의 활용이 안정화된 후에는 회원에게만 공개하기로 하였다. Web site 로그인 방법은 학회 고유회원 번호 부여와 패스워드를 입력시키도록 하였다. 또한 web site의 학회 홈 페이지도 시안 검토하여 완성하였다.
미국요업학회 총회에는 윤기현 수석부회장과 김응수 총무운영위원이 참석하였으며, 관련학회단체와의 교류로서는 한국재료관련학회 협의회에 회원학회로서 가입하였고, 한국화학관련학회연합회의 연례행사에는 꾸준히 참석하였다.
양송상 및 성옥상 기금의 추가 출연
2003년 세라믹학회는 새해부터 경사스러운 일이 생겼다. 1월3일 학회 신년하례식에 참석한 양송 남기동 전 회장이 양송상 기금을 1억원 추가 출연해 주어 총 2억원이 되었으며, 새로이 양송논문상을 제정하여 연 1회 200만원의 상금과 함께 시상하게 되었다. 앞으로 양송상은 양송 논문상과 양송 포스터상의 두 종류로 시상하게 되었으며, 젊은 세라미스트들의 학술 연구활동의 의욕고취와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6월에 성옥 이훈동(조선내화 명회회장)회장이 성옥상 기금을 추가 출연해 주어 총 3억원이 되었다. 이와 같은 기금의 흔쾌한 추가 출연은 세라믹스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생각된다.
2004년도에도 남기동 전 회장이 양송상 기금으로 1억원을 추가로 출연하여 주었으므로 세라믹학회는 양송상 및 성옥상 기금으로 각각 3억원씩을 갖게 되었으며, 양송상은 보다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하였다. 제1회 양송 논문상은 윤대호(성균관대)에게 시상되었다.
2003년, 제24대 회장단(회장 윤기현)이 취임하였다.
2003년에는 세라믹 학회의 웹 페이지의 구축을 완료한 것, 학회의 국제화와 학회지의 SCI등재를 위해 매호마다 예년도에 비해 더 많은 영문 논문들을 게재한 것, 학회지의 표지를 영문위주로 새롭게 디자인하여 국제화에 발맞추려 한 점, 양송논문상을 제정하여 세라믹학회지에 가장 우수한 논문들을 게재한 회원에게 시상한 것 등이 주요 사업이었다.
또한 특기할만한 점은 춘·추계 연구발표회에서 400편이상의 논문이 발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라미스트’가 연6회 발행에서 4회로 준 것이 아쉬운 점으로 남았다.
2004년 제25대 회장단(회장 김윤호)이 앞으로 1년간 학회를 운영하게 되었다.
제48년회 춘계 연구발표회에서는 적층 세라믹 심포지엄 및 다공질 세라믹 심포지엄이 함께 개최되었으며, 추계 연구발표회에서는 에너지재료 심포지엄도 열렸다.
2005년은 한국세라믹학회 50년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한 해였다. 이 해에는 2005년 춘계총회에서 통과한 개정된 정관에 따라 처음으로 회원들의 비밀 투표에 의해 회장(예정자)을 선출했다. 그리고 새로운 편집위원회가 구성되어 출발하였다. 지금까지 세라믹학회지의 편집운영위원회는 학회의 운영위원회와 같이 임기 1년간의 조직으로 운영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학회지의 SCI등재 등과 같은 사업들을 연속성있게 체계적으로 추진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다.
금년부터 이사회에서 인준된 수석편집위원장이 편집위원회를 새로운 체제로 운영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즉, 편집위원은 각 전문분야별로 선임·구성되어서 임기 3년간의 편집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하였으며, 매년 1/3씩 교체하기로 하였다.
2005년 제26대 회장단(회장 송종택)이 취임하였다.
제49년회 춘계 연구발표회에서는 특별 심포지엄 1(첨단소재의 미세구조)과 특별 심포지엄 2(고체산화물 연료전지) 및 특별 세션 (디스플레이 소재)이 함께 개최되었으며, 추계 연구발표회에서는 특별 심포지엄 1(Electro-ceramics for Informatics), 특별 심포지엄 2(Ceramic sensors and Actuators) 및 특별 심포지엄 3(Cement Technology and Environment) 이 개최되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연구발표회에서 심포지엄이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춘계총회부터 구두발표의 활성화를 위하여 논문발표형식을 일부 특별 심포지엄화하기 시작하였다. 춘·추계 연구발표회에서 회원들의 호응이 상당히 커서 앞으로 계속 유지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다.
