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도자, 그 개념과 현대적 의미
글/사진 최 건 광주조선관요박물관장, 도자사
우리에게 전통도자라는 용어의 개념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분명한 해답을 얻기란 그리 쉽지 않다. 『월간도예』의 12월호 특집 주제 “2003년 한국 도예계를 돌아본다”에도 예외 없이 ‘현대도예’와 ‘전통도예’라는 말이 대립적 개념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우리에게 현대도자는 무엇인가, 전통도자와 전승도자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조형도자는 무엇이고 생활도자는 과연 무엇으로 구분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 정말 어지럽고 혼란스러워 진다. 더욱이 세계도자에서 비중이 높아져 상당한 공신력을 갖는 제2회세계도자비엔날레 공모전에서, ‘조형부문’ 입상작품을 보면 그나마 수긍이 가지만 ‘생활부문’ 입상자의 경우에는 작가 스스로가 ‘조형’과 ‘생활’을 구분한 잣대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는 점을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아니면 공모자들이 ‘조형부문’과 ‘생활부문’으로 공모 신청한 그대로 심사하고 입상작을 결정한 것이라면 구태여 ‘조형과 생활’을 구분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생활도자도 엄연한 삼차원적 조형물인데, 그러면 조형도자라는 구분도 타당치 않다는 말이 아닌가.
물론 조형미술의 큰 테두리 안에 있는 도자의 각종 양태들을 무 썰 듯이 딱 잘라 놓을 수는 없다. 어느 정도는 상당한 부분 공유하면서 각각의 개성이 분명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일반 보편적 문화 형태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특히 조형미술의 경우 ‘전통 ― 전승’, 그리고 상대적으로 ‘현대 ― 조형’이라는 개념은 명확하게 구분해 말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사실 문제의 요인은 우리 사회가 오랜 동아시아적 농업사회로부터, 20세기전반 불과 수 십 년에 지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세계 선진국가의 산업사회를 목표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난 현상이다. 말하자면, 19세기 조선왕조까지는 전통의 시대이며, 20세기전반은 일제에 의한 치욕적인 근대화 기간으로 청산해야만 하는 불행한 시대이며, 20세기후반은 선진 서양(미국, 유럽, 현대화된 일본)의 제반 문화와 문명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던 기간으로서 한국적인 모든 요소들이 재편성되는 변혁의 시대였다는 점이 ‘전통 ― 전승’, 그리고 ‘현대’라는 단어의 개념과 의미를 어지럽게 만든 요인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문제는 근대와 현대를 독자적이며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선진 산업사회 국가들은 거의 느낄 수 없는 문제이다. 독일이나 영국, 일본, 미국은 18세기 문화가 발전하여 19세기로 오고 다시 20세기 21세기로 전개되어 정신세계나 물질세계에서 세계사적 발전과정의 선두에 서서 급격한 변화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나라마다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세계사적 보편성을 확보하는 한편 민족 고유의 독자적 특수성을 계승하면서 개성 있는 문화를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국가들이 세계사적 보편성을 확보하는 필연의 목표를 이루면서도 민족 고유의 특수한 문화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국은 가장 영국적으로, 이태리는 가장 이태리 적으로, 일본은 가장 일본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근본적 요인은 그들이 자기의 고유문화를 현대적으로 조화시키면서 발전의 에너지로 응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국 근대와 현대의 과정에서 역사 단절이 전통과 현대를 전혀 다른 대립적인 것으로 만들고 문화적 갈등을 부르는 직접 원인이었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8, 19, 20, 21세기를 단절 없이 지나온 선진국들은 세계사적 보편성과 민족 고유의 특수성이 이상적으로 조화되어 그때그때 새로운 전통을 창출하면서 발전해 온 결과 현대에도 선진의 대열에 서서 세계문화를 리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19세기까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적 농업사회에서 20세기전반 일본 중심의 식민지 산업사회를 거쳐 20세기 후반 서양을 모델로 한 후발 산업사회를 겪는 단절의 시대를 거치면서 심각한 갈등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일제시대를 결코 씻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시대라고 하며 그 시대를 부정했다. 해방과 70년대 이후 서양 산업사회를 모델로 한 개발도상국 대열에 들어가면서 일제에 짓밟힌 민족적 자부심 회복이라는 시대적 과업을 어느 정도 이루게 되는데, 이 때에 와서 비로소 고려·조선시대 문화의 정신을 우리가 계승해야 할 자랑스러운 전통이라는 인식이 크게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전통 ― 옛 고려와 조선의 문화’, ‘한국의 현대 ― 서양 모델의 산업사회’라는 지극히 한국적인(후발 산업국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이분법적이며 대립적 논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물론 21세기 들어서도 ‘전통’ 또는 ‘현대’라는 대립적인 사회일반의 이해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예컨대 그림의 경우 유화를 그리면 ‘현대’이며, 동양화식 수묵화를 그리면 ‘전통’이라고 단정지어 말하는 것이 보편적 이해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현대’라는 말에 ‘서양적’이라는 의미가 교묘하면서 큰 비중으로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사실 ‘현대’라는 말은 오늘이라는 시대적 개념이다. 지금 이 순간인 현대에 수묵화를 그리면 ‘현대에 그린 수묵화’이지 ‘전통’이라는 개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서양미술의 조류를 따라 그린 수묵화이면 ‘현대에 그린 서양적 표현의 수묵화’이며, 고려·조선 미술의 전통을 계승해 그리면 ‘현대에 그린 전통적 표현의 수묵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도자기의 경우 ‘전통(전승)과 현대’라는 대립적 이해는 다른 경우보다 더 골이 깊어져 있다. 한국적 ‘현대’의 입장에서 보면, 일제시대와 20세기 3/4분기에 폭발적인 호황을 누리고 아직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고려·조선시대의 도자기를 계승하려는 복원과 재현이 목표인 ‘전승’ 개념의 청자·백자·분청은 청산되어야 할 비창조적이며 비미술적이며 비현대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반면 ‘전승’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전후부터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받은 현대미술 조류의 하나인 ‘현대(서양적)’ 개념의 조형도자는 반국가적이며 비사회적이며 비생산적이라는 점을 반박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여기에 문제의 요인으로 작용하는 미묘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현대’측이 현대적 미술교육 과정을 거친 혜택 받은 사람(대부분 대학교수와 그 제자들)이며, ‘전승’ 측은 어려서부터 공장 주변에서 뼈가 굵어진 특별히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문제까지 포함되어 있다.
