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고캐스팅의 긴장감과 물레의 부드러움 접목
단정하고 편안한 디자인의 그릇으로
합목적성 심미성 경제성 독창성은 굿디자인의 요건으로 꼽히는 요소들이다. 심미성으로 대변되는 아름다움은 개인차가 크기 때문에 독창성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고, 합목적성은 “가장 쓰기편한 디자인이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이라는 말로 강조되며 심미성과 경제성을 함축한다. 보기 좋고 독특하고 쓰기 편하고 제작이 용이할 뿐 아니라 기능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디자인, 이런 것을 굿디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릇에도 합목적성과 심미성 경제성 독창성이 부여된다. 그릇을 만드는 작가 고희숙(33)도 굿디자인에 대한 고민에서 열외일 수 없다. 좋은 그릇의 요건이 서로 대립되지 않고 균형을 이룰 때 좋은 그릇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그릇은 식문화를 위한 다양한 테이블웨어의 정점을 차지하며, 음식이 담겨지고, 때로 사람의 손과 입에 닿고, 부수적인 테이블웨어-식탁 패브릭 수저 등-와의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복잡한 기능을 잘 소화해내는 쓰기 좋은 그릇은 메카니즘의 집합체이다.
보편적이지 않은 형태 제작기법에 관심
쓰여질 그릇을 만드는 도예가는 디자이너기도하다. 미비한 오차의 같은 그릇을 수백개씩 만들 수 있는 숙련된 물레공과 석고틀의 기능에 합리성이나 경제성을 논외로 치더라도, 이미 물레기법과 석고틀 기법은 공예와 산업-혹은 예술과 산업-이라는 양분된 분류로 나눌 수 없는 상황이다. 고희숙은 흙을 이용한 형태제작기법의 선상에 수많은 점들 중 보편적인 제작방법에 가려져 있던 한 점에 관심을 갖는 작가다. 그의 그릇은 석고캐스팅과 물레성형이라는 같은 목적을 위한 이질적이 두 가지 방법의 결합에서 출발한다.
일본유학 시절 일본크라프트전 대상 수상
작가 고희숙은 대학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세토 요업기술센터의 연구생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아이치 현립 예술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대학원 수학 기간 중인 99년, 일본의 크라프트 디자인협회에서 주최하는 <일본 크라프트전>에 출품해 총 678명의 2,626점 응모작중 대상을 수상했다. 작가는 당시의 크라프트전 수상작에 대해 “석고캐스팅은 같은 형태를 여러 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저는 같은 형태 밖에 만들 수 없다는 단점을 갖고 있는 석고 캐스팅에 물레성형의 자연스러움을 더했다.”고 설명한다. 수상작인 「White Vessel(하얀 용기)」은 석고캐스팅의 단단하고 차가운 느낌에 물레성형의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느낌이 더해진 접시(대·중·소) 화병 화분을 한세트로 했다.
석고틀에 이장을 주입해 빼낸 석고캐스팅 기물의 전부분을 예리한 칼로 깔끔하게 잘라내는 대신 물레 위에서 손으로 마무리해 전이 평평하지 않고 높낮이가 다르거나 캐스팅의 기계적인 선과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의 형태를 만든다. 이장의 굳은 정도나 주입구의 높이는 작가의 손놀림에 따라 각기 다른 그릇이 된다.
