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적 자연’으로의 귀환
글/허정선 미학·미술비평
유기체로서의 인간과 동물의 희노애락은 추구하는 양상은 다르지만 그 내용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인간은 산업사회의 진통을 겪으면서 ‘동물적’ 감각을 외면하고 ‘기계적’ 감각에 보다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기계적 감각에 의존해 온 인간의 삶은 인간 소외의 갈등은 물론 생태계의 파손과 핵전쟁의 위협 등으로 인한 생존의 위협마저 겪게 된다. 이것은 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자연을 문명의 대립적 개념으로 간주하면서, 무분별한 개발 등으로 자연의 질서를 파괴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미국의 실용주의 미학자 존 듀이(John Dewey)는 산업사회의 갈등과 모순을 극복하는 길이 기계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 동물적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의 리듬(rhythm of nature)’에 동화하는 유기체적 존재의 속성을 회복할 때 가능하다.
이점찬은 인간과 동물의 형상이 임의적으로 뒤엉켜 있는 ‘부정형의 접시’들을 통해 이 시대를 구원해 줄 「꿈꾸는 접시」를 기다리고 있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 자연에 대한 문명의 우위가 아니라 동물과 인간, 자연과 문화의 유기적 질서를 회복하는 ‘접시’, 그것을 그는 꿈꾼다. 말하자면 타자를 억압하고 동일자를 끌어 모으는 근대적 의미의 기념비적인 영웅으로서의 ‘접시’가 아나라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불일치와 부조화를 끌어안는 ‘접시’이다.
현실 속에서 이러한 접시를 꿈꾸는 것은 신화를 향한 열망과도 같다. 흔히 신화는 현실에서 이룰수 없는 꿈의 은유로 자주 사용된다. 작품에 장식된 푸른색조의 유색(釉色)은 이러한 신화적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이집트에서 푸른 색조는 모든 악귀를 물리치고 부활의 의미를 갖는 신성한 색으로 간주되었다. 손의 촉감을 이용해 흙의 물성을 극대화시킨 「이브로의 여행」 연작은 푸른 물결 위에 여성나상을 띄우고 있는데, 이 나상은 신화적 자연을 상징하는 ‘이브’이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 ‘눈이 맑지 않은’ 이브는 인간의 지혜를 사용하면서 살아가기보다 자연의 본성에 보다 많이 의존하면서 살았다. 점점 기계화되어가는 후기산업사회의 현실, 그 속에서 일탈하고 싶은 작가의 꿈은 마치 우리를 신화적 자연의 세계, ‘이브의 세계’로 안내하는 듯 하다. 예술가가 그려내는 것은 현실에 기초해 있지만, 어떤 점에서 예술은 현실에서 벗어나 일탈의 기쁨을 맛보게 하는 카타르시스를 우리에게 안겨준다. 예술을 통한 정서적 해방감이 작가에게는 원초적 자연의 모습만이 아니라 신비감을 자아내는 신화적 자연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동물과 인간 그 유기적 형상들의 뒤섞임에는 억압의 모든 사슬을 끊고 신화적 자연의 세계로 회귀하고픈 자유의 노래가 깃들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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