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로얄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그룹의 산업도자 디자인과 예술유리?
연대순으로 보는 로얄 코펜하겐의 역사와
덴마크 산업도자디자인 양식 변천사⑺
- 1800년대 상반기, 민주주의로 가는 길
글/김정아 스웨덴리포터 사진/로얄 코펜하겐 제공
1. 유산계급의 시대
1800년대는 유산계급의 시대로 그들의 생활양식과 철학이 시대 전반을 독점했다. 이 시대는 1700년대의 전제왕정시대와 비교해 볼 때 많은 면에서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예술분야에서 보면 1700년대는 왕의 권력을 중심으로 하여 바로크 건축과 거대하고 화려한 경축연들이 디자인되었으며 경박스럽고 세심한 묘사에 치중한 교태 적인 로코코양식이 시대예술을 대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후 자유와 평등 그리고 우애에 대한 이상이 새로운 시대를 선도하게 되었다. 1804년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하자, 유산계급은 민주주의의 대명사로 받아들여졌다.
1800년대 민주주의는 고전주의의 특색을 띄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특별히 이 고전주의 양식이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계기로 풍요로운 표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그의 대관식에서 고대 로마의 장군 같은 복장에 황금과 도금을 한 청동을 이용하여 고대 로마 풍의 다양한 장식으로 치장을 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800년대의 새로운 사회질서가 된 민주주의는 시민을 국가의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간주되었다. 시민들은 국가경제의 밑바탕으로 생산력을 증산시키고, 정치적으로는 투표권을 부여하여 그들 스스로 국가의 정책과 정치가들을 현명하게 결정할 수 있도록 교육되었다. 또 한편, 정부는 새로운 교육제도를 설립하고 시민 재교육을 통해 시민 한사람 한사람이 각각 국가를 지탱하는 기둥이라는 사상과 시민 정신을 시민들에게 고취시켰으며, 국방체제가 설립되자 의무 병역제를 실시하여 시민들에게 국가의 안전을 위해 생사를 걸고 싸우도록 훈련시켰다. 또한 정부는 문화정책을 통해 시민들의 정신활동과 사고방식, 사물을 보는 방법 및 정신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 시기를 통해 유럽전역에는 순수 고전주의 양식의 많은 대형 박물관들이 건설되었다. 1800년대에 건설된 이러한 대형 박물관들은 마치 고대의 신전과 같은 외형을 가지고있으나, 고대 신전들이 신들을 숭배하는 장소였던 반면 1800년대의 신전형상을 띤 박물관들은 인간 존재 그 자체를 예찬하는 장소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완전한 차이점이 있었다. 이러한 박물관들은 역사적 유물들을 통해 인간 역사의 발전은 인간성을 본연으로 발전한다는 메시지를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즉, 인간 존재 그 자체와 인간성을 중심으로 한 1800년대는 시민들을 귀족계급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인간성 존중을 매체로 한 예술과 문화를 성숙하게 한 시대였다.
2. 덴마크 문화. 예술의 황금기와 경제파동
관리의 횡포가 심해져 민주주의가 도입된 1849년에 이르기까지 덴마크는 왕정이 실시되고 있었으며, 1800년대 초반기의 덴마크는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쿠데타를 통해 난폭한 부친을 내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황태자 후레데릭 6세는 진보주의적인 왕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통치기간동안 1788년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점진적으로 농노와 소작농제도를 폐지하고 자유농을 증대시켰다. 이 결과 왕령과 자영농민의 수는 증대하였으며 따라서 대지주 귀족의 세력이 쇠퇴하고, 이리하여 왕권은 더욱 강대해져 절대왕정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덴마크에 닥친 여러 재난들은 국가경제를 어렵게 하고 당연히 로얄 코펜하겐 자기회사도 이의 영향을 받았다.
