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박수아 홍익대학교 도예연구소 연구원
400여 년의 역사를 보유한 티팟(teapot)은 현대에 들어 작가와 컬렉터, 그리고 대중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아이템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티팟이 이와 같은 위치를 점하게 된 배경과 요인을 차와 티팟, 티팟의 출현과 발전, 세계의 티팟, 티팟의 성향별 분류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말로 찻주전자를 뜻하는 티팟은 주자(注子), 수주(水注) 등으로 불리기도 하나, 여기에서는 글의 내용과 성격을 고려하여 영어식 발음인 티팟으로 표기하도록 한다.
차와 티팟
티팟이 대중을 매료시키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독특한 의미와 가치 때문이다.
첫째, 티팟은 각 나라의 사회상과 문화수준을 읽을 수 있는 오브제이다. 티팟이 등장한 시기는 다르지만 한 나라의 사회적 상황과 국민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때로는 보스턴 티파티1)와 같이 정치적 사건을 야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둘째, 티팟은 동·서양 자기교류의 역사를 보여준다. 중국과 일본의 차와 티팟은 17세기에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독일, 프랑스, 영국에 전파되었고 이어서 러시아, 미국 등지에도 수출되었다.
셋째, 티팟작업은 기술적, 미적 도전을 의미한다. 작가는 티팟을 이루는 요소들의 디자인, 비례 등을 고려하여 심미적이면서도 기능적으로 제작한다. 이러한 티팟은 작가의 창의성과 기술적 솜씨를 동시에 증명한다.
마지막으로 현대의 티팟은 예술 대 공예라는 논쟁의 교차점에 서 있다. 예술과 공예를 이분법적으로 보는 관점에서, 티팟은 예술로서의 요건과 공예로서의 요건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두 개념의 상관관계가 명확히 정립되지 않은 지금, 티팟이 서 있는 위치는 매우 미묘하면서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차의 기원
역사적으로 차는 도자기와 깊은 관계를 맺어 왔다. 차가 대중에게 보급됨에 따라 그것을 끓이고 마시기 위한 그릇이 요구되었고, 처음에는 실용적인 것 위주에서 점차 장식성이 가미되는 경향으로 영역을 확장하게 되었다.
차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전해지고 있다. B.C. 2700년 경, 중국의 신농(神農) 황제는 백성들에게 농경법을 가르치거나 초목의 약용 여부를 판단하는 것 등으로 숭상 받던 인물이었다. 차를 발견하게 된 이유에 대한 두 가지 설 중 하나는, 음식에 대한 지식이 적었던 당시에 산천의 풀과 나무를 직접 입에 넣고 씹어봄으로써 식용 또는 약용의 가부를 가리던 신농이 하루는 100여 가지의 풀을 먹고 이 중 72가지의 독초에 중독되어 쓰러졌는데, 우연히 바람에 날려 떨어진 차나무 잎을 먹자 해독(解毒)이 되어 살아났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그 나무를 차(茶)나무라 명명하고 해독을 제일의 효능으로 전하였다. 풀 초(草)와 나무 목(木) 사이에 사람 인(人)이 있는 차(茶)라는 글자는 신농을 죽음에서 살려낸 데 기인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전해진다.
또 하나의 설은, 당시에는 의사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병이 나면 약재를 구해서 끓여 마시곤 하였다. 신농이 병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큰 나무 아래에서 불을 지펴 물을 끓이고 있을 때 잎이 바람에 날려 솥 안으로 떨어졌다. 그 물을 마셔보니 맛이 쓰고 떫었으나 뒷맛이 달고 해갈작용과 더불어 정신을 맑게 하는 작용이 있음을 알게 되어 그 뒤로부터 음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차는 질병을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사용되었고 가격이 비쌀 뿐 아니라 구하기도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중국에서 발견된 차는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이어 서양으로 전파되었다. 중국에서는 당송시대 불교가 성행하며 승려들의 수양을 위해 차를 이용하였고, 불교와 함께 차의 음용과 제조방법에 대한 지식이 전파되면서 차 마시는 풍습이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다.
일본에는 A.D. 729년 중국에서 불교를 배우고 귀국하는 승려에 의해 차종자가 유입되었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신라 흥덕왕 3년(A.D. 828년)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차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이후부터 그 지역의 사찰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다.
티팟의 매력
“본질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변화한다. 어떤 사람은 차 문화에 흥미를 느낄 것이고 티팟은 그것의 아이콘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티팟의 형태에서 느낄 수 있는 생명력과 경쾌함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라고 가쓰 클락(Garth Clark)은 말한다.
티팟의 매력은 다음의 네 가지 면에서 찾을 수 있다.
차와 티팟의 역사는 문화적, 사회적 의미로 채워져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17세기 유럽과 아시아와의 교역의 중요한 품목이었던 차와 티팟은 결국 유럽인으로 하여금 동양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였고, 이후 유럽에서의 경질자기 개발을 이끌어냈다. 식민지 미국에서의 보스턴 티파티 사건이나,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2)은 차가 정치적 사건의 원인이 된 사례이다. 이 외에도 차와 티팟은 지난 400여 년 간, 문화, 경제, 정치 그리고 사회적 이슈들에 둘러싸여 드라마틱한 역할을 해 왔다.