AOCF (Asia-Oceania Ceramic Federation)의 창립과
회의 개최
9월27일~29일 일본 오사카에서 The 1st Asia-Oceania Ceramic Federation( AOCF ) Conference가 개최되었다.
AOCF는 일본 나고야에서 Pac Rim 5가 개최되었을 때 처음 회의를 가졌으며, 2003년 9월30일 창립되었다. 그 회의에는 세라믹학회 회장 윤기현이 참석했으며, 초대 AOCF회장은 그 당시 일본세라믹협회 회장인 Shinichi Hirano가 선임되었다. AOCF의 목적은 국제적인 연대강화책으로서 아시아-오세아니아 국가간에 학술교류와 세라믹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정관에 따라 AOCF회의는 2년마다 열리며, 회장국의 세라믹 총회에서 합동으로 개최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제1회 AOCF회의는 2005년도 일본 세라믹협회 추계총회와 합동으로 열렸다. 특별 세션 주제는 ‘Chemical Design for Functional Innovation’이었으며, 한국측 조직위원은 심광보(한양대)이었다. 회장단 회의에서는 제2대 AOCF회장국으로 한국세라믹학회를 결정했으며, 회장은 차기 한국세라믹회 회장인 김철영을 선임하였다. 그리고 제2회 AOCF회의는 2006년 한국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2006년 추계 학술대회에서는 제2차 AOCF confer
ence도 함께 열렸다. 이 학술대회는 심광보(한양대)가 조직위원장을 맡아 진행하였다. 이 conference에서는 5개국에서 88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10월 21일에는 서울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AOCF council meeting이 있었으며 이 자리에서 제 3대 AOCF 회장과 2008년 중국에서 제 3차 AOCF conference를 열기로 하였다.
세라믹 용어사전의 발간
용어위원회(위원장 최상흘)에서는 ‘세라믹 용어집’의 후속 사업으로 ‘세라믹 용어사전’을 내기로 하고 2001년 용어사전 편찬위원회를 결성하여 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하였다. 세라믹 용어사전은 ‘세라믹 용어집’에 수록된 용어들 중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4000여 용어들을 선택하여 간단하면서도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책자로 편찬하였다. 이 용어사전은 12명의 편집·집필위원들이 모여 4년에 걸쳐서 만들어져 3월에 발간되었다.
학회장 직선으로 선출
2005년도 운영위원진의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는 새로운 정관에 따라 직선제 수석부회장 겸 차기회장 선거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직선제를 수용하기 전의 정관 제14조 2항에는 현 이사회에서는 차차기 이사중에서 호선에 의해 1인의 수석부회장을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2005년4월22일 회원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수석부회장 겸 차기 회장 선출 방식을 ‘선거권이 있는 정회원’이 ‘무기명 투표에 의해 직접 선출’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새 정관에 따라 학회 홈페이지 및 이메일(정회원)을 통하여 수석부회장 겸 차기 회장 선거에 관한 공고를 냈으며,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김 환)는 8월25일 투표권을 가진 회원(2/4분기까지 연회비 납부자)들에게 투표용지(후보자의 이력서 및 소견서 첨부)를 발송하여 9월14일 우표 투표를 마감하고, 당일 3차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개표를 한 결과 유효 투표의 37%를 얻은 강원호 후보가 2006년도 수석부회장으로 결정되었다.
정보화위원회(위원장 김배연)에서는 세라믹학회의 Internet Hompage(www.kcers.or.kr 또는 www.ceramics.or.kr)를 7월에 전면적인 개편을 하였다. 개편의 주된 내용은 홈페이지에 학회 회원의 database를 전부 정리하는 것과 그동안 취약 부분으로 지적되었던 영문 부분의 보강이 있었고, 학술 논문 투고시에 심사위원 선정과 심사 진행에 관련된 부분이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부분을 들 수 있겠다.
2006년 제27대 회장단(회장 김철영)이 앞으로 1년간 학회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번 임원진은 임기를 시작하면서 많은 세라미스트와 세라믹관련 업체가 학회에 적극 참여 및 활동을 위하여 1년 동안 여러 업체, 연구소 및 대학을 방문하였다. 그 결과 당해년도 연회비를 납부하고 학회에서 활동을 한 정회원수가 900명을 넘었다.
