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흥 <heart in heart Ⅱ>전
2006.6.17 - 2006.6.27 갤러리 미소
새로운 발상과
표현의 자유
글 박신영 _ 갤러리 미소 큐레이터
이태흥은 미국 The University of toledo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Edinboro Univercity of Pennsylvania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펜실베니아 주립대 도예과 강사를 거쳐 현재 남서울대와 강남대에 출강중이며 미국과 대만, 서울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어떤 계기로 도예로 전공을 바꾸게 되셨어요?” 도예가 이태흥의 독특한 이력을 알게 된 후 가장 먼저 떠오른 궁금증이다. “흙이라는 재료를 접해 본다면 누구나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겁니다. 흙은 정말 한계가 없거든요” 대답하는 그의 눈엔 남다른 열정과 의욕이 가득하다.
체육학도로서 유학길에 올라 우연한 기회에 흙이라는 재료에 매료되었고 이를 계기로 전공을 바꾸어 도예가로서의 길을 걸어 온지 10여년이 지났다. 남다른 그의 이력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도예가 이태흥의 작품들은 틀에 매이지 않은 신선한 감각을 바탕으로 한 도전적인 변화가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여덟 번째 개인전이 되는 이번 전시는 그동안 보여 왔던 현대인의 초상을 담은 영웅 만들기라는 주제의 인체 조형작업과는 사뭇 다르다. 전시장엔 오밀조밀 유쾌하고 다양한 하트heart들이 감각적으로 펼쳐져 있다. 타조털로 모서리 부분을 감싸놓은 색색의 도벽들은 유약의 실험을 통한 자연발생적인 색감의 변화로 크고 작은 하트를 그려놓았다. 흙이라는 다소 차가운 물성과 동물의 털이 가지는 따뜻한 물성의 유니크unique한 조화는 형식적인 고정관념을 가볍게 비웃기라도 하듯 기막히게 어우러진다. 또한 기능성을 가지고 있으나 기능성 자체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은 합과 컵들은 개성 있는 조형미와 섬세한 회화적 표현들이 기발한 모습들이다.
형식과 틀에 매여있지 않아서일까 도예가 이태흥의 작품들은 자유롭고 신선하다. 물레를 사용하는 작품마저도 투박한 손맛의 느낌이 묻어나 흙이라는 재료가 가지는 유연함을 더욱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형태적 측면에서도 작가는 구도의 안정감이나 실용성보다는 새로운 발상과 표현의 자유에 좀 더 큰 비중을 둔다. 그런 이유로 도자가 가지는 기술적인 한계성은 그에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그에게 흙이라는 재료는 하얀 캔버스만큼이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매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갈망하고 사랑을 꿈꾸며 사람과 더불어 살아간다. 이태흥의 하트는 이러한 인간의 삶을 그대로 닮아있다. 그는 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흙을 통해 세상과 대화하고 흙을 통해 세상의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늘 새로운 아이디어로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이렇듯 흙 안에서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의 온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그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석창원 도예전 <자화상Self Portrait>
2006.7.11 - 2006.7.20 청주 한국공예관 3F
심안心眼의 관찰
글 홍성희 _ (재)세계도자기엑스포 도자연구지원센터 연구원
가끔 일이 하기 싫거나 누군가를 한참이나 기다리게 될 때 디카나 핸드폰으로 셀프카메라 놀이를 하다보면 문득 작고 네모난 액정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평소 내가 기억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어서 일까? 아니면 적날하게 감추고 싶은 곳까지 보인 내 모습이 싫어서 일까?
물론 조명, 각도, 방향에 따라 만족스럽게도 만족스럽지 못하게도 나오는 것이 사진이긴 하지만 내가 봐오던 각도가 아닌 익숙하지 않은 시선을 통해 보는 사진을 마주할 때면 직각프레임 속의 나는 나이면서도 내가 아니다.
많은 작가들이 자화상을 그렸다. 초상화는 남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행위이지만 자화상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행위이다. 내 눈을 꺼내어 자신을 보도록 만들 수 없기에 인간은 심안心眼이라는 무형의 도구를 만들어 냈다. 마음속의 눈은 거울이나 사진처럼 사물의 진위眞僞를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결국 심안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행위는 내가 내 식으로 해석하고 재현하는 가짜가 전제된 행위다. 결국 나를 내가 바라보되 내가 바라보고 싶은 것과 내가 되고 싶은 것만을 표현하는 가장 주관적인 장르가 자화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화상이 우리에게 매력적인 이유는 육안肉眼으로 볼 수 없는 작가 안의 또 다른 자아를 타인에게 고백하는 행위임과 동시에 관람자의 훔쳐보기 욕구를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석창원의 자화상 안에는 자기연민과 자기탐구적인 열망이 있다. 타인의 눈과 자신의 눈 사이에서 발생하는 ‘석창원’이라는 대상의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고 설득시키려는 작가의 강한 의지가 도자기 표면 위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맹목적인 자기연민 뿐 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경멸과 불화를 담은 채 세상과 자신을 향한 가장 슬픈 눈을 가진 자로 자신을 묘사한다. 그래서 자화상 속의 그의 눈은 슬프고 차갑다.
입술은 평온하게 가라앉다가도 문득 들끓고, 웃다가 다시 분노하고, 상처받는가 하면 곧 냉소하는 내면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아예 굳게 다물고 만다.
감추어야 할 혹은 차마 꺼내놓지 못하는 모습과 상황들을
감시하듯 경계의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그는 언젠가 자신이 처한 이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줄 희망적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해 두었다. 선명하다 못해 선연하기 까지 한 노란색 나비, ‘불현듯 날아든 희망의 존재’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 나비는 작은 빗방울에 조차 곤두박질치거나 금새 날아가 버릴 지도 모를 불완전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 아름다운 장치는 역설적으로 작가의 모습을 더 빛바래고 그로테스크해 보이도록 만듬으로서 내안에 갇혀 있는 나를 해방시키기 위한 작가의 오랜 인간적 고뇌를 강조한다. 또한 현재 작가 자신이 내가 어디서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막막한 자조적 물음에 봉착해 있음도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그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벌거벗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아니다. 옷도 입고 머리카락도 생기면서 좀더 현실 속의 모습으로 동화하고 적응해가려 한다.
심안을 통해 때로는 유약한 인간처럼 때로는 악인처럼 관찰하는 작가의 자기관조는 앞으로 심경과 상황이 변화할수록 더욱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다. 앞으로 그가 또 다른 방식의 자기 주관을 찾아가는 일련 과정들이 진행되는 동안 그 과정의 결과물이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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