로얄 코펜하겐의 첫 재난은 1795년에 일어난 코펜하겐 시가지 대화재로 로얄 코펜하겐회사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 두 번째 재난은 1801년에 발발한 덴마크와 영국의 전쟁이었다. 레덴에서의 장기 전투를 통해 덴마크가 영국군을 무찌르는데 성공했으나, 1807년 다시 코펜하겐 시가지는 영국군의 대폭격으로 무참히 파괴되었으며 로얄 코펜하겐회사의 대부분 역시 파괴되었다. 이 전쟁의 원인은 나폴레옹 프랑스 정부와 영국의 파워 게임으로, 1806년 대륙봉쇄령을 포고한 나폴레옹은 철저한 대륙봉쇄를 위해 덴마크에게 자기 진영으로 가입할 것을 강요했다. 이것을 염려한 영국은 덴마크를 협박하고 함대전체를 영국에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덴마크가 이를 거절하자 영국군은 코펜하겐 시를 포위하고 3일간에 걸쳐 포격하고 (1807. 9. 2 - 9. 4) 덴마크 군함을 나포했다. 이에 덴마크의 당시 국왕이었던 후레데릭 6세는 프랑스,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1807년 11월에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더하여 이웃나라인 스웨덴이 1812년 영국,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 편인 덴마크로 쳐들어왔다. 이 전쟁은 1814년까지 계속되었으며 결국 1814년 1월 킬 (Kiel)조약을 체결하고 당시 덴마크 영토였던 노르웨이가 스웨덴으로 양도되었다. 전쟁말기였던 1813년 덴마크는 이미 국가경제 파산선고를 공식 선언한 상태였다.
전쟁이 끝난 뒤 코펜하겐은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으로 재건되었으며, 이 시기에 건설된 주택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식당의 기능을 혼합한 거실 디자인이었다. 지속적인 국가의 재난과 경제적인 궁핍에도 불구하고 덴마크는 1800년대에 문화와 예술분야의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꿈과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는 동화의 작가 안데르센, “죽음에 이르는 병” 등 실존주의 철학의 대부로 불리는 키에르케고르, 신고전주주의의 조각가 토르발드센, “아름다운 대지…”로 시작되는 덴마크의 국가를 작사한 시인 엘렌슐레어 등은 덴마크의 국가적 정서와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기초를 마련한 예술가들이었다.
1800년대 상반기의 문화와 예술분야의 황금기는 공예와 디자인분야에 영향을 주어 1800년대 하반기에 들어 마침내 덴마크의 디자인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되었다. 로얄 코펜하겐은 1816년부터 다시 생산을 재개하고 1889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아놀드 크로그(Arnold Krog)의 디자인으로 최고상을 획득하며 전쟁과 궁핍을 극복한 현대 덴마크 산업도자디자인의 시작을 보여주었다.
3. 1800년대 상반기의 산업도자디자인 양식과 로얄 코펜하겐
고대 로마와 그리스 풍의 고전주의 건축양식이 시대를 이끌던 1800년대 상반기 사회의 조류에 따라 1821년 로얄 코펜하겐은 프랑스 엠파이어 양식의 영향을 받은 건축가 헤치(Gustav Friedrich Hetch)를 예술책임자로 고용하였다. 그는 덴마크에 후기 엠파이어 양식을 도입한 건축가로 후일 이 양식은 덴마크 식으로 변형되어 크리스티안 8세 양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헤치는 1864년까지 로얄 코펜하겐의 예술 책임자로 있으면서 이 시대의 특징이었던 고전주의의 이상을 제품디자인에 적용하였다. 그는 재임기간동안 여러 미술가들을 디자이너로 고용하였는데 그중 대표적인 디자이너는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하여 도자 표면에 상회로 독창적인 꽃 그림을 그린 화가인 옌센으로 1825년에 고용되었다. 헤치는 여러 신고전주의 양식의 서비스를 디자인하였으며 정교한 세공을 한 표면에 금으로 장식을 한 화병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덴마크 도자디자인의 정체성을 깨끗하고 단순한 미에 있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특징을 이 시대의 양식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1820년대부터 로얄 코펜하겐은 유명한 덴마크의 신고전주의 조각가 토르발드센(Thorvaldsen)의 조각들을 미니어처 도제조각으로 제작하고 일회소성으로 유약을 입히지 않은 자기제품을 생산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자기조각제품들은 올림푸스의 신과 여신들, 그리스도와 천사들을 조각한 것들이었으며 1850년대까지 많은 자기 제품들이 고대 그리스. 로마 풍의 디자인으로 제작되었다. 현재까지도 로얄 코펜하겐에서 가장 까다로운 제품으로 알려진 대형 촛대 칸델라브라(Candelabra)는 마치 로마의 신전 같은 형상으로 디자인되었다.
