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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백자 은투각 새꽃넝쿨문 다완
  • 편집부
  • 등록 2021-04-30 15:23:20
  • 수정 2024-07-04 16:5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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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문화

[문화재 돋보기①]

고려백자 은투각 새꽃넝쿨문 다완

글_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 문화재 평론가

10세기경 제작된 고급 백자
이 작은 찻잔은 우리나라에서 도자기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유물로 10세기경에 한반도의 서남부지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닥의 굽은 일명 햇무리 굽으로 낮고 넓어서 안정감이 있고 삿갓처럼 거의 직선으로 뻗은 기벽은 두 손에 꼭 들어오게 하였다. 두꺼운 유약을 몸체에 골고루 시유했고 빙렬이 잔잔하게 나 있으며 굽바닥엔 내화도 받침 흔적이 남아있다. 그릇의 안쪽 면에는 내저원각(內底圓刻)이 있으며 갑발을 사용하여 한 점씩 소성한 고급 백자이다.

 

잘못된 문화 상식 타파
  여기까지는 우리나라 초기 도자기 제작의 일반적인 것으로 특이할 것이 없다. 그런데 도자기의 몸통을 정교하게 투각된 은판이 감싸고 있다. 당시 세계적인 금속공예 기술을 첨단 도자기에 접목시켜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재탄생시켜 낸 것이다. 도자공예와 금속공예의 결합이며 소박함이 미덕인 양 잘못 알려졌던 그동안의 잘못된 문화 상식을 타파하고 중국에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찻잔을 탄생시킨 것이다.
  얇고 넓은 은판을 부채꼴 형태로 만들고 당시 유행하던 연꽃잎과 꽃 넝쿨 속에 노니는 새를 밑그림으로 그린 후, 일정한 힘의 세기로 은판의 밑그림을 따라 정(釘)으로 새겨 넣고 쪼아서 공간을 따낸다. 무늬는 굽 부분과 입술 부분의 꽃잎을 종속문으로 둘렀고 몸체의 주문양은 대칭으로 올라온 두 줄기의 넝쿨이 온몸을 휘감고 있다. 그 사이사이에 17송이의 꽃과 10마리의 새를 털끝처럼 가느다란 새김 조각 기법인 모조기법(毛彫技法)으로 정교하게 조각하였으며 투각된 은판을 곱게 다듬고 금으로 도금하였다. 그 다음에, 아교와 같은 접착물질을 사용하여 붙였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어떻게 천년동안 거의 변함없이 붙어있게 했는지는 후손들이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 투각은판의 무늬는 남북국시대 신라에서 즐겨 사용하던 자연의 동식물문양으로 몸통인 해무리 굽 백자와 제작 시기도 일치한다.
  국내에 도자기와 금속공예가 결합된 유물은 몇 점이 확인되고 대표적인 유물로는 국보 제253호로 지정된 ‘청자양각 연화당초 상감모란문 은테발’이 있는데 국보로 지정된 가장 큰 이유는 입술 주변에 은테를 둘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려왕의 행궁인 혜음원지에서 주석으로 입술 주변을 감싼 청자각접시 몇 점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파손되기 쉬운 도자기의 입술 부분에 금속 테로 감싸서 장식성보다는 실용성을 더 감안한 것이다.

 

도자공예와 금속공예 접목기술 중국보다 앞서
  중국에도 송, 원대에 청자, 백자의 입술에 은테를 감싼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물론 그 수량은 희소하며 고급자기에만 사용하였다. 그리고 송대 정요백자는 노태(露胎)의 복소법(覆燒法)으로 은이나 주석으로 입술 부분을 감싸기 위해 아예 입술의 유약을 훑어내고 소성한 경우도 있다. 그동안은 도자기와 금속의 결합제품은 중국이 처음으로 개발하여 생산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당연히 중국기술을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왜냐하면, 중국에 비해 유물의 수량도 적고 은테를 두른 도자기의 제작 시기도 12세기 이후의 유물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0세기를 전후한 ‘고려백자 은투각 새넝쿨문 다완’의 등장으로 중국보다 더 이른 시기에 화려하고 정교한 작품을 생산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여주 고달사지의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에는 “광종이 945년에 원종대사(868년~958년)에게 금구자발(金釦瓷鉢)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고려백자 은투각 새넝쿨문 다완’의 제작시기와 일치하며 이 시기에 이미 금은장식을 결합한 도자기를 생산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기록이다. 그동안 이 탑비에 등장하는 ‘금구자발’이 수입한 중국도자기로 단정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이제는 수정되어야 한다.
  10세기를 전후하여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중국뿐이었다. 세계 최대의 도자기 생산국이었던 중국에도 투각은판을 몸통 전체에 씌워 화려하게 장식한 도자기는 없고 명품 다완의 최대 소장국인 일본에도 없다.
  1000년 전 최첨단의 도자기생산기술을 지녔던 우리 선조들은 도자공예기술과 고조선부터 이어진 금속공예기술을 접목하여 세계 최고의 예술품을 창조하였고, 21세기 IT강국의 후손들에게 문화적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준다.



「고려백자 은투각 새꽃넝쿨문 다완(白磁金 花鳥唐草文茶碗)」
고려시대 | 입지름 15cm. 굽지름 5.5cm. 높이 5.6cm

 

*본 기사는 월간도예에 연재되는 칼럼으로, 도자문화 이론을 대중적으로 소개하고자 본지에 후속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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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대환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문화재 보존학을 전공했으며 40여 년간 국내외 발굴현장과 유적지를 답사하며 문화재를 연구했다. 지난 15년간 대학교 박물관과 국공립박물관에 신라금동불상, 고려청동탑, 고려청자, 고려도기, 조선백자, 고려와전, 벼루, 출토복식 등 5천여 점의 유물을 무상 기증했다. 주요 저서로는 『박물관에서 볼 수 없는 문화재1,2』가 있으며, 현재 상명대학교 석좌교수이자 문화재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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