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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도예계에는 왜 평론이 없는가?
  • 편집부
  • 등록 2003-07-05 17:09:25
  • 수정 2016-04-16 02: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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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진홍 도예평론가 1. 들어가는 글 사실 도예평론가라는 직함으로 활동하고 있는 필자에게 이 제목만큼 황당하고 부끄럽기 그지없는 논제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인 것은 냉철한 자기반성과 무시할 수 만은 없는 근본적 현실을 가급적 객관적 시야에서 그리고 다소는 변명이 섞인 논지로 한국 도예계의 실상을 피력해 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테마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질문은 사실 귀국이후 수년이 흐르는 동안 스스로도 수없이 자문자답해 왔던 평론부재라는 이 기이한 현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화두였기에 나름대로 생각해 왔던 것들을 정리해 보는 기회로 삼고 싶었다. 과연 얼마나 많은 부분에 있어서 독자들이 공감할 것인가를 떠나 우선은 철저히 필자 개인의 좁은 시야로 전개해 나가기로 하였음을 양해 바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단 본고에서는 일반적인 ‘평론’의 개념이나 규범적 정의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도예평론은 소위 문학적 접근방식에 의한 문예평론과는 다소 다른 특성이 있다는 점만을 언급해 두고자 한다. 그리고 본고에서는 이하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한 평론이란 바로 도예작품을 대상으로 한 도예평론을 의미한다. 본격적인 논지를 피력하기에 앞서 본고의 제목에 대응하는 답변을 조금 무리한 측면이 있기는 하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답변을 먼저 제시해 보자면 다음의 세가지로 응축시킬수 있을 것이다. 첫째, 평론을 생산하는 주체 즉 도예평론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둘째, 평론의 소비자는 신문이나 잡지, 전시도록 등을 통해 소비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 평론의 장인 전문지평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 평론의 대상이자 평론의 주문자라 할 수 있는 평론의 수요가 일반 대중이나 도예가로부터 없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세 번째가 가장 핵심적 답변이리라. 하지만, 앞의 세가지 답변은 사실 피상적 관점에서의 분석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그 이전에 우리나라의 특징적인 현상이자 도예계의 현실로부터 도출된 근원적인 부분에 대하여 먼저 짚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주변의 공통된 사항을 보다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시 비교문화적인 접근방법이 가장 알기 쉽다. 먼저 동양과 서양의 도예에 있어서의 평론의 근본적 시각차에 대하여 알아본 후 우리나라 근현대 도예의 발전과정에서 형성된 또 다른 사회문화적인 시각에 대하여 접근해 보기로 하겠다. 2. 동서양 도예평론의 근본적 시각차 우리가 평론이라고 하면 그 자체가 목적이요 대단한 것이라 오해하기 쉽다. 물론 평론자체도 하나의 완성된 평론가의 작품으로서 충분한 읽을거리요 그 분야를 진단하는 중요한 장르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수단 -좀더 자세히 말하면 도자예술품의 감상을 위한 하나의 매체-에 불과하다. 미술공예품으로서의 도예작품을 감상하기 위한 많은 방법 중 평론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좀더 깊이 있는 이해와 감상을 하고자하는 대중집단의 문화예술의 소비수단중 하나라는 것이 올바른 위치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가 만나본 몇몇 도예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평론들은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그러한 평론은 평론으로 그치고 만 평론을 위한 평론이라 아니할 수 없다. 평론의 존재이유는 일반대중이 그 평론의 대상이 되는 주체(감상대상이나 현상)를 이해하기 쉽게 안내하는 일종의 가이드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에는 영화나 문예작품, 일반 미술품 등 여러 분야에 있어 먼저 평론이 있고 이 평론을 통한 평론가의 눈으로 판단된 정보를 대중이 소비한 후에야 자신의 눈으로 이해하거나 감상에 참고하려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그 분야에 평론의 수요가 많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단적인 예라 할 것이다. 그것은, 사전에 접해보지 못했던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부분이라는 전제가 은연중에 깔려있기 때문이며, 그 예술품에 대한 관심도나 시장의 규모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양의 도자기와 서양의 도자기에는 바로 이 평론의 출발이자 존재이유에서 근간을 달리한다. 