4월21일 제50년회 춘계총회 총회에서는 일부 정관 개정이 있었다. 즉, 현재까지는 전임 회장 3인이 이사회의 당연직이었는데 많은 새로운 회원이 이사회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하여 전임회장 1인만이 이사회 당연직으로 임명되도록 개정되었다. 이번 학술대회부터는 조직위원장을 별도로 임명하여 진행을 맡도록 하여 이번 춘계 학술대회의 조직위원장으로는 김득중(성균관대)이 선출되었다.
6월 25~29일 5일간에 걸쳐 Canada의 Toronto에서 열린 1st ICC (International Congress on Ceramics)에는 우리 학회 대표로 학회장인 김철영과 윤당혁(영남대)이 참석하였다. ICC는 국제기구인 ICF(International Ceramic Federation)가 주관하는 학술대회로서 2년마다 열리게 되어있다. 제 2차 대회는 2008년 이탈리아에서 열릴 예정이다. 우리 학회에서는 전시장에 부스를 설치하고 2007년 갖게 될 50주년 행사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그리고 김철영은 ICF 회의에 참석하여 일부 회칙을 개정하고 우리학회도 ICF에 적극 참여하기로 하였다.
한국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2007년은 학회 창립 5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로서, 지난 반세기 동안 학회는 국내 세라믹 관련 대학, 연구소 및 산업체의 유기적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국내외 세라믹 관련 산업의 발전에 필요한 학문과 기술의 발전과 보급에 그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올해 2007년 제28대 회장단(회장 강원호)이 취임하였다.
이번 임원진은 학회 창립 50주년 기념행사를 원만히 수행하는 것과 학회의 기업체 참여를 활성화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부회장 및 협력 부회장사를 보강하였으며, 총무운영이사 2명을 두어 일반 경상 업무와 기념행사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경상 업무와 기념행사 업무가 상호 보완되도록 하기 위하여 50주년 기념행사 준비 각분과 위원회의 위원장들을 사업운영이사로 정하였다. 따라서 운영위원회 회의시 제반 기념행사 준비사항을 점검하고 안건들을 의결하고 있으며, 각분과 위원회의 상호 협조체제를 구축하여 행사를 준비 중이다.
필자약력
한양대학교 요업공학과(공학사)
동경공업대학 무기재료공학전공(공학석사)
동경공업대학 무기재료공학전공(공학박사)
단국대학교 신소재공학과 교수(현재)
단국대학교 율곡기념도서관 관장 역임
한국세라믹학회 회장 역임
창립 50주년, 한국세라믹학회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한국세라믹학회 미래와 전망
편집부
한국세라믹학회 회원들은 한국세라믹학회의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한국세라믹학회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월간세라믹스 편집부는 이러한 질문을 ‘한국 세라믹학회의 미래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풀어나가기로 했다. 이를 위해 기업·연구소·대학교에 근무하는 한국세라믹학회 회원들에게 질문지를 보내 “현재 세라믹학회가 지닌 위상과 한계,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말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조사 결과 한국세라믹학회 회원들은 학회가 정기학술 발표회를 통해 연구 개발 및 기술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세라미스트 등과 정보 교류의 장을 마련해주는 등 세라미스트 커뮤니티 발전에 기여하는 바를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학회 개최, SCI 등재 등 학회의 국제적 위상 드높여야
그러나 학회 회원들은 세라믹이라는 틀에 안주하지 말고 미국 세라믹학회처럼 다양한 분야와의 통합을 통해 질적인 성장을 이뤄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회원들은 국제 학회와 SCI 등재 등을 통해 학회의 글로벌 위상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회의 정체성에 대한 재고(再考)가 필요하다’라는 의견을 보내준 회원도 있었다. 세라믹 학회의 고유 분야는 아직도 중요하며 발전되어야 하지만 연구 개발 단계의 다른 분야에서는 과감한 학회간의 벽들을 무너뜨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세라믹학회와 금속학회는 정기적으로 통합학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미국 재료학회(MRS)는 분야별 전문화를 통해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반도체·LCD·휴대폰·Solar Cell·Fuel Cell
다양한 분야·학문과 통합, 연계 필요
미국 재료학회처럼 연구 분야가 산업계, 학계로 골고루 포진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지금처럼 학계에 편중될 경우 산업계의 연구 분야와 다른 관계로 그 분야의 전문학회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연구 분야를 세라믹스에 한정하지 않고 반도체, LCD, 휴대폰, Solar Cell, Fuel Cell과 같이 여러 가지 기술과 융합시킬 수 있는 학회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대외 홍보활동 강화해야
학술 및 저술분야에 관심과 애정 필요
학회의 발전 방안으로는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꼽는 회원들이 많았다.
