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돋보기 24]
백자철화모자모양 명기
白磁鐵畵母子形明器
글_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 평론가
사진1) 「백자철화모자모양 명기 (白磁鐵畵母子形明器)」 조선시대 17세기, 높이 7.5cm, 바닥지름 2.8cm
신라는 왕이 서거하면 남녀 10명을 순장(殉葬)하였고, 대가야의 발굴된 무덤에는 복합적인 고대국가의 순장제도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신라 지증왕이 순장을 금지하기 전에는 무덤의 주인공과 시중을 받들던 주변인을 함께 묻는 순장제도가 고대국가에서는 일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고구려는 순장의 흔적이 발견된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삼국사기』에 ‘동천왕이 서기 248년 서거하자 왕을 따라서 죽어 함께 묻히려는 신하들이 많아서 아들인 중천왕이 이를 금지하였지만 장사하는 날에 무덤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많았다.’ 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자발적인 순장의 한 단면과 고구려에서 순장을 금지한 시기를 동시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순장제도는 왕이나 귀족이 죽으면 주변에서 시중을 들던 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죽임을 당하여 내세에서도 현세처럼 주인의 시중을 들게 하려고 무덤에 함께 묻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순장제도가 폐지된 것은 그만큼 순장제도의 폐해가 심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종이라도 원치 않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순장이 금지된 이후에는 무덤 속에 시신과 함께 시종대신에 사람이나 동물의 모형을 만들어 부장품으로 매장하게 되는데 조선시대는 재질에 따라서 크게 도용(陶俑), 목용(木俑), 토용(土俑)이 있다. 대부분의 목용은 부식되어 유실되며 자기질과 토기질의 도용이 대부분인데 적은 그릇들의 명기와 함께 출토되어서 명기의 일부로 인식되기도 한다. 사진7)
사진1)은 「백자철화모자모양명기(白磁鐵畵母子形明器)」로 일종의 도용이다. 조선시대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물은 아기를 업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작품이다.
철화안료로 칠한 머리는 가체(加髢)를 했는데 조선시대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 때 여인들은 가발을 만들어서 머리에 둘렀다’ 하여 이미 가체의 기원이 삼국시대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연산군일기』에는 공주의 혼례를 위해서 가체를 150개나 사용한 기록도 보인다.
당시 가체의 가격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왕실, 양반가나 풍족한 계층의 여인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아기를 업은 어머니의 지위는 상류층으로 짐작된다. 몸통의 하체는 나팔모양으로 벌어져 치마를 입은 상태이고 상체는 풍만한 젖가슴을 드러낸 모습으로 방금 수유를 마치거나 시작하려는 모습으로 생각된다. 어머니의 왼쪽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업혀 있는 아기는 양팔을 넓게 벌려서 어머니의 어깨를 잡고 매달려 있는 모습으로 현대인의 어린 시절과도 비슷하다. 사진2~사진5)
17세기 경기도 일대의 관요백자 생산지에서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되며 바닥에는 모래알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로 급히 부장용으로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사진6) 조선시대 사람 모양의 명기는 초기부터 중기까지 왕실이나 양반계층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사례가 있으며 대부분은 시녀, 시종으로 사후세계의 도우미들의 모습이다. 반면에 사진1)의 「백자철화모자모양명기」는 아기를 업은 어머니의 모습으로 현존하는 유물 중에 유일한 작품이다. 당시에 아기를 업은 명기를 만든 사연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어머니의 애틋한 모정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어머니의 모정은 17세기 조선시대나 현재의 후손들이나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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