귀국 후에도 일본에서 주로 활동
지난 토야테이블웨어 페스티벌에 참여해 호응
귀국 후에도 일본에서 몇 차례 개인전을 가진 적이 있었으나 갤러리의 보여주기 위한 전시가 아니라 백화점 행사장이나 아트숍에서 하는 판매위주의 전시였다. 한국에서는 지난 9월에 열린 토야테이블웨어 페스티벌을 통해 처음 선보였다. 고희숙은 (주)생활중심의 기획으로 이 행사에 참여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일본 소비자들이야 도자기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니까 하고 대해왔는데, 행사를 통해 만난 우리나라 소비자들도 그에 못지않았습니다. 아직까지 도자기 소비층이 얇고 보편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제 그릇들 중 정형적인 형태에서 벗어난 것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우리나라도 앞으로 많이 좋아지겠다 싶었습니다.” 토야테이블웨어 페스티벌을 통해 소비자들과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들 들은 것도 작가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오랫동안 기억되는 상품으로 남고 싶은 바램
“캐스팅이라고는 하지만 공정이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다보니 가격면에서는 아직 해결해야 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현재 생활중심과 함께 일하면서 단순공정에 투입되는 인력이 몇 명 지원됐지만 아직까지 손맛을 내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작가는 단품공예로서 작품으로서 그릇을 고집하지 않고 얼마든지 양산할 수 있게 되길 바라고 있다. “지금 만드는 그릇들로는 어렵지만 느낌만 좋다면 좀더 저렴하게 양산할 수 있는 새로운 디자인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제 그릇을 쓸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제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고희숙만의 도자기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제가 죽은 후에도 남아있을 디자인과 제품들이 갖는 의미가 더욱 크다고 생각합니다.” 고희숙의 은사인 아이치현립 예술대학 대학원의 사카에키 마사토시 교수는 자신의 손으로 만드는 캐스팅 작품 외에도 산업체의 도자기상품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선을 살린 외부 무유백자 위주
고희숙의 그릇들은 순도 높은 자기질 백토를 사용해 내부만 투명유를 시유하고 번조한다. 내부에는 청백색광택이 나고 외부는 태토자체의 질감이 드러난다. 시유되지 않은 바깥쪽은 손이나 입에 닿는 감촉을 좋게 하기 위해 번조 후 공들여 사포질을 해야 한다. 현재는 백색자기만 작업하고 있지만 이는 선의 느낌에 중점을 두고 작업한 그릇의 형태를 무광택 백색이 잘 살려주기 때문이다. 앞으로 디자인되는 형태나 용도에 따라 새로운 색감과 소지를 충분히 활용할 계획이다. 캐스팅된 부분의 직선 혹은 정형적인 곡선은 손으로 빚은 부분의 부정형의 선과 이어지면서 묘한 긴장감과 편안함이 교차된다. 정적인 여성스러움과 간간히 소녀 같은 미소를 짓는 작가의 이미지가 자신의 그릇에 담겨있다.
각기다른 작품이 매치되는 어울림과 균형의 미
99년 일본크라프트전의 도자기부문 심사위원장은 당시 고희숙의 작품에 대해 “틀에 의한 정형성과 물레선의 융합이 어딘지 모를 매력이 되고 있다. 푸르고 맑은 투명감 넘치는 유약을 내측에만 시유해 잘 구워진 자기질 표면의 아름다움이 강조돼 있다. 각각의 작품이 집합된 밸런스의 미에도 주목, 그의 뛰어난 디자인 감각, 감성의 날카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평가했다.
고희숙씨의 그릇들은 하나하나가 갖고 있는 느낌도 좋지만 모여 있을 때에 서로 매치되는 어울림과 균형이 좋다. 작가의 일관된 주제가 각각의 그릇에 반영되고 그것들이 가진 선들은 그릇이 놓이지 않은 공간까지도 매끄럽게 디자인하는 역할을 한다.
다양한 아이템 개발로 용도별 선택의 폭 넓혀
다양한 아이템을 만들어 쓰는 사람이 자유롭게 용도를 정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한 제품을 디자인할 때 스스로 염두에 두는 용도가 있다고 해서 자신이 생각한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갤러리에서의 전시보다 상품으로 행사로 소비자들을 가까이서 만나고 싶다고 전한다. 고희숙 그릇의 유통을 담당하고 있는 (주)생활중심 조용철 대표는 “지난번 테이블웨어 페스티벌에서의 호응으로 여러 곳에서 납품 의뢰를 받았지만, 오는 12월 인사동에 문을 여는 쌈지공예골목의 쌈지직영매장에 납품계약을 맺은 상태라 인사동 내에 다른 매장에는 납품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전했다.
굿디자인과 그릇, 아직 젊은 작가 고희숙의 시도는 상품으로 보면 평범하지만 우리 도예계의 현실에서는 다소 생소하다. 굿디자인의 그릇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도예가가 되고자 하는 이상을 향한 굳은 의지의 작업은 묵묵히 지속될 것이다.
서희영 기자 rikki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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