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약, 세라믹의 옷③
도예가 신병석
청백자의 은근한 매력
도예가 신병석의 작업은 전남 강진에서 중국 경덕진으로, 다시 전남 영암으로 이어진 여정을 따라 청자에서 청백자로 귀결되었다. 작가는 얕게 삼중 양각한 오얏꽃 문양에 청자 유약을 흘려 내 청백자의 말갛고 은은한 매력을 은근히 드러낸다.
글 박진영 객원 에디터 /사진 이은 스튜디오
도예가 신병석의 공방 ‘아라리요’는 전남 영암, 초여름의 푸른 논이 시원하게 펼쳐진 평온한 동네에 자리한다. 작가는 5년간의 중국 경덕진 생활을 정리하고 얼마 전에 이곳에 정착했다. 오래된 창고를 직접 새로 짓다시피 해서 마련한 이 공간은 작업실과 쇼룸, 체험 공간을 실하게 갖추고 있다. 작가는 경덕진으로 가기 전에 전남 강진에서 청자 작업을 했다. 대학 때부터 청자를 주로 만들어 온 터라 졸업하고 자연스레 고려청자의 고장, 강진에 자리잡았다. “강진에서 2년 정도 작업했는데 고생을 많이 했어요. 대학 졸업하고 바로 갔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기술이 많이 부족했죠. 그래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매일 아침 7~8시부터 새벽 1~2시까지 2년 정도 작업하고 보니 어느 정도 능숙해졌어요.”
신병석 작가의 청백자 다기세트
작가는 2009년에 「청자역상감보상당초문각형화기」로 대한민국 청자 공모전에서 대상(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받았다. 「청자역상감보상당초문각형화기」는 기 표면을 면치기해서 여러 면으로 구성하고 보상당초문을 역상감해서 가득 채운 작품으로, 기의 형태와 문양, 색감은 전통적이지만 면치기로 만들어낸 입체감은 모던해서 굉장히 새로운 느낌을 주는 청자이다. 게다가 각 면이 빛을 받으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반사해 입체감이 한껏 도드라진다. “전통적인 고려청자를 전승하는 일도 가치 있지만 이 시대의 감각과 언어로 풀어내는 일이 저 같은 젊은 도예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고민 끝에 완성한 작품으로 큰 상을 받아서 정말 기뻤습니다. 그런데 큰 상을 받고 나면 도예가로 확실히 자리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구요.”
공모전에서의 수상은 작가의 실력을 확인받을 수 있는 자리이긴 했으나 또 다른 길을 열어주는 기회가 되지는 않았다. 그즈음 결혼해서 아이를 갖게 된 작가는 성실한 생활인으로서 경제적인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품을 만들면 어떻게 판매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그때에는 청자 유약도 다 만들어서 사용했는데 작업부터 작업실 운영까지 다 직접 해야 하니 정말 힘들었어요.” 그렇게 몇 년 하다 보니 슬럼프에 빠지더라고요. 여러 난제에 막혀 답답할 때 역시 도예가인 아내가 경덕진 행을 제안했다.
세계 도자의 원류이자 지금까지도 중국 도자의 메카로 꼽히는 경덕진은 도자 산업이 탄탄히 뿌리내린 곳이다. 정말 다양하고 수준 높은 도자기가 어마어마하게 생산되는 곳이다. “경덕진은 도예 작업에 최적화된 곳이에요. 무엇보다 도자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흙이 정말 좋아서 백자는 1320~1350도의 온도에서 구워요. 그리고 도자기 제작이 분업화돼 있고 인건비가 저렴해서 작가가 토련이나 꼬막 밀기 같은 작업을 일일이 하지 않아도 되고요. 작가는 그저 도자기를 어떻게 잘 만들지만 생각하면 됩니다.” 온갖 종류의 도자기가 만들어지는 그곳에서도 한국의 고려청자는 으뜸으로 꼽힌다. 한국에서 청자를 만들었고 공모전에서 상도 여러 번 받은 경력 덕에 작가는 그곳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었다. “경덕진에 옛날 도자기 공장을 새로 꾸며서 젊은 작가들이 작업할 수 있게 만든 도계천이라는 곳이 있는데 주말마다 도자기 시장이 열려요. 그 시장에서 작은 테이블 하나 놓고 작품을 판매했는데 정말 잘 팔렸어요. 그걸 기반으로 그곳에 자리잡고 도자기 가게도 하나 냈어요.” 코로나19 때문에 결국 경덕진 생활을 마감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은 작가에게 큰 밑천이 되었다.
