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의 미학적 수사학의 요청 근거
글 윤두현 _ 독립큐레이터
“작가는 작품으로서 얘기하면 되고, 거기에 대한 해석의 권리는 전적으로 보는 사람에게 달린 거다. 내 작업에 있어서 고수하거나 계획해야 할 방향성은 없다. 굳이 있다면 무방향성의 방향성이 그것이다. 난 그때그때의 현실 내지 감정에 충실할 뿐이다.” 김대훈 작가와의 인터뷰 내용의 골자는 대충 이렇다. 그리고 작가는 이내 메모지 한 장을 찢어 “익숙해지는 것에 익숙해진다는 것,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라는 문구를 적어 던져주고는 황망히 사라졌다. 그렇듯 작가는 잠깐 동안 거침없는 뭔가를 필자 앞에 마구 쏟아놓고 마치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다소 정신없는 인터뷰이긴 했지만 작가의 거침없음이 결코 싫지는 않았다. 그것은 친절(?)에 길들여져 있는 필자에게 오히려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는 도예 작품을 보면서 겪어야 했던 필자 나름의 방법론적 고민에도 얼마간 많은 생각을 해보게 하는 것이었다.
토마도 갤러리에서 <벽 없는 문, 문 없는 벽>이라는 타이틀로 열린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숫자나 door와 같은 특정 단어 그리고 안경 등 상징화 혹은 기호화된 표상들이 스크레치scratch로 표현되어 있는 도자평면 작품들이었다. 잿빛의 유약으로 저화도에서 번조되었을 도자평면 위에는 이처럼 단순화된 이미지의 표상들이 마치 산만한 아이의 낙서처럼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전시 타이틀이 이미 역설적으로 은유하고 있는 바처럼 작품의 내부에 단순화된 세계의 표현으로만 보기 힘든 관념적 세계관이 짙게 반영되어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는 곧 객관화된 주관화의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주관이 철저히 주관화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작가는 내면으로 침잠함으로써 고유의 공간 혹은 시간적 사유를 지속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거칠게 뜯어낸 듯한 손잡이가 인상적인 잔과 주로 직사각형으로 된 합盒 역시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즉 작가는 작업을 진행함에 있어 기물을 대상적 차원에서 사물로 인식하고자 하기보다 공간적으로 인식을 견지하고자 한다. 결국 이를 참고하자면 작가는 작업실에 앉아 특정한 사물을 성형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창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들 기물은 쓰임의 차원에서 기능성에 주안을 두었다기보다 관념적 공간성을 우선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도예 작품 읽기에 대한 필자 나름의 고민으로 잠시 말머리를 돌리고자 한다.
필자, 비도예전공자로서 도예 작품을 볼 때마다 늘 스스로 빠져드는 태생적 늪이 있다. 그것인즉슨 도예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도예를 도예의 차원에서만 보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내면에 짙게 깔려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이번처럼 도예비평의 부재를 꼬집으면서도 그 자체로 보면 되지 왜 꼭 이런저런 기준을 끌어와 들이대느냐는 일견 모순적인 요구를 내세우는 작가 앞에선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좀 더 포괄적인 차원에서 이미 도예를 접근하고자 하는 필자의 논리는 포기하기 힘든 측면의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튼 필자는 아직 늪-필자의 앎의 깊이 또한 얕으므로-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주장하고 싶다. 도예가 예술의 한 양태로서 어떤 절대적 가치가 아닌 특정의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는 한 이의 판단을 위한 다양한 기준은 어쩌면 필수적인 거 아니겠는가라는 점 말이다. 나아가 여기에 있어서 문제는 어쩌면 기준의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준을 구성하는 내용의 매너리즘이나 왜곡에 있다라는 생각이다. 아마도 김대훈 작가 역시 결국 기준 자체의 부정이라기보다 결국 이 같은 한계성을 꼬집고 싶었을 것이리라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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