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만난 작가
‘수레질 30년’ 도예가 박순관
‘옹기’, ‘토기’, ‘수레질’, ‘독짓는 젊은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쉽게 연상되는 도예가가 있다. 박순관(51)이다. 그의 작업장 마당에는 수집한 500여개의 ‘옹기’가 가득하고, 고대토기와 전통옹기 성형기법인 ‘수레질’은 그가 오랜 기간 고수해온 작업방법이며 ‘독짓는 젊은이’는 「독짓는 늙은이」의 작가 황순원 씨가 22년 전 그의 첫 개인전에서 붙여준 이름이다. 어느새 희끗한 머리의 장년이 된 박순관이 올해로 쉼 없이 이어온 ‘수레질 30년’을 맞았다.
박순관의 작업장인 ‘거칠뫼’를 오랜만에 찾았다. 수레질 30년을 기념해 열릴 전시를 목전에 두고 있어 작품 준비에 분주한 모습이다. 목물레 위에는 방금 빚어 올린 항아리가 있고 다양한 문양을 지닌 수십 종의 수레와 도개, 둥근 바닥의 독을 받쳐줄 해초 또아리, 줄지어 가마불을 기다리고 있는 넉넉한 수레항아리 그리고 그사이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에서 여전히 순수한 ‘독짓는 젊은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박순관의 작업장이 자리한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은 그에게 고향이면서 흙과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이다. 그의 선조는 16대를 이어오면서 인근에 삶의 터전을 일궈왔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조선기와와 토관, 붉은벽돌 등을 만드는 공장이 많이 모여 있던 곳으로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집채만 한 재래식 벽돌가마에서 연기가 뿜어 나오던 곳이다. 작가의 선친은 한때 이곳에서 지천으로 있는 진흙을 파내 기와와 토관, 벽돌 등을 생산하던 공장을 운영했다. 박순관은 초등학교시절 아버지의 전통기와공장에서 건조되지 않은 젖은 기와를 오려 권총이며 탱크 장남감을 만들어 숯에 굽는 법을 터득해 내며 어려서부터 흙과 불의 관계를 경험했다. 중학교 시절엔 아버지가 제재소를 운영하게 되면서 나무로 무엇이든 조각하는 취미도 가질 수 있었다.
대학진학은 당시 사회적 시류에 따라 단국대학교 섬유공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전공에 흥미를 갖지 못한 그는 의미 없는 대학생활 2년을 마치고 휴학하기에 이르렀다. 인생의 황금기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릴 적 손재주를 아는 주변에서 공예분야를 전공할 것을 권유했고 마침 학교 내에 도예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전공을 바꾸리라 결심했다.
옹기와의 인연
그가 옹기와 인연을 갖게 된 것은 군대에 입대해서다. 강원도 원주에서 군생활을 하던 중 치악산 밑 언덕에 가마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외박을 나와 그곳을 찾아갔다. 옹기 공장이었다. 익히 알고 있던 도자기 공장의 모습과는 달리 오히려 규모가 크고 작업과정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물레에 흙을 올려놓고 돌려가면서 바깥에서 두드려 문양을 새겨 넣는 ‘수레’와 안에 대는 ‘도개’가 큰 옹기를 몇 십분 만에 금세 만들어내는 장면은 놀랍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후 휴가만 받으면 그곳을 찾아가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당시 “그러한 굉장한 기술이 도예의 한 분야로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이것을 배워 잘 활용한다면 남다른 분야의 도예가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고 술회한다.
제대 후 부모님을 설득해 결국 한 학년을 낮춰 도예과로 전공을 바꿨다. 그리고 방학이면 옹기 공장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익혔다. 졸업 후에는 옹기에 더욱 빠져들기 시작했다. 전국 각 지방의 옹기공장을 다니며 옹기를 수집하고 지역별로 성형방법, 도구의 종류, 고유용어에 대한 부분을 연구했다. 그가 수집한 500여개의 옹기에는 각기 한가지씩 일화를 담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서울 청계 8가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어른 가슴높이로 사람 2~3명이 숨어도 넉넉할 크기의 대형옹기를 10만원의 헐값에 사게 된 일, 시골마을의 한 집 마당에서 발견해 커다란 빨간 고무통을 사다주고 바꿔 얻은 옹기두멍 등… 일화를 하나하나 듣다보면 하룻밤을 꼬박 지새울 정도다. 그는 “우리 옹기는 가장 과학적입니다. 흙으로 이만큼 빠르고 얇게 만들 수 있는 기술 또한 없습니다. 큰 옹기의 속안을 들여다보면 일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한없이 크고 깊은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나에게 이 옹기는 스승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대표적인 박물관에 옹기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민중 문화와 예술을 가볍게 여기는 풍토 때문입니다. 역사적 맥락으로 보아도 옹기는 신라토기의 모태가 된 김해토기에 그 연원을 두고 조선시대말에 나타나 신라시대부터 현대까지 그 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왔는데도 그렇습니다. 옹기에 사용되는 용어도 순우리말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고 제작기법도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은 거의 신비에 가까운 일입니다”라며 설파함을 주저하지 않는다.
