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색토기黑色土器의
미적 정취
글 윤두현 _ 독립큐레이터
도자기의 연원을 쫓아 시간을 거슬러가면 토기가 있다. 우리나라의 토기는 선사시대의 빗살무늬토기로부터 시작돼 삼국시대까지 중요한 생활 소품으로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나아가 이는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 이후 시대의 본격적인 도자문화 전성기를 여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위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토기의 현재는 어떤가? 현대적인 재해석은 차치하고라도, 전승적인 맥락에서의 토기에 있어서 그 명맥조차 거의 사라진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희순은 1988년부터 근 20년 가까이 ‘꺼먹이 구이’ 기법에 몰두하며, 토기를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고자 노력해 왔다. 또한 그럼으로써 작가는 도예계가 추구하고 있는 기존의 전통계승이 대부분 도자기 자체에만 제한되고 있음의 한계성을 꼬집고 있다.
작가는 한강변의 작업실 주변에서 철분 함량이 높은 벽돌점토를 직접 채취하여 작업한다. 다만, 이는 성형이 용이하지 않으므로 본 흙의 고유한 물성을 최대한 유지하는 선에서 얼마간 첨가물로 이용한다. 더불어 연기를 통해 기물에 흑색을 먹이는 ‘꺼먹이 구이’ 기법에 라쿠번조를 활용한다. 이희순의 작품에 나타나는 형태와 기하학적 문양의 절제된 간결함은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작가가 라쿠번조를 채택하게 된 것은 바로 그러한 작가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장점 때문이다.
아울러 작가는 이러한 작업방법에 의해 토기 특유의 투박한 질감과 흑색의 조화를 추구하는 한편 이를 분청사기의 장식기법과 대비시킴으로써 극적인 긴장감을 작품에 부여한다. 이는 검은색이라면 우선 무겁고, 우울한 느낌을 먼저 떠올리는 기존의 통념을 깨고, 검은색을 통한 단아함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건축에 있어서 전통의 미를 언급할 때 흔히 전통한옥이 갖고 있는 고적한 아름다움을 우리는 그 예로 들고는 한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에는 지붕을 이루고 있는 검은색 기와의 조형미가 그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기와는 토기의 제작기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검은색 특유의 미적 정취를 갖고 있다. 아마도 작가가 흑색에 애착을 갖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가 아닐까 짐작된다.
저화도 번조에 있어서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채색 및 장식의 용이성이다. 이는 작품에 대해 창작자의 의도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음이며, 자유로운 상상력이 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작가는 이 같은 특징을 다양하게 활용했던 이전과 달리 이번 작품들에서는 최대한 절제하였다. 이는 곧 작가가 기법을 위한 기법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작품에 있어서의 조형적 완성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경지에 얼마간 이르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하나의 성공적인 기법이란, 바로 작품의 창의적 예술성이 획득됐을 때라야 만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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