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의 담론과 조형적 실천 - 도예가 조정현의 40년 여정
글 최공호 _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미술사가
한국 공예사에서의 현대는 한 대학에서 배출한 학생이 그 학과의 교수를 거처 정년을 맞을 만큼의 시간대와 일치한다. 해방공간에서 유력한 미술대학들이 앞다투어 현대 미술교육을 시작하였지만, 공예분야에 있어서는 이화여대가 1947년으로 다소 앞서 있었다.
1959년, 생활미술과 도자기 전공의 첫 입학생인 조정현 교수가 정년퇴임과 함께 자신의 작품 150여점을 모교 박물관에 기증한 일은 여러 가지로 상징적이다. 현대도예 교육이 시작된 이래 초기의 대학 현대도예에서 일정부분 전통도자의 텃밭 구실을 자임해온 이화여대 도예전공의 역사이자, 현대 공예사의 한 사이클을 가늠할 단서이기도 한 것이다.
도예가 조정현은 한결같이 고요하여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것 같지 않은 인상이다. 차분한 음색과 단아한 자태 어디에서도 거친 흙을 다루고 천이삼백 도를 오르내리는 가마와 치열하게 씨름하는 도예가로 보이지 않는다. 조정현을 떠올리는 데는 몇 가지 유효한 코드가 수반된다. 이 가운데 옹기는 조정현의 이미지와 바로 중첩되는 핵심 키워드가 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현대화가 진행된 60~70년대의 한국 공예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욱한 안개 속과 다름없었다. 조형의 이름으로 전통적 가치가 훼손되고, 모더니즘의 실험정신이 과거의 전통적 양식을 극복의 대상으로 치부함으로서, 그릇의 형태는 원형을 벗어나기를 열망하는 모더니즘의 탐신주의자들로 인해 부셔지거나 일그러뜨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더구나 하찮은 옹기 따위에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시기에 그는 뒤늦은 유학길에서 비로소 전통의 참 가치에 눈을 뜬 셈이었다.
조정현의 작품은 몇 가지로 그 특징을 정리해 불 수 있다. 전통의 가치 인식이 조정현의 예술관을 형성하는 씨줄이라면, 옹기는 그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표상해내는 날줄 구실을 담당하고 있다고 본다. 대학을 막 졸업한 뒤 자신의 작품세계를 모색하기에 한창이던 시기에는 서양 도자의 형식미를 참고하여 표현 효과에 매료된 적도 있었다. 고대의 토기고배가 조형소재로 쓰이기도 했지만, 아폴로 우주선이 화재가 되던 시기에는 작품 소재로 달 표면사진을 차용하여 정원에 가까운 구형에 거친 분화구를 암시하는 표면을 열심히 묘사했었다. 이 시기에는 물레가 형태를 구축하는데 중심구실을 했던 것은 물론이다.
70년대 말부터는 작품의 전체 기조가 옹기로 초점이 옮아가기 시작하였다. 77년에 돌아온 유학길에서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더불어 이 시기에 가늘게 중첩된 선문양이 등장하는데, 유학시절에 몰입하던 선상감기법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작가의 후기 작품에 이르기까지 오래 반복해서 등장하는 패턴 가운데 하나이다. 작가는 이 일련의 선문양을 율동감과 경쾌한 리듬이 살아나서 늘 즐겨 써왔다. 한 때는 이 선들을 새기는 일에 매료되어 오히려 억제하느라 애쓴 적이 있을 정도라고 털어놓는다.
