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환 교수의 문화재 기행 38]
분청사기 철화 풀꽃무늬 장군
粉靑沙器鐵畵草花紋缶
글_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 평론가
사진1) 「분청사기 철화 풀꽃무늬 장군」조선시대 높이: 23cm 입지름: 5cm 바닥지름: 8cm
분청사기는 일명 분청자로도 불리는데 그 의미는 서로 다르다. 분청사기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용어이고 그 의미는 고려시대로부터 이어 온 상감청자와 조선시대에 발생한 백토분장의 자기들을 모두 포함한다. 엄밀히 구분하면 조선시대의 상감청자는 분청사기에 해당되지 않지만 통칭하여 지금까지 잘못 사용되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윤용이 교수는 분청사기를 조선청자와 분청자로 구분하여 잘못 사용되고 있는 용어를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조선왕조 도자 오백 년』,「조선 초기 분청자와 백자의 세계」, 윤용이, 동곡박물관, 2023년)
분청사기는 백토분장을 하는 방법에 따라서 귀얄분청, 덤벙분청, 반덤벙분청으로 나뉘며 무늬를 넣는 방법에 따라서 철화(鐵畵), 조화(彫畵), 박지(剝地), 상감(象嵌), 인화(印花) 등으로 다양하다.
사진1)의 「분청사기 철화 풀꽃무늬 장군」은 조선 초기 충청남도 계룡산 주변의 분청사기 가마에서 생산된 작품이다. 장군은 물이나 술을 담아 사용했던 그릇으로 세워 놓거나, 눕혀 놓을 수 있도록 몸통의 물레 성형 후에 별도의 굽을 만들어서 붙였다. 입구에서 굽바닥 안쪽 면까지 골고루 백토분장(白土粉粧)을 하고 산화철 안료를 사용하여 추상적인 풀꽃무늬를 양쪽 몸통과 옆면의 세 곳에 그려 넣었다. 사진2~5)
추상적인 풀꽃무늬는 사기장(沙器匠)의 솜씨로 추정되며 전문적인 화공(畫工)의 솜씨는 아닌 듯하다. 오히려 이런 계통의 무늬가 계룡산 지역에서 생산된 분청사기의 특징으로 인위적인 도자기에 자연미가 가미된 아름다움으로 탄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분청사기를 소성할 때는 세워서 소성하였으며 바닥에 해당되는 부분은 백토분장을 하지 않고 유약을 닦아낸 후에 모래 받침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입구 부분은 밖으로 약간 벌어졌으며 타원형의 창 속에 두 줄기의 단순한 넝쿨무늬를 그려 넣었고 입구의 한 부분은 탈락이 되어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사진4, 6)
같은 지역에서 생산된 도자기라도 그 예술성은 천차만별인데 명품은 그중에서도 매우 희귀하다. 계룡산 분청사기의 경우는 몸통에 칠해진 백토분장의 색이 진할수록 좋고 무늬를 그린 철화의 발색도 진할수록 좋다. 아울러 그려진 무늬의 예술성과 도자기의 기형, 보존상태, 희소성 등을 종합하여 명품의 반열을 구분한다. 이 작품 또한 명품의 반열에 포함되는 유물로서 희귀한 유물로 평가된다.
구한말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들이 계룡산 분청사기의 추상적인 무늬를 보고 환호하며 피카소를 연상하던 내면에는 최소한의 인위적인 부분에 자연의 아름다움이 배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 분청사기의 무늬는 도식화, 정형화되지 않고 흔히 볼 수 있던 자연의 소재를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근대 일본 전통미술의 가장 사랑받는 모티브는 들판에 자연스럽게 피어난 풀꽃인데 이미 조선시대 초기에 분청사기의 문양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들이 놀라고 존경스러워 감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침략자들이 발견한 조선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문화적인 열등감을 느꼈을 때, 한편으론 동경하며 다른 한편으론 문화적인 위기감으로 탄압과 말살의 억압 정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문화적 우위에 있던 한민족은 기어코 광복을 이루어 내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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