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쥬러와
그녀의 작품에 투영된
두 가지 메시지
글+사진 전신연 _ 도예가
낸시 쥬러Nancy Jurs와 그녀의 남편 웬들 카슬Wendell Castle이 최근 미국 타우슨 대학교 안에 있는 센터 포 더 아트 갤러리에서 2인전을 가졌다. 이 전시는 미술사 교수이자 델라웨어 아트센터Delaware Center for the Art와 이 갤러리의 큐레이터인 수잔 아이잭Susan Issac 박사에 의해 지난 4월 이루어졌다. 필자는 미국의 가장 대중적인 도예 잡지인 Ceramics Monthly 1월호에 실린 그녀의 기사를 읽어 보았기 때문에 작품세계는 어떤지 교육배경은 어땠는지 등을 미리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 기사에는 1995년에 완성하여 설치한 로체스터 국제공항에 있는 5미터가 넘는 거대한 도자 조소(조각) 작품 「Triad」가 최근 그녀의 작업과정과 더불어서 소개되어 있었다.(사진 1) 그녀의 남편 웬들 카슬은 목조각가로, 예술적인 가구 디자이너로 또한 Rochester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로써 학생들을 지도하는 미술계에 이미 잘 알려진 작가이다.
오프닝 리셉션이 있기 전 날 필자는 낸시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필자는 이제까지 도예가 중에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 했던 페미니스트 운동가 같은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작품에 대해, 그녀가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수록 필자가 받았던 그녀에 대한 첫인상이 이해가 됐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성 미술인으로서 격동기의 온갖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사회 속에서 예술가로서의 역할 등에 대해 고민하면서 작품을 제작해 왔다고 한다. 오랜 시간을 통해 그녀가 갖게 된 생각 중 하나는 전통적으로 여성 아티스트들이 남성 아티스트들에 비해 덜 중요하게 미술세계에서 취급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외에도 도자예술이 같은 공예분야에서도 유리, 보석, 금속 공예 등에 비해 수준 낮게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 예로 그녀는 여자와 동물이 남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
사냥꾼들과 인간들에 의해 함부로 다루어지는 문제에 대해 그녀의 작품을 보여주면서 설명해 나갔다. 작가를 직접 만나기 전에 본 그녀의 작품에 대한 필자의 느낌과 전혀 다른 그녀의 의도에 약간은 당혹스러웠다. 독특한 배치 형태와 니트로젠과 토치에 의해 가마 번조 이후 처리된 미묘한 금속성의 초록과 자주색이 조화로운 커다란 사이즈의 갑옷 시리즈, 그리고 갤러리 벽에다 설치하기조차 힘들 것 같은 큰 벽걸이 시리즈 작품 등은 관객을 압도하는 듯했다. 작품의 겉모양만 보아서는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아티스트의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그녀의 설명으로 필자는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설명을 듣고서야 세태를 반영하는 작가의 사상과 감정에 대해서 좀 더 잘 알 수 있었다.
낸시는 자신의 작품은 다른 어떤 작가들에게서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녀 스스로가 의미를 두고 있는 것들로부터 나온다고 단언했다. 그녀가 반 세기 동안 살면서 느껴오고 겪었던 두 가지 큰 이슈 중 첫 번째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 특히 남성과 여성아티스트들이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측면이고, 두 번째 주장은 세상의 약자 즉 강자 중심의 사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존재들, 예를 들면 제3세계 국가의 여성들, 인간들에게 학대받는 동물들 등이 받아야 마땅할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위의 두 가지 낸시가 피력하는 이슈의 실례와 그 생각들이 어떻게 그녀의 작품들에 투영되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강조하면서 역설했던 것은 “남성, 여성 작가들이 똑같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 예로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낸시 쥬러Nancy Jurs라는 이름을 쓰는 대신에 N.C. Jurs라고 썼다 한다. 왜냐하면, 관객들이 그녀가 풀 네임을 썼을 경우에 심각하게 작업하는 작가가 아닌 그냥 덜 프로페셔널한 여성 아티스트의 한 사람으로 취급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한다. 낸시는 필자에게 ‘여성 아티스트라는 말은 사용하면서, 같은 아티스트인데 왜 사람들이 남성 아티스트라고는 부르지 않는가? 왜 우리들은 둘다 그냥 의사들처럼 아티스트라고 불리지 않는가? 덧붙여, 여성작가임을 내세운 전시회는 자주 있는데, 남성 작가 전시회라는 제목은 왜 없는가?’ 등의 질문을 했다. 생각해보니 ‘남성 미술전’이라는 말은 아주 생소한 단어였다.
