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로고

Top
기사 메일전송
세계의 티팟
  • 편집부
  • 등록 2003-09-22 21:08:05
기사수정
The Story of Teapot⑶ 세계의 티팟 글/사진 박수아 홍익대학교 도예연구소 연구원 중국의 명시대(1368-1644) 초기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티팟은 17세기 경 유럽으로 수출되며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에 전파되었다. 이 글에서는 중국의 이싱티팟과 미국의 티팟을 중심으로 티팟의 발생과 발전과정 등을 살펴보고, 이들의 특징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중국의 이싱티팟 중국에서는 명시대(1368~1644) 초기부터 찻잎을 우려내 차를 만드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최초로 등장한 티팟은 이싱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싱 전통의 도자기는 송시대(960~1279) 때부터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이싱에서 생산된 티팟은 17세기 초, 차무역을 통해 유럽으로 건너가면서 서양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네덜란드, 독일, 영국 등에서 만들어진 티팟의 모델이 되었다. 이싱티팟은 세밀한 입자의 진한 보라색 또는 불그스름한 갈색의 흙을 사용하여 제작된다. 또한 작은 크기, 정교한 묘사, 풍부한 표현력, 뛰어난 비례감각 및 구성력, 상징성과 설화적 성격 등을 특징으로 한다. 전체적인 형태는 단순하지만 매우 기능적이며, 표면에는 나뭇잎, 과일, 동물 등 자연을 소재로 한 문양이 그려졌다. 이싱티팟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무유소성이라는 점이다. 시유하지 않은 점토는 흡수성을 갖기 때문에 차향이 점토에 배어든다. 따라서 오래 사용하면 특이한 향과 함께 골동품적 분위기가 만들어지게 된다. 오랜 기간 잘 사용한 티팟 일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현상은 이싱티팟에 있어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다. 심지어 매우 오래된 이싱티팟에는 찻잎을 넣지 않아도 차를 끓일 수 있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싱티팟은 수공예품으로서, 도예가들이 몇 년 또는 몇 십 년에 걸쳐 기술을 발전시킨 결과이다. 따라서 한 작가의 하나의 디자인에서도 그것이 생산된 시기에 따라 질적 수준이 여러 단계로 나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작가들은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스타일을 연구하여 새로운 형태와 디자인을 탄생시키고 발전시킨다. 기본적으로 모든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지만, 필요에 따라 몰드를 이용하여 제작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주로 대량생산되는 티팟에서 많이 쓰인다. 이싱티팟은 어떤 작가들에게는 가이드라인으로서, 어떤 작가들에게는 자극과 출발점으로서 기능한다. 많은 수의 티팟작품들이 형태에서 느껴지는 이미지 등에서 이싱전통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재료 등의 측면에서 간접적인 연관을 가지는 작품도 있다. 이싱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작가, 리차드 놋킨(Richard Notkin)은 작업노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중국의 이싱에 대한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이 티팟을 만들었다. 이싱의 무광 티팟이 보여주는 규모, 형식, 색상, 질감을 흉내 내려 했다. 나의 제작 의도는 이싱티팟에 경의를 표하면서 정직하게 그 특성을 그대로 빌려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만든 티팟은 이싱과는 완전히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현대문명에 대한 나 자신의 견해가 반영되어 있으며, 21세기로 접어드는 시대의 인간사회의 현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놋킨과 같은 부류의 작가들 대부분은 이싱티팟이 가지고 있는 특징 중 형식적인 부분을 취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표현하고 있는 의미를 풀어내는 방법으로 작업한다. 이렇듯 이싱티팟은 형태나 색에서 오는 미감과 그것이 가진 독특한 특성으로 인해 차 애호가들과 도예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늘날 이싱 작가들은 다시금 번영하고 있다. 급속히 확장된 티팟시장과 컬렉팅은 그들이 전성기를 구가하는 데에 공헌한다. 이싱티팟은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컬렉팅의 품목이며 많은 도예가들이 그것을 직접 보고 느끼고 경험하기 위하여 상하이에서 200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싱지역을 방문하고 있다. 미국의 티팟 미국의 도예는 1940년대까지 개인적 표현이 주류를 이루었다. 19세기 말 경 도예에 대한 정식교육이 시작되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순수미술의 관점에서의 도예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당시 기본적으로 강조한 것은 공예의 기술적 부분이었으며 교육을 통해 학생들을 교사나 산업근로자로 육성하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많은 유럽 도예가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이들은 대학의 교사로 자리잡았다. 게트루드(Gertrud)와 오토 나즐러(Otto Natzler), 마그리트(Marguerite)와 프랜스 윌덴하인(Frans Wildenhain), 마이자 그로텔(Maija Grotell) 등은 유럽 디자인의 컨셉인 디자인과 기능의 결합, 순수미술과 공예를 동등시한 바우하우스(Bauhaus)의 이상을 가져온 이들이었다. 