일례로 독일과 같이 비교적 일찍 자기(磁器; porcelain)가 발전한 곳이라도 그 역사는 동양에 비하면 일천하다. 그들은 자국의 역사는 물론 자신들의 일상주변에서 우수한 양질의 도자기(식기여부를 불문하고)를 접해본 경험이 일반대중에게는 극히 적었다. 때문에, 서양의 근.현대기 도예작품이나 산업도자로서 식기류라 할지라도 유명디자이너의 작품들은 이미 가슴 깊숙이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그것은 예술적 가치와 미를 느끼는 감상의 대상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반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역사적 배경은 전혀 그 사정이 달랐다. 각 민족의 발달사와 도자기의 발달사는 거의 일치할 정도로 장구한 세월 속에 그리고 생활 속에 묻어 함께 살아오며 성장한 것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수많은 명품들이 그 시대의 생활도자로서 때로는 신성한 의례용 도자기로서 존재하였었고, 그것을 소비하는 대중에게는 어려운 이해의 대상도, 별도의 해설이 필요한 복잡한 수준의 예술작품도 아닌 그 시대를 반영한 생활공간속의 도자기였을 뿐이다. 때문에 근현대기에 있어 우리나라 도예계가 전통도자니 생활도자니 하는 표방속에서 일반대중이 접근하기 쉬운 지름길을 얻는데는 성공하였지만 그 결과 예술적 가치를 지닌 미술공예품으로서 감상의 대상이라는 인식을 심는데는 실패한 것이라 생각한다. 3. 우리나라 근대도예발전을 왜곡시킨 두 개의 척도 우리나라의 근대도예는 출발부터 특수한 상황 하에서 발아됨에 따라 이후 두 개의 왜곡된 척도에 의해 기형적으로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는, ‘왜사기론’으로 대변할 수 있는 척도가 36년이라는 일본에 의한 강점기동안 팽배해진 반일사상과 맞물려 근대도예로 성장할 수 있는 다양한 근현대 도자기법들이 배제되고 철저하게 전통도자의 복원이나 전통도예로의 회귀라는 테마에 밀려 설 곳을 잃어버렸다는 점. 둘째는, ‘막사발론’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일본식의 미학이 때마침 부흥한 차문화의 발전과 함께 여과없이 국내의 도예가나 대중에게 소개, 흡수됨에 따라 전통도예라는 미명하에 오로지 장작을 원료로 소성한 도자기면 작품성과 상관없이 면죄부를 주는 풍습이 만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가.‘왜사기론’의 영향 일본의 경우를 먼저 살펴보면, 명치유신에 의해 막부가 붕괴되고 왕정복고를 이룸에 따라 기존의 무사계급중심의 부나 고미술품 등 전통적인 유명 예술품 등은 신흥재벌이나 고위관료 등의 손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미술품의 경매를 통한 시장의 거래는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미술품 특히 도자기에 대한 일본시장의 수요폭증을 가져다주었고, 그것은 한반도 전역에 걸친 가마터의 훼손과 도굴의 성행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가마터발굴은 물론 일본의 큐슈일원의 임진6요의 발굴에 이르기까지 정통적인 고고학적 접근방법 대신 도편채집 위주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초기 일본도자사나 한국도자사가 왜곡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 후 소수에 불과하긴 하지만 본격적인 도자사를 전공한 고고미술사학자들의 손에 의해 일본인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많은 초기연구가 거의 참고가 안될 정도로 한국도자사는 비약적인 연구발전을 이루었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발아된 근현대적 번조기법이나 새로운 도자장식법 등 대부분의 도예분야의 신기술기법이 식민잔재의 철폐운동에 그리고 고고학자들의 도자사평가에 있어 전통도자는 분원의 민영화이후 소멸하였다는 사학적인 정의하에 모두 ‘왜사기’라는 척도하에 평가된 것만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사실이다. 고려의 상감청자나 조선의 청화백자도 선진기술이 유입된 후 우리만의 독특한 미학이 결합하여 낳은 명품들이었건만, 근대도예발아기의 일본인에 의해 전해졌거나 그 시대에 유행한 기법들이 모두 ‘왜사기’의 논리에 의해 일부 생활식기외의 도예작품에는 모두 전근대적인 도자기술만이 전통이라는 편협된 인식속에서 소멸하다시피 한 것이다. 일본의 교토에서 대표적인 한국도자기를 재현하는데 치중하던 가와이간지로우 씨가 1937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이래 일반대중에게 전통도자가 공예미술품으로서 감상의 대상으로서 자리매김을 하는데 크게 일조하게 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후 일본에서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백화점 등의 갤러리를 중심으로 그들의 전통작품과 재현작품에 대한 평가는 자연스럽게 판매와 수집의 대상이 됨으로써 시장형성에 큰 흐름을 잡게 해 주었고 당연히 이들 작품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들은 도예평론의 형태로 그들을 중계하는 매체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나라 도예계의 현실과 비교해보면 너무나 부럽기 그지없다. 현대는 자유의 시대이다. 