80년대 중반에는 푸레독의 넓전이 주는 편안한 감성에 주목하여 입시울을 수평으로 넓게 조성한 작품이 자주 등장하게 된다. 옹기의 외형과 질감 뿐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일 것 같은 넉넉한 오지랖을 표현하는 한층 깊이 있는 천착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작품들 가운데서 눈에 띄는 것은, 두 세 덩이의 볼륨이 하나의 몸체와 기대로 구축되는 독특한 형식이다. 각각의 볼륨들 사이의 접합부분에는 가느다란 수평의 중간띠가 부착되곤 한다. 이 띠는 부재들 간의 형식의 결합에 시각적 설득력을 부여하는 장치이지만, 사실 작가는 토기시대의 형태에 몰입했던 초기의 경험에 비추어 구조공학적 필요성이 절실했다고 강조한다. 제작의 실제 경험에서 길어 올린 전통기술의 지혜로움이었다. 그리고 이 형식은 연가를 비롯하여 전통 건축도자에 대한 일련의 연구성과와 무관하지 않다. 작가의 연구의욕과 논리적 창작태도의 한 단면이라 할만하다.
그의 작품 전반에서는 늘 조심성이 배어난다. 작품에 투영된 모범생기질이다. 내친김에 한 걸음 더 나아가도 될 법한데, 바로 앞에서 늘 멈춰서곤 한다. 과유불급. 넘치기보다는 외려 모자라는 편의 덕성과 여백을 가치롭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그에게서 파격을 기대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이유이다. 어쩌다 눈에 띄는 파격은 뜻하지 않은 실수가 부여한 선물일 따름이다. 물론 그것 역시 거저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서 ‘happy accident’라 했다는 몇몇 작품들의 존재는, 건조과정에서 부주의로 넘어지는 등 우연찮은 해프닝이 오히려 평소의 작가가 엄두를 내지 못하는 영역으로 안내해준 행복한 길잡이였던 셈이다.
9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는 앞 시기에 비해 훨씬 넉넉하고 여유로움이 배어나 보는 이의 마음을 절로 편안하게 한다. 비로소 자신이 바라던 소박한 자연스러움에 다가가고 있다는 증거라 여겨진다. 부제를 통한 장식효과는 한층 절제되거나 아예 배제되고, 거슬거슬한 질그릇의 표면질과 더불어 너그러운 옹기의 본질적 형식미의 원형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면서 작가 스스로도 작업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멀찍이 보면 커 보이는 형태에 세부는 일정한 리듬과 유기적 호흡이 미세하게 살아 생동한다.
이들 세대가 가진 얼마간의 공통성이기도 하지만, 조정현에게서는 현대도예 1세대작가로서의 소명의식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책임감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옹기라는 남다른 소재에 대해 연구하고 작품으로 표출해내기 위해 평생을 매진해온 것도 이처럼 1세대 작가들이 공유하던 사회 문화적 책임의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 시기의 공예가들은 종갓집의 맞아들처럼 늘 모종의 사명감에 어깨를 짓눌려 왔을 터였다. 자신보다는 집단과 국가가 강조되고, 그 강요를 어느덧 체질화하여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그들 세대에게서는, 그래서 시대적 한계로 인한 안타까움과 고마움, 안쓰러움이 동시에 교차한다.
황종구 선생 등 근대적 학제가 구축되기 이전의 장인 출신의 교수로부터 익힌 기술 중심의 청자 영역과 모더니즘 회오리가 몰아치던 당시의 미술계 분위기에서 스승의 영향력과 당대의 공예적 자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통적 현대도예를 창출해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승의 가르침으로부터 정신적인 전통의 고갱이를 취했다면, 이를 기반으로 하여 시도한 다채로운 모더니즘의 형식 실험과 변주를 통해서는 전통에 대한 독자적인 재해석의 가능성을 열었다고 하겠다.
조정현의 대외활동은 도예가들 가운데서도 단연 두드러진다. 75년, 미국의 남일리노이 대학원에 유학한 일을 계기로 조정현은 미주 지역에 한국의 도자기를 소개하고 양국 작가들 간의 교류의 물꼬를 트는데 적극적으로 앞장서 왔다. 특히 80년대 후반의 몇 년간은 방학 때마다 어김없이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의 도예를 강의하고, 제작과정을 보여주는 일을 반복했다. 이 무렵만 해도 도예 분야에서 유학을 떠나는 사람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그 쪽을 배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우리 도자의 정수를 그들에게 알리고 가르치려는 데는 엄두를 내기조차 어려운 현실이었다. 지금도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가 많지 않은 실정임을 감안하면, 당시에 이처럼 진취적인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조정현은 때로 옹기장인을 대동하고 건너가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현지의 학생과 작가들에게 한국 도자기의 속내를 고스란히 전하여 줌으로서 감동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몇 해 전에는 아이덴티티와 관련된 주제로 손수 기획한 대규모의 미국전시에 한국 도예가들을 선정하여 성공적으로 치러낸 바 있다.
