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돋보기⑭]
백자동화 포도무늬 항아리
白磁銅畵葡萄文壺
글_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 문화재 평론가
사진1.「백자동화 포도무늬 항아리(白磁銅畵葡萄文壺)」 조선시대. 높이 37cm, 입지름 12cm 바닥지름 13cm
세계 최초로 산화동 안료(酸化銅 顔料)를 사용해서 도자기의 문양을 장식한 고려시대 사기장(沙器匠)들은 산화동 안료를 도자기 표면에 직접 그리거나 상감기법, 퇴화기법과 함께 혼용하여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깊게 표현하였다. 청자의 문양으로 처음 사용된 산화동 안료는 소성 후에는 붉은색으로 나타나는데, 주로 식물의 꽃술이나 봉오리, 학의 머리 부분, 벌의 몸통에 주로 사용되었고 간혹 대접이나 접시의 몸통에 식물무늬 전체를 그려 넣은 경우도 있다. 고려시대 세계 최초로 사용된 산화동 안료의 사용은 이후, 조선시대 백자에도 접목되어 20세기초 까지 오랜 기간 이어졌다.
산화동 안료는 도자기를 소성할 때 높은 온도에서 쉽게 증발하기 때문에 고도의 숙련된 소성 기술이 아니면 붉은색을 얻기가 어렵다. 특히 18세기 이후 조선시대 동화백자(銅畵白磁)에 사용된 소성 기술은 중앙 관요나 지방 요를 불문하고 매우 뛰어났으며 예술성도 높고 수많은 경험에서 우러난 기술이 축적된 결과이다. 특히 조선시대 동화백자는 민화를 옮겨놓은 듯한 문양이 주를 이루는데 동물이나 식물, 칠보, 팔괘 문양 등이고 붓놀림은 능숙한 필치로 주저함이 없다.
사진1)의 「백자포도무늬항아리(白磁銅畵葡萄文壺)」는 산화동 안료만을 사용하여 문양을 그린 장식기법의 백자로 대형 항아리이다. 사기장의 오랜 경험에 의해 제작된 작품으로 산화동 안료를 사용한 붉은 발색이 진하고 좋다. 숙련된 사기장의 불조절 기술이 잘 이루어져야만 붉은색의 그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산화동 안료의 완벽한 발색으로 당시 추구하던 붉은색의 그림이 구현되었으며 몸통의 어깨 부분에 대칭으로 그린 포도문양은 매우 활달한 필치로 포도의 넓은 잎과 열매, 덩굴을 가식이나 망설임이 없이 대담하게 표현했다. 사진2)
이런 표현력은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모방할 수 없는 우리 민족만의 강점이자 특성이며 도자기 제작에 있어서 순수 예술혼의 경지를 나타낸다. 포도는 열매 한 송이에 많은 포도알이 열리고 그 속에 많은 씨앗은 다산의 자녀를 의미하며 주렁주렁 열리는 포도는 다복함과 부유함을 의미한다. 또한, 길게 뻗은 포도 덩굴은 강인한 생명력과 무병장수를 나타내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동화백자들은 대부분이 민요에서 제작된 작품인 데 반하여 이 작품은 18세기 말~19세기 초에 분원 왕실요에서 특별히 주문 제작된 관요자기이다. 맑고 투명한 백자 유약과 정선된 백자토를 사용하였고 받침은 굵은 모래받침을 사용하여 모래알이 굽바닥에 남아있다. 사진3)
조선 후기에 생산된 동화백자(銅畵白磁)는 아직까지 생산지조차도 확인이 안 되었고 다만 개성(開城)이나 해주(海州), 강화 교동이라는 설이 있으나 도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아마도 조선말 해주지방의 독특한 백자생산을 감안해 본다면 해주지방의 어딘가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일제강점기 야나기 무네요시(1889년~1961년)는 진작에 조선의 아름다움에 눈을 떠 여러 종류의 동화백자를 수집하였다. 사진4)~사진6)
그가 수집한 우리나라 문화재는 공개되어 연구자는 별도의 열람이 가능하다. 식민지로 나라가 전락하여 민족문화의 정체성이 뿌리째 흔들릴 때 양심있는 일본 개인의 작은 역할이 후세에 긍정적인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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