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환 교수의 문화재 기행 53]
백자 청화 산수누각무늬 사각병
白磁靑畵山水樓閣紋四角甁
글_김대환 동곡뮤지엄 관장·문화유산 평론가
「백자 청화 산수누각무늬 사각병」 조선시대⎜높이 18cm, 입지름 4cm, 바닥굽 9.5x9.5cm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기로 일컬어지는 18세기에 들어서면 조선백자는 몸통이 각이 진 각형자기角形磁器가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각형자기는 물레로 원형의 자기를 성형한 후에 이른바 ‘모깎기 기법’을 하여 표면이 각이 지게 만든 기법과 처음부터 잘 정제된 백토를 사용하여 몸통 기벽의 판을 여러 장 제작하고 잘라낸 다음에 서로 붙여서 몸통을 만드는 ‘판형기법’으로 나눌 수 있다.
판형기법은 물레성형의 모깎기 기법보다 까다롭고 정밀한 제작이 필요하다. 점토판을 서로 맞붙여서 몸통을 제작하면 건조할 때나 소성할 때 붙인 부분이 균열이나 터짐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흙과 흙을 서로 이어 붙이는 과정에 조금의 틈이 생겨도 소성이나 건조할 때 균열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작 과정의 까다로움으로 인해서 판형기법으로 제작된 사각병은 생산 수량이 적었으며 현존하는 작품도 귀한 편이다. 한편, 모깎기 기법으로 제작된 각병은 대체로 육각이나 팔각으로 제작되었는데 물레로 몸통을 성형한 후에 대나무 칼 등으로 입구에서 바닥 굽까지 단숨에 일정한 간격으로 내려 깎아서 몸통의 표면을 각이 진 형태로 제작하는 기법이다. 이 작업 역시 고도로 숙련된 사기장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매우 어려운 공정이다. 사진7)
사진1의 「백자 청화 산수누각무늬 사각병」은 제작 과정이 매우 까다로운 판형기법으로 만든 사각 병으로 18세기 후반경에 왕실 관요에서 제작된 유물이다. 이 사각병은 고급의 정선된 하얀 태토를 사용한 사각기둥 모양의 몸통에다 가운데가 좁아지는 유선형의 긴 목에 벌어진 입구를 별도로 성형하여 붙였다. 몸통이 안정적인 형태의 수준 높은 유물로 어깨의 모서리를 비스듬히 깎아내고 고운 발색의 청화안료를 사용하여 무늬를 그려 넣었다. 모깎기를 한 어깨 부분의 경사면에는 간략화된 넝쿨무늬를 그렸고 몸통의 4면에는 각각 테두리 선으로 면을 구성하고 그 속에 원경, 중경, 근경의 산수 인물무늬를 세련된 필치로 능숙하게 그려 넣었다. 마치 4폭의 산수화 병풍이 펼쳐진 모습이며 몸통에 그려진 산수무늬 중에 사진4는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중에 산시청람山市晴嵐으로 가까운 근경에 높게 솟은 바위 사이에 이야기하는 두 사람을 배치한 것이다. 산수화의 격이 매우 높아 왕실의 화원화가 작품으로 생각된다. 사진2~4)
몸통에는 용융상태가 좋은 맑고 투명한 백자 유약을 입혔고 빙렬이 없으며 광택이 은은하다. 청화의 발색은 옅은 담청색으로 18세기 후반 최상급의 왕실 작품으로 추정된다. 바닥 굽은 유약을 닦아내고 가는 모래 받침을 받쳐서 구운 후에 굽에 묻은 모래를 깎아낸 흔적이 남아있다. 사진6)
이 시기에는 사옹원 분원의 사기장들에게 소성하는 가마의 일정량을 사대부가에 팔아서 생계에 활용하도록 허용했는데 문인이나 사대부들이 선호했던 산수무늬, 길상무늬 등이 백자의 무늬로 즐겨 사용되었다. 특히 시서화에 능했던 영조는 왕세자 시절에 도제조를 겸임했는데 즐겨하던 산수화를 도자기에 직접 그려서 산수무늬 백자를 취하기도 하였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조선 왕실은 피폐해진 사회를 복구시키기 위해 재정을 긴축하고 경제부흥을 위한 노력을 하였으며, 성군인 영조와 정조가 바른 정치를 펼쳐서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적인 부가 축적되면서 조선 후기 백자의 발전도 가속화되어 조선 후기의 새로운 도자 중흥기를 이루게 된다. 왕실이나 문인 사대부들이 필요로 하는 자기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 등장하며 다시 한번 도자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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