버나드 리치와 같이 그들은 삶으로서의 작업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였으며, 대학의 교사로서 교육적이고 실험적인 강의를 통해 다음 세대의 리더가 될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2차 세계대전은 대학을 비롯한 교육기관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다수의 퇴역 군인들이 대학에 입학하였고 몇 년 후 한국 전쟁의 종전 후에도 같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성인교육의 갑작스런 증가는 더 많은 교사의 수요를 창출했고 이에 따라 각 대학은 수백 명의 작가를 채용하였다. 대학 공예과, 시골의 공예학교, 미술센터, 미술협회 등에서 도예 프로그램이 활성화된 것은 공예 전시의 증가와 공예품 유통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단체결성이나 잡지창간의 움직임도 활발했다. 1941년 공예와 관련된 다양한 그룹들에 대한 ‘교육적 서비스’의 하나로 크래프트 호라이즌(Craft Horizon)이 출간되었다. 에일린 오스본 웹(Aileen Osborn Webb)은 공예를 이해하고 가치를 인정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1943년 미국공예협회(American Craft Council)를 창립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결국 전국적인 공예 커뮤니티의 발전을 야기하였다. 리치전통으로 알려진 공방도예의 모델을 창안한 버나드 리치와 하마다 쇼지는 1950년에서 1952년까지 미국을 여행하며 도자기를 제작하고 교육하는 많은 학교와 센터를 방문했다. 미국의 도예가들은 그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가 조각적 성향의 도예, 즉 도조(陶彫)의 기원으로 널리 알려진 피터 볼코스(Peter Voulkos)였다. 볼코스의 초기작업은 리치전통의 실용적인 기(器)였지만, 리치의 가르침과 추상표현주의 화가의 자발성을 결합시켜 점토를 이용한 완전히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의 강의 내용 중, 2분 안에 티팟 만들기와 같은 것은 학생들의 선입견을 깨뜨리려는 시도의 하나였다. 모든 것을 실험하고 분석하고 대항하던 그 시대의 그 장소에서 소박한 형태의 티팟은 존재하지 않았다. 1960년대는 기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실험의 기간이었다. 화병은 도조의 출발점이었고 컵이나 티팟과 같은 다른 아이템들도 표현의 재인식을 자극하는 연료로 작용하였다. 1960년대를 지나며 티팟은 예술적 표현의 매개체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1965년 뉴욕의 현대공예박물관(Museum of Contemporary Crafts, 현 American Craft Museum)은 ‘티팟(The Teapot)’이라는 전시를 기획했다. 당시 작가들은 전통을 깨뜨리며 새로운 방향을 찾고 있었고, 이 전시는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였다. 루디 오티오(Rudy Autio), 캐런 칸스(Karen Karnes), 데이빗 맥켄지(David Mackenzie), 켄 퍼거슨(Ken Ferguson), 마이클 코헨(Michael Cohen), 제임스 리디(James Leedy), 피터 볼코스(Peter Voulkos)와 리차드 쇼(Richard Shaw) 등이 전시에 참여하였고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받은 전통적 스톤웨어에서부터 스칸디나비아와 일본 전통의 영향을 받은 작품, 풍자와 해학이 담긴 조형작품 등, 다양한 성향의 작품들이 출품되었다. 해리엇 굳윈 코헨(Harriet Goodwin Cohen)은 크래프트 호라이즌(1965. 5, 6월)에 실린 비평에서 “하나의 테마와 엄선된 23명의 작가 그룹은 이 전시를 현재의 미국 도예계를 폭로하는 작은 세계로 만들었다… 저화도, 선명한 색채, 유머 등 새로운 종류의 표현기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능에 대한 완벽한 무시만이 피터 볼코스의 ‘그릇이 절대 그릇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엄청난 발견과 연계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당시는 미국 도예에 극히 중요한 시기였으며, 지각하지 못할 정도의 놀라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 일어난 반체제운동은 대학교육을 받은 젊은 예술가들을 공예운동으로 이끌었다. 당시의 진보된 기술은 작가들에게 발전된 시설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탄생한 작품은 아트샵, 갤러리와 아트페어 등에서 판매되었고, 도예 시장의 확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다양해진 전시, 행사는 아이디어나 정보의 교환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티팟이 작가들에게 인기 있는 아이템으로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갤러리들은 티팟, 컵, 테이블웨어 등의 주제로 쇼를 개최하였고 컬렉터들의 관심을 끌어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로 인하여 1980년대에 이르러 티팟이라는 장르는 미국 도예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1990년대 티팟 컬렉팅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경제적인 면에서 작가들을 뒷받침해주었다. 이에 따라 티팟을 개인적인 표현을 위한 형태로서 탐구하던 작가들의 작품은 절정에 다다를 수 있었다. 컬렉터들은 적당한 가격의 공예품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기이하고 예술적인 작품을 찾기 시작하였고, 경제적으로 풍요롭던 당시의 상황은 그들이 보다 우아한 기호에 탐닉할 수 있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이 장르의 발전을 지원하는 요소가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기사를 사용하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s://www.cerazine.net

 

0
회원로그인

댓글 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monthly_cera
세로형 미코
03미코하이테크 large
02이삭이앤씨 large
오리엔트
미노
삼원종합기계
진산아이티
케이텍
해륭
대호CC_240905
01지난호보기
월간도예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