그는 한국 도예계에서 새로운 기법과 형식 실험을 처음 시도한 것도 여러 가지다. 옹기에 대해 연구하고 작품에 적용하는 일은 물론, 환경도예의 가능성과 가치를 과거의 전통 꽃담에서 찾아내어 책을 엮고, 이를 실천에 옮겨 그 참다운 가치를 보급하는데도 열심이었다.
소금가마를 현대도예에 적용하여 번조한 것이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75년이다. 유약을 입히지 않고 구워낸 작품을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하자 주위로부터 비판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는 나름대로 도자기가 화장기 없는 맨얼굴을 드러내는 용기도 더러 필요하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의 저화도 도자기법으로 알려진 라쿠야끼樂燒를 이 땅에서 처음 시도한 이도 조정현이다. 1982년, 도자기도 아니라는 스승의 역정을 들어가며 가까스로 전시회에 출품한 뒤로는 깨끗이 미련을 버릴 수 있었다. 내부에 뜨거움을 남몰래 감추고 사는 작가의 면모다. 그러나 따지고 보니 라쿠야끼 역시 일본이 즐겨 썼다고 하여 일본 것이 아니었다. 정작 센노리큐를 도와 거칠한 표면의 넉넉한 다도 정신을 담을 저화도의 라쿠를 완성한 사람이 조선인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정서가 선택한 다완이 우리 것이라 하여 재현에 열광하는 오늘의 상황과 비견되어 씁쓸하다.
조정현의 작업이 지니는 의미를 되짚어 보면, 옹기를 통해서 중심부의 현대 도자영역과의 화해를 주선하는 일로 요약된다. 옹기에 내재하는 생활 정서를 건져 올려 속이 빈 현대 도예의 허허로움을 매우는 구실을 일관되게 수행해왔다고 보는 것이다.
작가는 옹기의 넉넉한 오지랖을 닮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시골 들판에 퍼질러 앉아 일하는 아낙들의 펑퍼짐한 자태를 닮을 수는 없을까? 아직도 이처럼 억지스럽지 않게 도자기를 빚어낼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을 채 이루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정작 만들고 나면 어딘지 야박하고 요령부득이어서 인위적인 느낌을 떨쳐내지 못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작가로서의 그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지금부터가 아닐까 한다. 공예계 안팎의 일과 대학에서의 각종 보직을 맡아 바쁘게 보내왔던 만큼, 작품에 온전히 몰입하기란 아무래도 무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한강 자락이 창문 한가득 들어오는 당산동의 전망 좋은 작업실에서 퇴임 후의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려는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바삐 살아온 시간에 이루어낸 일이 이만큼이라면, 앞으로의 시간동안에 꿈꾸어 왔던 일들을 더욱 여유롭고 밀도 높게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맨 위 왼쪽「여름의 하루」 H 17cm 1985년 작 오른쪽 「가을의 일상」 H 12.2cm 1986년 작
왼쪽 「아폴로의 달착륙」 H 17cm 1968년 작 오른쪽 「연꽃의 기원」 H 22.5cm 1978년 작
왼쪽에서부터 「직선과 곡선의 생각」 H 47.6cm 1988년 작, 「대지를 딛고」 H 48.3cm 1991년 작, 「탈춤을 추고 나서」 H 36.3cm 1994년 작
맨 아래「옹기굴뚝의 회상Ⅵ」 H 40cm 2004년 작
「위의 작품 이미지는 도예작가 조정현이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기증해 <흙으로 스미는 빛>이란 주제로 2006.9.1 - 12.29까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서 특별전시중인 작품 이미지이며, 소유권 및 지적재산권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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