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배의 옹기막이야기(7)
‘담’과 ‘성’을 이렇게 공부했다
글 이현배 _ 옹기장
‘담’과 ‘성城’을 이렇게 공부했다. 누가 목적을 가지고 어느 선을 넘어서서는 되돌아올 수 있는 게 ‘담’이고, 되돌아 올 수 없는 게 ‘성’이다. 그러기에 ‘성’을 넘는다는 것은 전쟁이고 전쟁은 죽기 아니면 살기다.
일본의 성에서 우리와 확연히 다른 미의식을 보았다. 한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쌓았다는 오사카성 이었고, 이번에는 가토 키요마사가 쌓았다는 구마모토성이었다. 그런데 성벽을 보노라니 ‘칼’이 느껴진다. 그 순간 어떤 전율에 당황했는데 더 놀라운 것은 전통가옥의 지붕선 또한 칼이 그리는 선線과 닮아 있다는 것이었다. 자연적응력에 의해 형성되는 지붕의 선과 인간이 자기방어의 수세守勢와 자존감의 과시 목적으로 지어진 성벽의 선이 같은 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 칼이 궁금했다. 나이프갤러리(www.knifegaellery.co.kr) 한정욱 대표께 칼에 대해 물었다. 한 대표께서 우리와 일본 칼의 차이를 다섯 가지로 예를 들어줬다. “첫째 칼날제작에 있어 우리는 무쇠단조인데 일본은 사철옥강 접쇠단조다. 둘째 무늬가 우리는 단조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데 일본은 제작자가 의도해서 부러 만든다. 셋째 피고랑이 우리는 거의 없는데 일본은 고대에는 조금 뒀고 이후에는 많이 두고 있다. 넷째 손잡이가 우리는 칼날의 연속으로 곡선인데 일본은 칼날은 곡선인데 손잡이는 직선으로 둔다. 다섯째 칼끝처리가 우리는 버섯코모양인데 일본은 삼 센티미터쯤에 수직으로 금을 그어 면을 다르게 나눠 놓는다” 는 것이다.
이 칼끝처리는 그릇의 끝처리, ‘전’의 처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의 칼이 칼등을 따라서 비스듬히 기울며 면을 나누지 않고 하나로 공글리며 구수한 된장맛을 내듯이 마무리되는 반면 일본의 칼은 선이 딱 끊기면서 면을 나눠놓는다. 우리의 그릇은 전이 분명한데 일본의 그릇은 전이 없다. 칼처럼 말이다. 형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국화 무궁화는 꽃이니까 피었다가 다시 공굴렸다가 톡 떨어지듯 그릇의 전이 형성되어 선의 기운을 머금는 반면, 일본의 국화 사쿠라는 활짝 피었다가 그대로 뚝 떨어지듯 그릇 또한 선의 기운이 그냥 날아가는 것이다.
그동안 임진왜란 때 우리의 도공들을 많이 끌고 간 것을 두고 싸움질만 잘해서 조선을 침략한 걸로 생각했었다. 그러다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의 전시물들을 보며 그들이 이룬 문화적성취가 매우 높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막그릇을 가져다가 격格을 높였던 것에 도자문화의 원형에 대한 괜한 우월감을 갖고 있었는데 그 우월감이 부끄러웠다.
전국戰國의 시대에 피로서 피를 씻는, 그야말로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미물에까지 칼끝이 겨눠지는 일상의 삶. 그 자체가 또 바로 죽음이고 그 죽음이 또 삶이었던 시절에 삶의 허무를 온통 황금으로 치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실, 온갖 색깔과 문양을 교직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무사들의 갑주(요로이 가부토),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만큼 단순화시킨 무가 가문들의 문장들은 극한의 미의식의 표출이리라. 그 미의식으로 칼을 거둔 손으로 쥐었을 조선의 막사발을 다완으로 문화화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옹기에서 항아리의 어깨에 덧띠를 두는 것을 대정이라 한다. 그런데 이게 가끔 굽다리부분에 있는 것들도 있다. 언제 동네영감님이 항아리를 빚는데 키가 작아 보여 좀 더 키우자했었다. 항아리가 거의 다 지어지는데 굽다리부분에 대정을 두는 거였다. 그래 ‘그걸 왜 두세요?’했더니 깜짝 놀라며 대답을 못하는 거였다. 영감님은 그냥 대정을 뒀던 거였다. 항아리에서 뭔가를 꺼내듯이 윗몸을 숙이고서 왼손에는 목손을 쥐어 그릇의 안을 받혀주고 오른손으로는 훑테를 쥐고 마무리를 하다가 자기 자신의 호흡을 벗어나니까, 자기 자신의 범위를 벗어나니까 단을 한번 뒀던 것이다. 대정(덧띠)을 뒀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커도 커 보이지 않게, 작아도 작아 보이지 않게 꼭 자기만큼 그릇을 지었던 것이다.
읍내 버스터미널에 붙어있는 현상수배 포스터를 보면 도둑은 줄고 강도상해가 많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 집들은 말이 담이지 성을 쌓는다. 자기보호목적으로 높혔던 게 결국 화를 부른다. 본래 ‘담’은 도둑을 부르고, ‘성’은 강도를 부른다. 자기 목적이 있어 어느 선을 넘었다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되돌아 올 수 있으면 도둑이 되고, 되돌아 올수 없어 그 상황을 돌파하자니 강도가 되는 것이다.
어찌 집짓는 일만 그럴까? 그릇을 짓는 것도 성을 쌓을 일이 아닌 것이다.
필자 이현배 옹기장은 전라북도 진안에서 ‘손내옹기’를 운영한다. 이메일 주소는 jilb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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