회원들은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대외 홍보활동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적극 피력했다. 산학연의 가교 역할을 강화할 수 있는 기구를 설립하고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이밖에 일부 학교 출신의 임원 독점 및 일부 신흥 학회에 위협 받고 있는 세라믹학회의 위상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날카로운 지적도 있었다.
또한 회원들은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는 것 못지않게 학회의 학술 및 저술 분야에 좀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양질의 저술활동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세라믹학회의 학술 매체가 질적·양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 때 세라믹학회가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창립 50주년, 한국세라믹학회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한국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기념행사
서강석 한국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기념행사 행사준비간사
한국세라믹학회(이하 학회로 칭함)가 종로구 서린동 대한요업총협회 건물에서 세라믹 및 이에 관련된 학문과 기술의 발전 및 보급에 기여함으로써 과학과 기술의 진흥에 이바지한다는 설립 목적으로 발족식을 가진지 올해로 50년이 되었다. 그동안 세라믹스 관련 산업계, 학계, 연구계 등에서 많은 분들이 학회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신 덕분에 창립 5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전통 있는 학회로 자리 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세라믹학회 창립50주년 기념행사(이하 기념행사로 칭함)는 세라믹 분야를 총체적으로 어울릴 수 있는 행사로 기획되었다. 대학, 연구기관, 기업체가 서로 어울릴 수 있는 한마당을 만들기 위하여 각 세대의 참여를 유도하고, 모두가 하나 되어 참여할 수 있는 부분으로 전체행사가 구성되었다.
구성 및 일정표
행사기간 : 2007년 11월 8일(목)~10일(금)
장소 : 양재동 aT Center
세부내용
1. 창립 50주년 기념행사
학회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자축행사로 정관계 및 학계, 산업계 인사들을 모시고 갖게 되는 행사이다. 기념식에서는 학회와 세라믹산업의 발전에 기여한 분들께 정부 포상을 수여할 예정이고, 세라미스트 날 선포식을 하여 세라미스트의 자긍심을 고양할 예정이다. 기념의 밤은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데 공헌하신 분들에게 학회차원의 공로패 전달식과 50주년을 자축하는 축하공연으로 구성된다. 또한 세라믹과 연관된 연구 및 교육을 하시는 여성분들의 단결을 위한 국제 여성세라미스트 워크숍을 ‘편견과 장벽을 넘어 : 공학계 여성의 잠재력 강화’ 라는 주제로 개최한다. ‘차세대 성장 동력산업 활성화를 위한 세라믹부품소재산업 육성방안’의 주제로 관계, 학계, 산업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부에 전책을 건의할 목적으로 정책포럼을 개최하며, 세라믹 전공 학부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전국 세라믹 관련 전공 학생 포스터 발표 경진대회를 개최한다.
2. 국제학술대회
금번 국제학술대회는 학회와 학회 고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산하에 설립된 부회가 중심이 되어 구성된다. 즉 각 부회가 매년 개최하는 심포지엄과 학회의 추계학술대회를 연합하여 국제학술대회 규모로 확대하여, 다양한 학회 구성 계층이 참여할 수 있는 마당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국제학술대회의 명칭에 걸맞게 9개국에서 35명의 해외 저명인사를 초빙하여 한국 세라믹스의 위상을 널리 홍보한다.
3. 세라믹스 전시회
지금까지의 산업전시회와는 다르게 세라믹스의 모든 분야를 홍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전시장은 세라믹과 연관된 대학, 연구기관, 산업체, 예술 분야를 전시하여, 세라믹의 다양성과 중요성을 홍보하는 자리로 구성된다. 기업관과 대학관은 ‘대중홍보’와 우수인재를 유치하는 방향으로 구성되며, 미래의 세라미스트들을 위해 세라믹과학체험관, 세라믹체험관이 전시되고, 기업들의 기술력을 홍보하는 자리로 기술세미나실을 설치한다.