한편 ‘전통’이라는 개념은 ’70년대부터 조금씩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산업발전과 함께 국민소득이 상승하고 일제에 억눌렸던 민족적 자부심이 일깨워지면서 민족 고유 문화에 대한 향수가 사람들의 관심을 영광스러운 고려·조선시대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전통과 전승의 개념이 분명하지 못했다. 전통은 민족문화에서 변하지 않고 일관되게 계승되는 무형의 정신적인 것이며, 전승은 재료와 기법 형태 등 가시적이며 실물적이라는 개념이 구분되지 않고 뭉뚱그려 이해되었던 것이다.
아마 80년대 들어 문화인들 사이에서 전통에 대한 정당한 개념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전통이란 ‘세계사적 보편성을 확보하면서 민족 고유의 정신을 내포하고 있는 무형의 에너지로서 일정한 방향을 갖는 것’이라는 것이다. 전통은 시각적으로 항상 변화하는 생명체 같은 것이며 시대 감각을 예민하게 받아드리면서 독자적 에너지로 조화되는 과정에 만들어진다. 예컨대 고려시대에 청자를 계승, 전승만 하였다면 우리는 현재에도 청자만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말 조선초에 세계의 큰 흐름이 백자로 움직이자 재빨리(시대감각에 맞추어) 백자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중국 것을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자체 발전과정을 통하여 완전히 한국적인 것으로 만들었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조선의 백자는 세계사적 보편성을 확보하고 민족 독자적인 특수성도 유지하는 이상적인 현대적(그 당시로서 현대라는 의미) 전통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전통’이라는 의미에는 시대적으로 ‘현대’를 포함하고 있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궁금한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전통’은 가시적 실체가 아닌 정신적인 것이라 규정하면서, 왜 우리는 고려·조선의 것을 빌려와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의 이해에 접근하기 위해 시각을 현대 국제사회의 경향으로 돌려 볼 필요가 있다.
20세기후반, 세계는 산업사회에서 지식·정보사회로 커다란 변화를 시작하였다. 거대한 다량생산 체제에서 고부가가치 창출로 관심이 이동되기 시작하였다. 기술 보편화에 따라 산업 성패의 열쇠가 문화에게 맡겨진 것이다. 이제 문화가 최고의 고부가가치이며 새로운 문화의 창조는 거대한 부를 안겨주는 지름길이자 유일한 선택이 된 것이다. 지식사회에서 창조는 1등이며 모방은 2등이다. 국제사회에서 1등은 승전이며 2등은 완전한 패전인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이태리의 디자인을 따르려 해도 이태리를 능가할 수 없다. 우리에겐 이태리인 민족 고유의 정신(곧 이태리의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그 반면 일본인은 무슨 방법을 써서도 한국의 도자기를 만들 수 없다. 그들에겐 한국적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1등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형 무형의 문화적 유산을 상속받고 또 그것을 계발하여 현대화(국제화)시키는 방안이다. 이러한 이해에서 보면, ‘전통’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화된 시대에 우리민족 독자의 최선의 선택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에도 많은 독자들은 ‘아직도 혼란스럽다’라고 말할 수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수천 수만 가지 개성의 도자 작품들을 어떻게 무 썰 듯이 딱 잘라 분류하겠는가. 현대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에서 긍정적 사고가 시작된다고 한다. 이제 우리 자신부터 많은 부분을 인정하고 공유하는 마음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가져야 할 때다.
필자약력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도자사 전공)
목원대학교 교수 역임
해강도자미술관 연구실장 역임
현, 문화재전문위원
광주조선관요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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