대한민국 청자공모전 대상작_청자역상감보상당초문각형화기
청자에서 청백자로
작가는 경덕진에서 청자 덕을 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청자 작업을 하지는 못했다. 청자를 만들 수 있는 흙과 유약을 조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청백자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백토에 청자 유약을 시유하는 청백자는 옥빛이 은은하게 감돌아 세련된 느낌을 준다. 작가는 말간 청백자에 모던하게 패턴화한 오얏꽃을 삼중 양각해서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청자 작업을 할 때 조각을 많이 해서 조각만큼은 어느 정도 자신 있어요. 청백자를 하더라도 제 특기를 살리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오얏꽃 문양을 삼중으로 양각하면 깊이가 얕게 생기는데 그 위에 청자 유약을 시유하면 유약이 흐르면서 그 깊이가 메워져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라데이션이 생기지요. 백자에 같은 조각을 하면 이런 그라데이션 효과가 없어서 밋밋해요. 청자 유약 색도 그라데이션을 은은하게 표현할 수 있는 농도로 맞추었습니다.” 아주 도드라지지 않게, 청색과 질감을 은근히 품은 삼중 양각 오얏꽃 문양은 도예가 신병석의 시그너처이다. 작가는 이 문양을 기 표면뿐만 아니라 안쪽과 손잡이 등에 다양하게 변주해 적용한다.
청백자 다기 조각작업
청백자 다기
작업실과 이어지는 쇼룸에서는 오얏꽃 문양을 삼중 양각한 청백자 제품을 다양하게 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 ‘혼밥’이라 이름 붙인 그릇이 기발하다. 발우처럼 면기로 사용할 수 있는 큰 사발 안에 밥그릇과 국그릇이 포개져 들어 있고 사발 뚜껑은 뒤집어 찬기로 사용할 수 있다. 뚜껑 위 옴폭한 부분에 들어 있는 초승달 모양은 수저받침. 이름처럼 ‘혼밥’하기에 좋은 ‘세트 구성’이다. 모든 그릇이 큰 사발 안에 수렴되니 수납과 정리를 하기에도 편리하다. 작가가 요즘 청백자 외에도 주력하는 작업은 새 오브제이다. 머리도 몸통도 둥글둥글 통통한 새 오브제는 그 자체로 앙증맞은 장식품이면서 청백자 접시 위에 앉으면 포인트가 되고 손잡이 역할도 한다.
이렇게 밑천 든든한 작가여도 늘 고민하는 부분은 도예가로서 작업을 어떻게 지속할 것인가. 도예가로 성공하는 길은 어느 공모전에서 큰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지치지 않고 작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도자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앞으로는 차 도구에 좀 더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판매를 위한 차 도구를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달항아리 같은 큰 작업도 하고 싶고요. 옛사람들이 힘든 노동을 할 때 ´아라리´라는 노래를 부르며 힘을 낸 것처럼 신병석 작가도 ‘아라리요’에서 오래 작업하며 지치지 않기를, 그래서 그의 생각대로 도예가로서 성공을 이루기를 바란다.
누군가의 곁에서 소소한 기억들이 그릇에 담겨지고
함께 따뜻한 온기를 기억하며 아름다운 그릇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또 다시 작업실에 앉아 물레질을 시작한다. -작가의 글 중에서
신병석 작가 작품 전시실
도예가 신병석은 경희대학교 도예학과를 졸업하고 전남 강진에서 청자작업을 시작했다. 중국으로 건너가 경덕진 도자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귀국 후 전남 영암에서 작업하고 있다. 서울 인사동과 중국 경덕진에서 2회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대한민국청자공모전 대상(2009)을 비롯해 대한민국공예품대전 한국공예가협회이사장상(2011) 및 한국공예예술가협회장상(2020), 한국아카데미 미술대전 대상 등 다수 수상했다. 동아전람 차공예 박람회(2020), 영국 런던 크래프트 위크(2017) 등 참가를 통해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본 기획취재는 국내 콘텐츠 발전을 위해 (사)한국잡지협회와 공동진행되었습니다.
<</span>본 사이트에는 일부 사진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세라믹코리아 2021년 8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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