낸시는 또한 갤러리 큐레이터들이 여성 아티스트들을 지원하기를 꺼려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남성 작가들에 비해 열심히 하지 않고, 어떤 이유인지 작업을 쉽게 중단 한다는 인식을 많은 큐레이터들이 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실례로 지금의 뉴욕 갤러리 아트 마켓에서 여성 작가가 작품을 팔아서 돈을 벌기가 어렵다고 하며, 대부분의 최고급 갤러리 전속 작가들 중 75% 정도가 남성, 그 나머지가 여성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남성 아티스트들이 여성 아티스트들보다 더 실력이 뛰어나고, 더 좋은 작품을 생산해낼 수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라고 단언했다. 게다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더 아름다울 수 있어도 작품을 구입하는 콜렉터들 또한 작품의 질은 떨어져도 잡지나, 책들에 더 이름이 알려진 남성 작가의 작품을 선택한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러한 환경은 남성작가들에게 더 많은 조건과 기회를 제공하고, 그녀 개인적으로도 남편 웬들은 그녀보다도 긴 작가 약력과 대여섯 명의 작업 보조원들이 있어서 작품 생산 면에서나 판매에 있어서 그녀보다 훨신 낫다고 덧붙였다. 이 말을 들으면서 필자는 약간의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항상 필자는 예술은 작가의 명성이나 성별, 나이 국적을 불문하고 작품으로써 평가 되어야만 한다고 믿어왔고, 실제로 남녀의 차이 때문에 차별을 받았다는 생각을 아직까지는 별로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낸시가 살아왔던 시대와 현재의 분위기는 좀 다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서 그녀가 이야기한 것은 세라믹이라는 분야가 그리 존경 받는 분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유리, 나무, 금속, 장신구 등은 가격이 상당히 높게 책정되는 반면 세라믹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한 예로써, 낸시가 어떤 갤러리를 방문하여 그녀의 작품을 전시하고 싶다고 했을 때, 그녀가 세라믹 조각를 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갤러리 사람들은 “우리는 공예는 취급하지 않아요”라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그녀가 하는 작업은 흙으로 모양을 만들고 자르고 파고해서 가마에 번조한 커다란 조각 작품인데도 대부분의 갤러리 사람들은 흙이란 말을 들으면 공예로서의 도예pottery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차라리 “나는 조각 작품을 만들어요”라거나 조각가라고 소개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덧붙여서 대부분의 전통적인 아트 갤러리들은 세라믹 조각 작품을 페인팅이나 조각처럼 순수 미술의 영역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필자는 낸시와 의견을 조금 달리했다. 워싱턴디시의 국립 스미소니언 조각 갤러리에서 본 18세기 19세기의 아름다운 테라코타 머리와 반신상들은 조소 작품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특히 같은 장소에서 본 로댕과 드가의 테라코타 머리상들에게서 받은 필자의 느낌은 그 어떤 브론즈 조각상보다도 감동적이었다.