각 개인이 가진 감성이 충분히 발휘되고 그의 취향과 전 세계에서 자유롭게 창출된 각종 도자예술과 관련된 기법(번조, 가마, 유약, 태토분야 모두를 포괄한)을 망라한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작품세계를 열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전통이라는 것은 오늘의 밑거름이지 결코 창작의 굴레가 되어서도, 안일함의 보호막으로 삼아서도 아니되는 것이다. 나. ‘막사발론’의 영향 막사발론의 근원지에 대하여는 그동안 필자가 TV인터뷰나 글의 발표 등을 통해 많이 다룬바 있으므로 지면관계상 본고에서는 재차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우리나라의 전통도자가 무식한 도공에 의해 자연스럽게 아무생각없이 빚어낸 자연스런 멋 운운하는 ‘막사발론’의 영향이 차문화의 확산과 함께 상승효과를 냄으로써 지금도 일반인이나 도자기애호가나 다인 등 비교적 구매력이 있는 자들의 현대도예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인 도예작품으로서의 평가가 아니라 오로지 장작가마인가 아닌가라는 도식적인 원료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고 또한 용서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박물관이나 유명 미술관에서 미술공예품으로서 전시물로 구입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렵게 되어 버렸다. 좋은 도예작품은 번조방식이나 원료와 같은 제작수단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작품으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동양화가가 서양의 유성안료를 써서 한국화를 표현하면 전통작가가 아니고 동양적인 수묵화만 그리면 작품성을 불문하고 좋다고 평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4. 나오는 글 지금까지 나름대로 한국도예계가 처한 현상을 나름대로 피력해 보았다. 대안까지 제시하여야 마땅하겠으나 모두에서 밝힌 피상적인 관점에서의 답변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는 것으로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 평론가의 부족은 필자도 마찬가지지만 평론자체가 수동적으로 의뢰받는 현실하에서는 평론가 특히 도예평론가라는 것만으로 생활은 불가능하다. 필자의 경우도 감정가로서 때로는 연구가로서 책을 집필하거나 강의하는 등 별도의 직업을 통한 소득원을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 길을 지망하는 후학들이 늘어나지 못하는 것으로도 연결된다. 앞으로 시장이 확대되고 모든 도록이나 잡지 등 매체가 확대된다면 자연스럽게 전문평론가는 양성될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필자와 같은 소수의 도예평론가들만이라도 독립적인 협회의 창설 등을 통한 후진양성에 힘써 나가야만 할 것이다. 최근에 오픈한 필자의 인터넷 사이트(www.aichado.com)도 사실 그러한 의도하에 후진양성을 위한 목적이 있지만 어느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쉽사리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하겠다. 둘째, 매체의 부족도 본지가 이러한 주제를 다룰 수 있을 만큼 성장하였음을 대변하는 것이므로, 향후 전문 도예관련 간행물도 다양화되고 기존의 전문지에서도 지평을 넓혀 간다면 어느 정도 평론부재의 현상은 해소되어 나가리라 생각한다. 셋째,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일반대중이 도예작품도 평론이 필요한 미술공예품이자 감상의 대상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도예가 스스로도 전시도록작성에 있어 평론가의 글을 싣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반인이 보기에 생활식기라 할지라도 전문가의 글이 병행될 경우 점차 인식은 예술품으로서 감상의 대상으로서 자리잡아나가게 될 것이다. 최소한 평론가가 아니라면 박물관이나 갤러리의 큐레이터의 글을 싣는 노력을 작가들 스스로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큐레이터 중에서도 도예전문 큐레이터가 양성되어야함을 절실하게 느낀다. 일부화랑의 도예작품 전시를 보면 작품의 특성을 배제한채 화랑에 기본적으로 설치된 전시공간에 무리하게 나열된 것들을 수없이 발견하곤 한다. 때문에 큐레이터들도 자신의 갤러리에 전시하고자 하는 도예가의 작품전시기획시 도자기의 특성을 배려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전시회의 도록에도 평론가의 글이 실리도록 유도하는 것이 여의치 않으면 큐레이터 자신이라도 글을 싣도록 하여야하며 비전문가인 시인이나 애호가인 저명인이 작가와의 친분관계에 의한 글을 싣는 것은 자제토록 유도하여야 도예작품의 전시기획 수준도 함께 높아짐은 물론임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약력 도예평론가, 동양고도자 및 다도연구가 한국미술품감정가협회 창립회원, 대한매일신문 자문위원 국립 서울산업대학교 출강중 비봉차도문화연구소(www.aichado.com)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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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erazin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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