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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생활에서 돌아본 판유리시장의 변천사_김용신
  • 편집부
  • 등록 2020-09-03 12:15:17
  • 수정 2020-10-02 21: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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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현대생활과 세라믹건재(2)

현대생활에서 돌아본 판유리시장의 변천사

김용신_한국판유리창호협회 본부장


1. 대한민국 건설산업의 근, 현대사에 주역

국내 판유리산업은 한국전쟁 이후에 시멘트, 비료와 함께 3대 국책산업으로 대한민국의 근, 현대 발전사를 함께 해온 국가기간산업으로 성장해 왔다.
  건축산업 외 자동차산업, 인테리어산업 등 다양한 방면의 소재로 성장, 발전 해왔으며 최근에는 신성장 동력산업인 태양광발전사업, 디스플레이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등 국내 다양한 산업발전의 계기가 되고 있다.
  현재는 다양한 기술개발을 통해 세계적인 수준의 고기능을 갖춘 판유리가 제조되고 있다. 이번 기고에서는 주된 용도인 건축용 판유리에 대한 건축시장의 변천사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초기의 유리공업

본격적으로 유리제품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76년 문호개방 이후이며, 서울, 부산, 인천등지에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이 창유리를 들여와 집을 짓기 시작하였고, 거울이나 유리병 등도 수입되기 시작하였다. 명동성당에 유리창이 끼워져 세인을 놀라게 한 것은 1898년의 일이었다. 이 당시 우리나라에서의 유리는 가내수공업형태로 제조된 것으로 보이나, 1900년대에 들어 유리병 수요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수입에 의존하던 유리를 직접 제조해야겠다는 근대화된 유리공업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욕구에 의해 1902년 러시아의 기술을 도입하여 국립유리 제조소를 설립하여 1903년 유리병을 제조할 수 있었으며, 이후 1909년 서대문근처에 설립한 경성초자제조소는 유리병과 외피유리를 만들었으나 일본인들의 자본력과 기술을 당할 수 없어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그 후 우리나라 유리공업은 일본인에 의하여 전담되다시피 했는데, 이때까지의 유리공업은 모두 도가니가마에 의한 수동식 제조시설로 된 소규모의 공장이었다. 1939년 서울 영등포에 제2일본초자주식회사가 가마용융로를 건설하고 근대식 자동제병시설을 생산하였는데, 1일 64,000개의 맥주병 생산으로 당시로는 큰 공장이었다.
  해방직전에는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에너지원인 석탄의 공급난이 가중되어 거의 운휴상태였으며 해방 후에도 자재, 기술부족으로 재가동을 하지 못하고, 1948년에 상호를 동양유리공업주식회사로 개칭하고 운영되다가 1967년 말경 소멸될 때까지 여러 종류의 용기들을 생산하였다.
  해방을 전후하여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는 소규모의 도가니가마공장이 설립과 소멸을 거듭하여왔으나 기술과 원자재 부족으로 파유리의 재생에 주력하면서 점차 원료배합에 의한 신제품개발에 노력하였다.

 

3. 판유리 공장의 설립과 유리공업의 근대화

당시 대부분의 유리제품은 수입일변도였고 6.25동란에 의한 폐허에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하여, 정부는 판유리, 시멘트, 비료산업을 우선건설산업으로 책정하고 인천에 판유리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계획은 국제연합기구인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원조에 의해 진행되었고, 1956년 2월 인천 만석동에서 인천판유리공장 기공식을 가지고, 20개월 만인 1957년 9월 30일에 준공을 보게 되었으며 제조방식은 풀콜(Fourcault)식으로 생산능력은 연간 약 6,000톤 이었다.

그림 1. 인천판유리공장의 전경(1957)

 

----------이하 생략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세라믹코리아 20208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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