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돋보기⑬]
청자 나한좌상
靑磁 羅漢坐像
글_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 문화재 평론가
사진1.「청자 나한좌상靑磁 羅漢坐像」 고려시대. 높이12.5cm, 바닥 지름10cm.
나한(羅漢)은 산스크리스트어 아르하(Arhat)의 음역으로 아라한(阿羅漢)의 준말이다. 불교에서 일체의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달성하여 대중들의 공양을 받을 수 있는 성자를 지칭하며 성문사과(聲聞四果) 중에서 가장 높은 과위(果位)를 이룬 존재이다. 본래 소승불교의 성격에 가까운 나한이 석가모니불의 부탁을 받아 미륵불이 도래할 때까지 정법을 지키고 중생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면서 대승불교의 성격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나한상은 『삼국유사』의 오대산 북대 상왕산에 봉안된 오백나한상이 문헌에 등장하는 가장 이른시기 기록이며 그 후로 『고려사』에는 태조6년923년에 중국 오대 후량에 다녀온 사신 윤질이 오백나한상을 가져와서 신광사(神光寺)에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체로 남북국시대 후반기에서 고려초에 걸쳐서 나한상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사찰이나 암자에 봉안된 나한상은 대부분 나무를 깎아서 만들었으나 돌을 사용하기도 했고 소조(塑造)로 만든 경우도 있다. 고려시대는 도자기 생산 기술의 발전과 함께 생활용품은 물론이고 종교용품도 청자로 제작하였다. 종교용품 중에는 ‘청자 불상’이나 ‘청자 나한상’도 제작되었으나 그 수량은 매우 적어 현존하는 유물도 희소하다. 청자 나한상의 경우는 대부분이 건물터에서 출토되어 파손되고 유실된 채로 전해지며 온전한 것은 매우 귀하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소장된 「청자철화 나한상」과 여섯 조각이 난 것을 복원한 국보 제173호 「청자퇴화 점문 나한좌상」(개인소장)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사진2), (사진3)
(사진1)은 최근에 새로이 발표된 「청자 나한좌상」으로 수리 복원 없이 온전한 작품이며 고려시대 사기장(沙器匠)의 예술적 미감을 가장 잘 나타낸 걸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이 「청자 나한좌상」은 넓은 소매에 옷깃은 좌임인 풍만한 가사를 온몸에 걸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모습으로 야무지게 오므린 두 손의 표현이 날카롭다. 왼손에는 요령을 들고 있는데 요령은 불가에서 밀교 관련 의식 때 소리를 내는 도구로 가부좌를 한 나한이 불교 의식 중인 모습을 표현했다.
염불을 하는 듯 씰룩이는 입술의 표현이 해학적이며 코밑과 턱에는 수염이 듬성듬성하고 크게 뜬 눈의 눈동자도 커다랗고 여러 갈래로 퍼진 눈꼬리의 주름은 세월의 고뇌를 이겨낸 연륜을 나타낸다. 넓은 이마에는 자연스럽게 가로로 생긴 빙렬이 주름살처럼 보이며 양쪽의 커다란 귀는 곧게 서 있다. 짧은 털처럼 표현한 뒤통수의 머리카락은 듬성듬성 나 있고 가운데 가마를 중심으로 타원형을 이룬다. 삼각형처럼 균형 잡힌 등짝의 가운데는 사각형의 복장 구멍이 나 있고 속은 비어있다. (사진4)
소성할때 가마의 열기로 얼굴과 등에 난 균열이 오히려 나한상의 지난 고뇌를 대변해 주는 듯 자연스럽다. 투박하고 무심한 듯 빚은 작품이지만 나한상의 부분적인 특징을 잘 살렸으며 해학적인 얼굴의 묘사도 뛰어나다. 정선된 태토로 성형하고 맑고 투명한 청자 유약을 사용하여 소성한 관요청자로 바닥의 접지면은 유약을 훑어내고 내화토를 받쳐서 소성한 흔적이 남아있다. (사진5)
고려청자 중에도 동물이나 과일 등의 모습을 제작한 ‘상형청자(象形靑磁)’는 매우 희소한 편인데, 특히 사람 모양의 청자는 더욱 희귀하다. 800여 년의 세월을 온전하게 버텨온 것은 오로지 불심(佛心)때문이었다고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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