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전문 갤러리의 필요성
도자전문 갤러리 운영에 대한 제언
글+사진 성혜영 _ 독립큐레이터
필자약력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영국 런던 시티대학교 예술행정대학원 박물관 경영학 전공
전 크래프트 스페이스 목금토 기획이사
전 국민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강사
<박물관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자
도자전문 갤러리, 왜 필요한가?
국민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탄생한 근대적 의미의 박물관으로부터 오늘날까지 발전의 궤적을 더듬어 볼 때, 전문 박물관 혹은 특수 박물관으로 분화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일부 권력층이 대대로 소장한 진품 명품에, 제국주의가 확장됨에 따라 전 세계를 무대로 수집된 ‘신기한 잡동사니’들이 모두 하나의 박물관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초창기의 종합박물관들은 이후 그 자체가 거대한 문화제국으로 팽창하였다. 대영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 워싱턴의 스미소니언박물관 등이 좋은 예다.
그러나 인간의 유골로부터 최첨단의 발명품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는’ 이들 인류 문명의 거대 집합소는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불가피하였다. 소장품의 양적 팽창도 문제였지만, 동물 뼈와 회화, 각종 암석과 고전 도자기, 거대 석상과 정밀한 수공예품들이 함께 있는 박물관은 그 어느 것에게도 최상의 환경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전후하여 시작된 박물관의 분관과 전문 박물관의 등장은 이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진화였다. 예를 들면 대영박물관이 모태가 되어 자연사 박물관, 과학박물관 등으로 분관한 것을 시발점으로 내셔널 갤러리, 빅토리아 앤 알버트 장식미술박물관 등 미술관련 박물관이 생겨나고, 이후 시대의 요청에 따라 현대 미술관 및 특별한 주제의 박물관들이 보태어지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발전의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미술박물관(Museum of Art, 이하 미술관)은 다시 회화, 도자기, 디자인, 조각 등으로 세분되어 내셔널 갤러리, 도자기 박물관, 디자인 박물관, 조각박물관 등의 전문미술관으로 독립한 것 또한 당연한 귀결이다. 이와 같이 종합 박물관으로부터 미술관으로, 다시 미술관에서 특정 장르의 미술관, 혹은 갤러리로 전문화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 진화의 과정과 함께 점차 박물관은 단순한 보물창고로부터 사회적 봉사 기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져 갔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갤러리’는 옛 ‘회화 갤러리’에서 유래된 것으로 주로 귀족들이 회화작품들을 소장하고 전시하던 회랑식 공간을 말하는데, 여러 나라에서 이 전례를 따라 회화 전문 미술관을 ‘갤러리’라 부르게 되었다. (예: 내셔널 갤러리) 그러나 오늘날 ‘갤러리’는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곳’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미술관이라는 말과 혼용되고 있다. 다만 수집과 소장품의 관리, 그리고 상설 전시에 중점이 두어지는 미술관과는 약간 구별하여, 현대 미술활동의 결과인 새로운 작품의 전시와, 나아가서는 그 작품의 판매를 통한 영리성의 추구에 중점을 두는 공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훌륭한 도자 전통이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박물관과 미술 분야에서 도자기가 차지하는 독보적 비중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최근 박물관의 양적 질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에 걸 맞는 국가적 차원의 훌륭한 도자기 박물관이 없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1999년, 손꼽히는 한국 도자기 컬렉션으로 주목받던 재일교포 수집가 고 이병창李秉昌 선생의 주옥같은 소장품이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 오사카의 동양도자박물관에 기증되어 국내의 많은 도자기 애호가들을 애석하게 하였다. 물론 일본 사회 내에서 재일교포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그 위상을 높이려는 선생의 숭고한 뜻이 전제되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사카 동양도자박물관만큼 전문적인 훌륭한 시설이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합리적인 결정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해강도자박물관이나 호림박물관 등 몇몇의 사설 비영리기관이 그나마 도자기 전문 박물관의 명색을 유지하고 있는데 반해, 도자 전문 갤러리의 사정은 더 열악하다. 현재 엄밀한 의미에서의 도자 전문 갤러리가 거의 없는 것은 소장품(혹은 작품)의 질이나 전시의 문제라기보다는 미술 시장의 구조와 갤러리 운영 등 외적인 요인에 기인한다. 대체로 수지 타산을 맞추어야 하는 상업갤러리의 경우 도자기만을 대상으로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를 도자기 수요층의 빈곤 문제라고 지적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그 수요와 공급을 매개하는 제도적 장치의 결함이다. 이는 미술 애호가는 많지만 미술시장은 불황인 우리나라 미술계의 딜레마와도 같은 맥락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곧 도자기를 즐기고 사려는 사람들과 도자기를 만들고 파는 사람 사이의 소통의 부재가 그 원인이다. 도자 작가와 일반 애호가들이 만나서 교류할 수 있는 확률은 광장과 같이 경계가 없는 넓은 미술시장이 아니라 작은 규모라 하더라도 특정하게 제한된 공간에서 훨씬 높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바로 여기가 도자전문 갤러리의 필요성과 그 역할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지점이다.
