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돋보기 17]
분청사기상감 모란무늬 작은 편병
粉靑沙器象嵌牧丹文小扁甁
글_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 평론가
「분청사기상감 모란무늬 작은 편병 粉靑沙器象嵌牧丹文小扁甁」 조선시대. 높이: 11.5cm 바닥지름: 5.8cm 입지름: 3.5cm
편병(扁甁)은 둥그런 병의 한 면이나 여러 면을 편평하게 하여 용도에 알맞게 병의 모양을 변형시킴으로써 기능을 향상한 것과 애당초 편평한 모양의 병으로 성형하여 특수기능을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구분된다. 전자(前者)는 남북국 신라 시대부터 도기(陶器)로 제작되어 고려 시대, 조선 시대까지 여러 형태로 이어지며 후자(後者)는 삼국시대부터 도기로 제작되었고 조선 시대는 백자나 분청사기로 제작되었고 석간주, 옹기 등으로도 만들었다.
백제 시대에 제작된 도기편병(陶器扁甁)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유물에 속하는데 몸통은 납작하며 목이 긴 것과 짧은 것이 있고 모두 어깨 부분에는 두 개의 고리가 달려있다. 이 고리는 끈을 연결하여 병을 안정적으로 벽에 걸어 놓거나 말을 타고 이동할 때 말안장에 고정시키는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제작된 납작한 편병은 액체를 담는 병의 기능에 이동의 편리함을 더하여 고안한 형태로 용도에 따른 기능을 추가한 한 단계 발전된 형태의 병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1)
양면이 납작한 형태의 편병은 고려 시대의 청자나 도기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사라지게 되며 조선 초기의 백자나 분청사기에 재등장하게 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둥그런 몸통을 성형한 후에 두들겨 만든 기법의 편병과 두 개의 대접과 비슷한 몸통을 서로 세워 붙여서 만든 납작한 편병을 도자기로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분청사기(粉靑沙器), 백자(白磁), 백태청자(白胎靑磁)(백자의 태토에 청자유약을 시유하여 만든 도자기), 흑유자기 등 다양한 종류의 편병이 제작된다. 사진 2~6)
조선 후기에는 보다 다양한 형태의 편병이 제작되기도 하는데 둥그런 형태의 몸통뿐만 아니라 사각형, 다각형의 몸통인 편병이 제작되기도 한다. 이 편병들은 몸통과 각 면의 점토판을 별도로 만들고 이어 붙여서 최대한 납작하게 만들었다. 백자 이외에는 석간주나 옹기로도 편병이 만들어지며 조선 초 기부 터 활발하게 제작되어온 도자기 편병이 조선 후기까지도 계속 명맥이 이어진다. 사진 7~9)
사진 10)의 「분청사기상감 모란무늬 작은 편병(粉靑沙器象嵌牧丹文小扁甁)」은 특별한 제작기법과 정교한 문양의 상감기법 등이 기존의 편병들과 구분되는 특별한 유물이다. 물레를 사용하여 몸통을 구형(球形)으로 만든 다음에 양쪽의 몸통을 두들겨서 거의 직각으로 편평하게 만든 작은 기물임에도 정성을 다하여 제작하였고 문양은 조선 전기에 유행하던 인화문과 모란무늬를 면상감기법으로 양면에 장식했다.
편평한 양면에는 둥그런 원안에 한줄기와 두 줄기의 모란꽃과 잎을 추상적으로 단순화시켜서 면상감기법으로 새겨 넣었고 편병의 옆 부분은 인화문을 촘촘히 찍어 문양화하였다. 소박한 듯 보이는 모란무늬는 부를 상징하는 의미로 세련되고 간결하다. 정선된 태토에 맑고 투명한 유약을 얇고 고르게 시유 하였으며 바닥 굽은 유약을 닦아 낸 흔적이 남아있다. 이 유물처럼 작은 기물에 문양을 면상감할 경우, 태토와 상감백토의 서로 다른 성질 때문에 가마에서 소성할 때 상감한 부분이 갈라지는 경우가 많다. 즉 실패할 확률이 높은 것을 감수하며 정성껏 제작한 유물이다. 사진11~15)
조선 전기에 제작된 작은 편병은 여러 점이 전하고 있으나 그 수량은 매우 제한적이며 희소하다. 이 작은 편병의 용도는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지만,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의 개인용 술병으로 한 손으로 잡고 따르기 편하도록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넓고 안정된 굽과 약간 경사지게 벌어진 입술은 납작한 몸통과 균형을 이루며 조화롭다.
이 작은 편병 한 점에서도 500년 전에 우리나라 도자기의 맥을 이어가던 사기장의 현란한 기교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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