그녀의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녀의 작업은 그녀의
생각, 생활 주변에서 겪은 일들, 가족과 그 모임들을 소재로 하는 자서전적인 성격을 지닌다. 전시된 작품 중에는 갤러리 한 쪽 벽을 장식하고 있던 각기 일곱 개의 분리된 단순화된 형태의 비슷한 사이즈의 세라믹 오브제가 있었는데, 사람들과 동물들의 형상을 단순화하고 벽걸이 작품화해, 「Simple Truth」이라 명명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 작품을 가리키면서, “저기엔 나무와 티컵, 강아지, 물고기 등 각기 분리된 생명체들이 있는데 모두 다 비슷하다 그리고 봐라 다 동등하다”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인종, 나라 등에 의해 유무형의 차별이 존재하는 불평등한 세상에서 그녀는 작품을 통해 평등을 부르짖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관객들이 낸시의 전시된 거의 모든 작품에서 작가가 의도한 뜻을 작품에서 읽어내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녀에게 물어보지 않는 한. (사진 2)
그녀의 또 하나의 이슈는 “약자의 보호Protection”였는데, 위에서 평등을 작품을 통해서 표현했듯이 갑옷시리즈를 통해서 이 주제를 표현했다고 한다. 갑옷 시리즈는 그녀가 어릴적 부터 책과 박물관에서 보았던 갑옷들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했다.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그녀가 가장 즐겨하던 일은 갑옷들이 전시된 방에 머무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그것들의 금속성의 아름다움에 심취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비극적인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 발발 이후 그녀는 동아시아 지역사회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는 여성들의 모습을 텔레비전과 라디오 등을 통해 목격하고서 보호를 상징하는 갑옷들이 그 지역의 여성들에게도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따라서 작품의 갑옷은 전투를 위한 갑옷이라기보다는 착용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혹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에 의해서 보호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그녀의 이러한 언급은 진시왕릉에 같이 부장되었던 수많은 병사들이 모두 시황제의 보호를 위해서 제작되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좋아하는 갑옷 형상들을 함께 모아서 둥근 원의 형태로 전시하고, 「전설Legacy」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여러 개의 갑옷들의 군상을 통해 그녀의 메시지인 평화를 나타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이 작품 한 가운데에 서서, 높은 받침대 위에 올려진 커다란 그녀의 갑옷 조각들로부터 느꼈던 위협적인 느낌은 이 작가가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어서 무척 역설적으로 생각되었다. (사진 3~7)
또 다른 작품인 「Safe at Last」에서는 다섯 개 동물의 단순화된 머리와 두 개의 펜싱 투구를 벽에 전시하였는데, 인간에 대해 혹사당하고 희생당하는 동물들과 보호를 상징하는 투구를 같이 전시하여 그들을 더 이상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보이려했다 한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동물과 인간, 남자와 여자 등 모든 생명체가 다 평등하게 대접받아야 하고, 나는 그러한 평등에 기초한 평화스러운 세계를 꿈꾼다”라고 이야기했다. (사진 8)
그녀의 작업 성향을 살펴보면 그녀는 한 가지 아이디어가 마치 바다 멀리서 천천히 해변으로 밀려오는 파도와 같이 다가오면 그것에 심취해서 한동안 작업에 빠진다고 한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처음의 아이디어는 파도가 물러나듯이 떠나갔다가 이후에 다시 더 큰 파도가 되어서 더 많은 아이디어와 함께 밀려오고, 그러면 다시 흥분해서 새로이 작업에 임하곤 한다고 한다. 이러한 주기는 몇 주 혹은 몇 달이 계속되기도 하고, 그때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몰두해서 작업한다고 한다. 이번 전시의 갑옷 시리즈는 횟수로 이년 동안 집중해서 작업에 임했던 소산이라고 했다.
그녀 작품의 영감은 대부분 세상에 대한 그녀의 반응과 감정에서 나오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그녀의 삶의 목적은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자신이 일조하는 것에 있다고 했다. 어떤 형태로든 그녀가 있었기에, 혹은 그녀의 작품으로 인해서 이 세상이 아주 약간이라도 좋아질 수 있다면 그녀의 삶은 성공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글을 쓰면서 필자가 느낀 점은 어떤 의미를 작가가 그의 작품을 통해 전달하는 방식이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작가가 아무리 훌륭한 의미를 작품에 투영한다 해도 어떤 경우에는 직접적인 설명이 없는 한 보는 사람이 그것을 공감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더우기 그 작품이 별도의 전시장에 있거나 콜렉터에게 넘어간 이후에는 그 해석이 전적으로 보는 관객에게 달려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원래의 작가의 의도가 완전히 곡해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때로는 직설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이 훨씬 효과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참고 문헌
Jeon, Shin-Yeon. Personal interview, April 13, 2006
전신연은 이화여대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메릴랜드 프레데릭 후드 대학원 도예과(CE)를 졸업한 후 메릴랜드 그린벨트 시티 커뮤니티센터 레지던트 아티스트로 2001년~2004까지
활동했다. 현재는 메릴랜드 타우슨 대학 도예 전공 MFA 과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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