티팟은 다양한 상징적 기호로 쓰인다. 티팟을 이루는 요소들─물대, 뚜껑, 몸체, 손잡이, 굽─을 이용하여 인간의 형상을 표현한 작품을 자주 볼 수 있다. 가쓰 클락은 “시각적으로 매우 인상적이며 흥미롭다. 그것은 살아있고 움직인다. 또한, 티팟은 의인화에 관련된 어떠한 게임도 가능하게 한다─다리, 팔, 성적인 부분들. 단호히 말하건대 티팟은 도예가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표현이 풍부한 오브제이다”라고 한다. 때때로 티팟은 따뜻하고 포근한 가정의 느낌을 전달하기도 한다. 수많은 그림, 사진, 광고 등에서 이와 같은 이미지를 상징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테이블 위에서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에 둘러싸여 있다거나 난로 위에서 끓고 있을 때, 티팟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분위기를 나타내는 아이콘이 된다.
티팟은 다양한 취향과 경제사정을 만족시킨다. 신기한 티팟이 저렴한 가격에 상업적으로 생산되는 반면, 수제품이나 유명한 작가의 작품은 고가에 거래된다. 홍차를 비롯한 서양의 차 전통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으며, 한국·중국·일본의 다도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다. 차 문화와는 별개로 티팟이 가진 조형성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찻사발과 찻잔, 차를 우려내는 기구 등의 장비를 수집하는데 몰두하기도 한다.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의 사업가이자 미술품 컬렉터인 소니 캠(Sonny Kamm)과 그의 아내 글로리아(Gloria)는 “사람들이 티팟에 마음을 뺏기는 이유는 모든 회화적인 것들, 모든 도예적인 것들, 그리고 모든 여성 작가들의 것들을 수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많은 돈이 들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회화작품에 비해 친근한 느낌이 든다.” 고 말한다. 이들처럼 차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티팟 컬렉팅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는 컬렉터들도 있다.
오늘날 티팟은 한 발은 부엌에 다른 발은 미술의 영역에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쓰임을 위한 것과 장식을 위한 것, 기능적인 티팟과 예술적인 티팟으로 구분된다. 기존의 티팟 중 대부분은 명확히 이 편 아니면 저 편에 속해있었다. 그러나 생산자와 컬렉터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 두 영역의 경계에 도전하는 작품이며 현대의 도예가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다.
티팟의 기술적 도전
티팟을 제작할 때 어려운 점은 실용성을 위해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용적인 티팟은 손잡이를 잡고 들었을 때 균형이 잘 잡혀야 하고, 바닥에 놓았을 때 흔들리지 않아야 하며, 물을 따르기 위해 기울였을 때 물대를 타고 물방울이 흐르거나 뚜껑이 떨어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작가는 티팟의 여러 부분들-손잡이, 물대, 뚜껑, 몸체, 굽, 그리고 표면-이 건조·소성시 금이 가지 않고 접합면이 떨어지지 않도록 재료를 능숙하게 다루어야 한다.
현대의 티팟은 실용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갖추고자 하는 경향을 띤다. 예술장르의 하나로서 티팟은 그것의 구성요소를 차용하여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표현하는 매체로 이용된다. 실제로 사용되는 티팟이 안고 있는 형태적, 기술적인 한계 안에서 미감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어떤 실용품이나 어떤 예술작품의 제작보다 이 작업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필자약력
1977년 서울 출생
1996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도예과 입학
2001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도예과 졸업
2002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예술기획 전공 재학중
현, 홍익대학교 도예연구소 연구원
1)보스턴 티파티(The Boston Tea Party): 미국에는 17세기 중엽 차가 전파되었다. 당시 영국은 식민지인 미국에 대하여 탄압적인 법령을 시행하였다. 즉 영국은 영·프 간의 식민지전쟁으로 소비된 전쟁비용을 식민지인들로 하여금 분담 보상시키는 시책으로 식민지에 대한 동인도회사의 차 전매권을 인정하는 법령을 시행하였다. 이에 반발한 보스턴 다회 1773년 12월 16일 밤, 정박 중인 3척의 영국상선에 올라가서 차를 바다에 던져버렸고 이 사건은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2)아편전쟁(1840~1842): 영국 내 차 소비가 늘어나 수입이 급증하자 기존의 은이나 모직물, 향료 등으로는 무역 적자를 감당할 수 없어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수출한 데서 비롯된 전쟁이다.
「Korean Landscape Ⅱ」 17.7×6.1×10.5㎝ Eunjung Park 作(2000)
「Zephyr」 36.8×20.3×7㎝ Susan Thayer 作(2001)
「Untitled」 45.7×39.4×35.6㎝ Paul Dresang 作(2000)
「Head First」 63.5×38.1×22.9㎝ Debra W. Fritts 作(1999)
「Aria」 40.6×35.6×22.9㎝ Ricky Maldonado 作(2001)
「Dancing Bamboo」 27.9×24.1×8.6㎝ Wen Xia Lu and Jian Xing Lu 作 (2000)
「Red Variation」 35.6×50.8×7.6㎝ John Glumpler 作(2001)
「Awakening」 203×33×19㎝ Sergei Isupov 作(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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