수레질 외길 30년
지난 1984년 서울 유니버스백화점에서 가진 첫 번째 전시 이후 지난해까지 국내와 일본, 미국 등에서 가진 개인전은 총 11회에 이른다. 모든 전시에서는 수레질도자기를 선보여 왔다. 그는 요즘 ‘흙공부 10년, 유약공부 10년, 불때기 10년을 겪어야 도자기를 한다고 할 수 있다’라는 옛 도공의 말을 실감하고 있다. 자신이 수레질항아리에 쏟아 부었던 작업여정이 어느새 30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오는 9월 20일부터 10월 3일까지 서울 인사동 공예갤러리 나눔에서 <도정 박순관 ‘수레질 30년’전>을 갖는다. 마치 선사시대의 빗살무늬토기나 삼국시대의 토기를 떠올리는 듯하며 현대적 감각으로 재창조된 붉은 빛깔과 암갈색의 무유번조 수레질도자기는 30여년간 외롭게 천착해 이끌어낸 산물이다. 박순관의 작품에 대해 조명제 시인은 “조금만 안목이 있는 이들이라면 조형미에 있어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유니크한 형태를 보여주는 그의 작품에 곧바로 매료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그의 무유 수레질의 세계가 첨단문명시대를 숨가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원초적 무의식을 흔들어 깨우고, 질박한 원시속의 현대적 미학을 그 심층으로부터 이끌어 내 주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한다.
박순관의 수레질항아리는 벨지움 브뤼셀의 마리몽 왕립 박물관과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 미국 뉴욕의 롱하우스 리져브, 브룩클린 뮤지엄, 그리스 볼러스의 볼러스민속도자뮤지엄, 한국의 영암도기문화센터,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다.
공예관 정립해준 옹기와 책
그는 최근 작업장 옆에 오래된 집을 개조, 새로운 공간을 마련했다. 작업실과 면해있는 이 공간에는 수레질한 찻그릇이 좋아 이곳을 방문하는 차인들을 위한 차실과 오랜 기간 수집해온 토기유물이 가지런히 놓인 전시공간이 마련돼 있다. 또하 한쪽 방안의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는 이동식 책장은 가장 소중한 공간이다. 책장에는 공예, 회화, 조각, 민속학, 골동, 미술사, 음악 등의 예술분야 전반의 국내외 서적 2천여권이 소장돼있다. 이 책들은 수집한 옹기 500여점과 함께 도예가 박순관의 예술관, 특히 공예관을 정립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10여개 국가로부터 초청돼 워크숍과 세미나를 통해 수레질도자기에 관련한 역사, 재료, 도구, 제작방법, 가마 등을 독보적으로 연구발표 할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는 내년 4월 열리는 세계도자비엔날레의 장작가마워크숍 기획자 겸 작가로 참여해 아시아 각국의 작가들과 함께 모여 토기세계의 진수를 선보일 계획이다.
손으로 두들기고 무늬가 새겨진 수레로 쳐서 표면에 살을 박아 만드는 박순관의 수레질항아리는 유약을 바르지 않고 장작가마 속에서 3일 밤낮으로 굽는다. 장작가마 속에든 수레질항아리 표면에는 불로 인한 재가 날아가 그림을 그린다. ‘불그림’이고 ‘불티미’이다. 흙과 불이 만나 이루어 놓은 암갈색의 그림들은 불꽃이 그려준 생명력을 담은 한 폭의 초상화다. 평소 눈에 익은 도자기 작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중성도 없고 가격도 싸지만 흙과 맺은 인연을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생각하는 독짓는 젊은이는 순수한 웃음을 지으며 오늘도 쉼 없이 수레질 한다.
김태완 기자 anthos@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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