도자 전시는 도자전문 갤러리에서…
재료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현대 미술에서
‘도자’를 규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도자전문 갤러리가 다루는 미술의 범위 또한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일상 용기일 수도 있고 조각이나 오브제 등 순수 예술품일 수도 있고, 장신구이거나, 타일 등 장식용 건축 재료일 수도 있다. 온도와 습도, 실내 공기의 오염 방지, 방충과 같은 기본 환경을 논외로 하면 대상 작품이 ‘흙을 빚어 구워낸 것’이라는 공통점에 근거해 수집과 전시, 보존 등에 요구되는 작업이 여타 갤러리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 한다. 애초에 설계단계부터 그 주요 소장품과 전시 대상 작품들이 무엇이냐를 고려하여 지어진 건물purpose-built building이라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작품 선정과 전시 컨셉의 수립, 나아가 전시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그때그때 최적의 전시 환경을 위해 도자 특유의 전문성이 끊임없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조명의 경우, 밝기의 조절은 물론이고 천편일률적인 하향식 조명 대신에 바닥 조명이나 스폿 조명이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디스플레이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회화와 같은 평면 작품에 비하여 공간적 배치가 특히 중요하고, 전시대를 사용하는 경우 그 재료와 크기의 적합성을 따져야 할 것이다. 전시대에 작품을 고정시키는 방법으로 접착제나 모형 틀을 사용한다면, 특히 도자기에 손상을 입히거나 기공을 막을 위험성은 배제해야 한다. 벽면 부착용 고정 장치는 부식이 쉬운 쇠붙이를 쓰지 말아야 하고, 작품의 접합 부분이나 충전된 부분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무게의 분산에 신경을 써야 하며, 쉽게 간과되지만 작품의 포장이나 운반에도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오늘날 많은 갤러리들은 고객보다는 작가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형편이다. 갤러리는 고객의 입장에서 고려해야 할 점들이 있다. 갤러리가 엄숙한 학교가 아닌 이상 효율적인 동선을 준비해야 하고 휴게시설 등 편의성에도 역점을 두어야 한다. 파손 위험에 대비한 예방 조처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단순히 눈으로만 감상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손대지 마시요’를 극복할 특별 코너를 마련해야 한다. 쓰임을 전제로 하는 일상 용기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만 양감이나 텍스추어를 촉감으로 즐기고 싶은 애호가를 위한 이른바 핸즈 온Hands-on 코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도자를 전공한 전문 연구원이나 자원봉사자를 활용한다면 갤러리 운영의 측면에서도 고객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도 생산적이다.
상상과 현실사이 - 도자전문 갤러리를 위한 몇 가지 생각들
도자로 명명되는 작품의 다양함만큼이나 바람직한 도자 갤러리의 모습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일찍이 앙드레 말로가 ‘상상의 박물관’을 통해 ‘벽이 무너진’ 오늘날의 박물관의 의미를 재천명하였듯이- 원제 “Mus럆 Imaginaire”는 영어로는 “Museum without Walls”로 번역된 바 있다 - 사실상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박물관 / 미술관 / 갤러리의 전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곳에서도 어떤 형태로도 갤러리는 존재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갤러리 공간은 새로운 개념으로 끊임없이 창조될 수 있다는 뜻이다. 비어 있는 갤러리, 이른바 ‘화이트 큐브’ 그 자체는 더 이상 갤러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체육관이 될 수도 있고, 빵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상의 가치가 그 주제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힘으로 증명되듯이, ‘돌멩이가 말을 하고, 풀이 노래하게’하는 것은 전시로 구성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주어진 공간에서 어떤 말, 어떤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는가는 곧 갤러리 운영자의 몫이다.
가령 공간의 협소함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마련된 러시아의 ‘그림 한 점 갤러리One-Picture Gallery’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듯이, ‘도자기 한 점 갤러리One-Piece Gallery’도 단 한점의 작품을 통해 도자기의 모든 것에 접근할 수 있는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서구에서는 이미 조각과 가구를 중심으로 ‘갤러리 아파트Museum-Flat’의 성공사례가 소개된 바 있는데, 일상적으로 도자기를 사용하는 우리네 집과 아파트 또한 전시에 이용될 수 있는 살아있는 공간이다. 사이버 갤러리를 병행한다든지 관련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는 도서관이나 자료실 등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유용한 대안 갤러리들이다. 공간이나 재정적 제약을 받고 있는 작은 도자 전문 갤러리들의 경우 서로 연계하여 큰 프로젝트를 분담한다면 하나의 거대 갤러리가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훨씬 뛰어넘어 의미 있는 문화운동으로까지 확장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갤러리에서 도자기만을 대상으로 하는 소규모의 옥션을 운영하는 것도 관심유발과 고객 확보의 차원에서 시도해 볼만한 전략이다. 특히 소비자의 취향이 작품의 가격 결정에, 나아가서는 작품 제작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자시장의 활성화를 위한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예술이 시장의 논리에 지나치게 휘둘리지 않도록 어느 정도의 경계는 필요하지만, 고객이 없는 나 홀로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시장 없는 예술도 존재할 수가 없다.
요컨대 한낱 흙덩이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은 일차적으로 작가이지만,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향유될 때에만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할 때, 도자전문 갤러리의 교량적 역할은 더욱 중요하고 절실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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