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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도예 공모전의 문제점
  • 편집부
  • 등록 2003-11-24 23: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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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숙경 미술평론가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깊은 산속에서 그렇게 깨끗하고 맑은 물줄기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지나고, 도시를 지나면서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물로 변한다는 사실에 모두가 무심하다. 아니 당연하게 여긴다. 내 이속을 챙길 일이라면 틈만 나도 비집고 들어서지만, 공공의 일이라면 그와 정반대의 태도를 취한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 안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평등한 시민으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민주 시민이어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나눔이 없는 사회,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기득권자는 한없이 욕심을 부리고, 힘없는 자는 한없이 봉사하며 부림을 당해야 한다. 성실하게 일하고 또박또박 세금을 내도 별다른 희망이 없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어떻게 해도 별 수 없다는 기정화 된 사실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개인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 구조가 공모전과 무슨 상관이냐고 하겠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공모전도 하나의 제도인지라, 사회 구조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며 동시에 사회 구조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회에서 건강한 공모전이 행해지고, 이를 바탕으로 자유로운 창작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수많은 공모전이 있지만, 과연 왜 그러한 공모전이 열리는지, 누가 심사하고, 어떤 기준에 의하여 수상자가 선정되는지, 얼마만큼의 주관과객관이 작용하는지 궁금할 것도 없고, 궁금해 해서도 안된다는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의 환경은 참으로 그와 다른 방향을 향해 있다. 공모전이란, 한 분야에 발을 디디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장이다. 공모전을 통해서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 제시되기도 하고, 자신감을 얻어 더 많은 일을 해 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공모전이란 나름의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 위력이 어떻게 발휘되고 있는지 되짚어볼 일이다. 어떤 취지로 어떻게 전개되는지 꼼꼼히 챙겨서 도예의 발전에 어떻게 이바지 하고 있는지 챙겨보자는 말이다. 목적이 뚜렷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는 말할 수 없이 크다. 또 한가지, 누가 심사하고, 그 심사위원은 어떻게 선정되며 어떤 방법으로 수상자가 결정되는지 이야기해야 한다. 혹시 가진 자의 횡포는 아닌지, 권력의 무게는 아닌지 반성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질적 병폐인 학연과 지연의 연결고리가 정말로 배제된 것인지 의심해 보자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것들의 테두리 안에 있다면 공모전은 희망의 장이 아니라 낙담의 장이며 보나마나 한 연극에 불과하다. 이것은 이미 매년 치러지는 ‘국군의 날’이나 ‘스승의 날’과 같은 하나의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공모전의 효과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어떤 공모전에 참가해서 어떤 상을 받았는지가 한 개인의 경력 쌓기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그것을 바탕으로 좀 더 큰 시야를 가질 수 있는 발판이 되는지 따져 보자는 것이다. 수상자에게 좀 더 나은 창작 환경을 약속해 주는 공모전은 몇이나 되는지 검토해 본다는 것은 곧 공모전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도예처럼 어려운 작업 환경 속에서 활동의 장을 열어 준다는 것은 도예가로 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크나큰 선물이 될 것이다. 그건 단순히 몇 번의 전시를 약속한다거나, 몇 개의 작품 매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시를 열기 위해서 지워지는 경제적 부담감 덜기와 몇 번의 거래로 막을 내리는 관계가 아닌, 꾸준히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 서로의 입장을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일정 계약 기간을 두어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소득이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사회활동의 제약을 받는다. 즉 차별 받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 머리에 언급한 바와 같이 불합리한 사회 구조는 일부 계층을 위한 봉사의 구조이다. 열심히 해도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 불평등의 관계는 일치감치 정해진다. 첫째는 출신학교, 둘째는 경제력인데 어느 것이 우선시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두 조건이 모두 충당된다면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이다. 물론 둘 중 하나라도 조건이 충족된다면 어느 정도의 성공은 약속된 셈이다. 그러나 이 두 조건에 속하지 않는 테두리 밖의 사람들은 내내 박탈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 이 얼마나 우스운 꼴인가?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공공연히 지금도 실행되고 있다. 과연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일까? 공모전은 어쩌면 이러한 관행을 깰 수 있는 하나의 마지막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봤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모전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 위의 두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 대다수의 집단이 힘을 모아 아주 투명하고 객관성 있는 공모전을 만들어 그 파급효과까지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은 더 나아가 하나의 사회 운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심사 방법의 과감한 개혁도 필요하다. 이 공모전의 심사위원이나 저 공모전의 심사위원이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보니 별 다른 특색도 없고, 신임도 없다. 심사 위원에 전문가뿐만이 아니라 관객까지 포함시킨다면 어떨까? 공모작들을 전시장에 모아 전시하고, 이 곳을 다녀간 관객은 나름의 점수를 주어 전시 기간이 끝난 후 모두 모아 전문가와 관객의 백분율을 조정하고 나누어 수상자를 결정짓는다면 관객을 끌어 들인 이벤트로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경제적인면 역시 관객을 참여시켜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공모전에 당선 된 후의 일이다. 공모전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는데, 끝나고 보니 별 것 아니라는 허탈감은 주지 말아야 도예가들이 육성된다. 생활도예를 예로 든다면 일정 기간 동안은 유통을 책임진다거나,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연구비를 지원한다거나 등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단기간의 계약으로 끝나면 안 된다. 장기적인 안목과 계획만이 질을 향상시킬 수 있고, 진정한 도예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천이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한 개인에 의해서나 한 화랑에 의해서 또는 협회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예는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공예라는 출발점을 생각하며, 대중을 끌어 들일 수 있을 때 열매를 거두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인 여건을 생각한다면 더욱 더 그러하다. 작은 것이 모여서 큰 힘이 되는 것이니까. 얼마 전 테레사 수녀의 시복식이 있었다. 어울리는 말일지 모르지만, ‘부자와 가난은 서로를 구제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수녀님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누리는 자는 누군가 나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편 나누기나, 세 부풀리기 같은 후진적인 일들은 금새 사라질 것이다. 필자약력 서울여자대학교 공예과 졸업 파리Ⅷ대학서 ‘칸딘스키와 추상화’ 석사학위 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비평 부분 당선 동국대, 서울여대 등 강의 한원미술관 관장 역임 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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