홍보 및 재원 조달
행사의 성공요소는 행사준비, 홍보, 자금조달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사람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홍보수단이 요구되며, 일반적으로는 매스컴에 많이 의존하게 되는데, 본 행사는 불특정 다수인의 참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 세라믹과 연관된 분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 주된 홍보의 목적이기에 이 경우 가장 효과적인 홍보 수단은 입소문이다. 미래 세라미스트의 재원이 되는 청소년에 대한 홍보는 서울시 교육청에 협조를 받아내었고, 대학생의 참여는 전국 세라믹관련 전공 학생 포스터 발표 경진 대회의 참여 유도와 각 대학에 홍보책자, 포스터를 게시하는 것으로 대처할 예정이다. 문제는 세라믹과 연관된 부분에 종사하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유도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 일간지, 경제지, 전문잡지에 홍보내용을 게시할 예정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장 중요한 것은 학회와 산업계에 연관된 분들의 입소문이고 상호간의 참가 독려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회 회원 여러분과 학회와 연관된 분야에 종사하시는 분들의 도움이 절실히 요청된다.
현재 행사 재원은 학회 회원들의 특별회비와 기업체 후원금, 행사 수입금으로 조달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별회비와 행사 수입금은 전체 소요경비의 반 정도 밖에 되지 않으며, 결국은 기업체의 적극적인 후원이 필요한 실정이다. 각 기업은 현재의 경제상황을 위기로 보고 긴축재정을 펼치는 시점이다. 그리하여 후원금 납부에 소극적이게 되며, 이 시기에 행사를 너무 크게 벌리는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좀 더 넓게 생각하면 세라믹의 기초 위에서 기업 활동을 계속적으로 영위하려면 우수한 인재의 확보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며, 이는 관련 대학의 우수한 인재 학보가 우선되어야 한다. 즉, 세라믹의 위상이 높아야만 우수한 인재가 몰리고, 그 기반으로 기업의 발전 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86학번으로 필자가 대학 입학시 무기재료(요업)학과의 인기는 남부럽지 않을 때이며, 그로 인하여 우수한 인재가 많이 지원한 것으로 안다. 그 인기의 바탕에는 당시 매스컴의 역할과 세라믹과 연관된 기업이 대기업군에 많이 속해 있었다는 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현재는 대학의 학문간 융합 동향에 따라 대학의 신소재공학과는 화학공학, 금속공학, 세라믹공학이 연합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신소재 공학을 구성하는 상기 분야는 각자 고유의 영역을 확보하여 존재해야만 신소재 산업의 발전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 한축에 본 학회가 존재하며, 그것이 본 학회가 영속되어야 할 이유라고 판단된다. 학회가 창립 50주년의 일환으로 개최하는 이 다양한 행사들은 학회 고유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 영역의 확장을 노려 한 축으로서의 역할의 충실히 하려는 행동 일환으로 생각하고 기업체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와 후원을 요청하는 바이다.
행사 준비
본 행사는 학회에 소속되는 많은 분들이 시간을 내어 행사 준비에 참여하고 있으며, 매우 힘든 일이지만 학회의 발전을 위한다는 하나의 명제 아래 참여해 주시고 있다. 그분들께 매우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래 존함을 열거한다.
대회장 남기동
협력위원장 전병식, 강동석, 정무수, 김준일, 신재수, 오유근,
이재도, 김춘호, 윤국현, 유민열, 문주남, 오유인, 김영래
조직위원장 강원호 실행위원장 이홍림, 주기태, 김도연
추진위원장 고영신 대외협력위원장 김무경
총무 김창삼, 장호정
재정위원 박춘근, 구본급, 박원규, 박상엽, 정해문, 김기수, 김태현, 조남웅, 강승민, 이희수, 박신서
홍보위원 김응수, 이기성, 최지헌, 최헌진
50년사 편찬위원 최상흘, 송종택, 이홍림, 한상목, 임대순, 한경섭, 김철영
기념행사 준비위원 유상임, 임태영, 피재환, 정현석
국제학술대회 준비위원 윤석진
세라믹스전시회 준비위원 심광보, 강남기, 김형태, 윤종원, 좌용호
정책포럼 준비위원 박상엽
국제여성세라미스트워크숍 준비위원 황진명, 김영희, 한정화, 이종숙, 최정혜, 임형미, 김은경, 이연승
산·학·연·워크숍 준비위원 신재수, 이홍림.
전국세라믹관련 전공학생 포스터 발표 경진대회 준비위원 최승철
< 행사일정표는 월간세라믹스 2007년 10월호를 참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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