1849년 덴마크의 전제왕정이 붕괴되고 의회와 여러 정당들이 설립되었으며 민주주의체제가 도입되었다. 왕실의 절대적 후원으로 시장 독점권을 가지고 있던 로얄 코펜하겐은 왕정의 붕괴와 함께 민주주의 자유 시장경쟁체제하에서 제품경쟁을 해야했다.
1853년 4월 로얄 코펜하겐에서 도제 인형과 도자 조각을 제작하던 그뢴달(Frederik Vilhelm Grondahl)은 미술품을 매매하던 빙 형제 (Meyer and Jacob Herman Bing)와 협약하여 도자회사 빙 앤 그뢴달(Bing & Grondahl)을 설립하였다.
정치. 사회의 변화에 따라 마침내 로얄 코펜하겐은 1868년 개인 소유의 사유재산이 되었다. 1882년에는 화이앙스 제품을 생산하던 알루미니아(Aluminia Ltd.) 회사가 로얄 코펜하겐을 사들였으며, 기술자인 필립(Philip Schou)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필립은 스스로 가마와 건물을 설계해서 1884년 로얄 코펜하겐 자기공장을 코펜하겐 외곽지역의 후레데릭스베리(Frederikberg)에 있는 알루미니아 회사의 현대식 건물로 이전시켰다. 로얄 코펜하겐은 현재까지도 이곳에 위치해있다.
1830년대부터 유산계급과 많은 일반 시민들도 화이앙스 식기 대신 자기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유산계급의 민주주의 시대는 왕정시대의 형식에 의한 결혼과는 달리 사랑의 감정에 의해 결합된 가족단위와 각 시민의 국가 생산력, 시민들의 자유토론을 중요시했다.
시민주택의 거실들은 종종 토론하러오는 손님들을 위한 식당을 겸한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주부들은 간편하게 사용하고 쉽게 세척할 수 있는 식기들을 구입하고자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함께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에 발맞추어 로얄 코펜하겐과 빙 앤 그뢴달 자기회사는 새 시대를 이끄는 유산계급으로부터 경제적 지원과 대량생산이 가능한 산업화 체제를 위한 기술적 지원 혜택을 받으면서 산업혁명의 일선에 들어섰다.
(다음 호에 계속)
1800년대 후반기동안 로얄 코펜하겐의 예술 책임자였던 아놀드 크로그
위 덴마크의 후반기 엠파이어 스타일 디자인으로 1800년대 상반기동안 로얄 코펜하겐의 예술 책임자였던 헤치 (G. F. Hetch)의 디자인이다. 이 디자인은 “크리스티안 8세를 위한 서비스 C"라고 알려져 있으며 1840년에 생산되었다.
아래 1869년에 생산된 식탁용 냄비 (Tureen)
헤치의 디자인으로 1800년대 상반기에 생산된 식탁 장식용 제품들
‘미의 세 여신상’, 베르텔 토르발드센이 오리지널을 조각하였으며 1870년에 생산되었다.
아놀드 크로그 (Arnold Krog)가 제작한 화병
필자약력
이화여대 및 동 대학원 도예과 졸업
스웨덴 국립 욧데보리대학교 대학원 석사(MFA)
핀란드 헬싱키산업미술대학교 대학원 박사(Doctor of Art)
개인전 2회(스웨덴)
국제학술대회 논문발표 3회
핀란드 UIAH 도자연구소 전임연구원 및
도예과 전임강사 역임
현재, 스웨덴 욧데보리대학교 전임강사(공예학부) 및
전임연구원(디자인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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