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열정으로, 가슴깊이 제자들을 아낀 이희수 박사
“요업과 제자들 수로 따지면 아마도 제가 제일 많을 겝니다. 웬만한 요업분야 대학 강의는 제가 거의 다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지금 제자들이 각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요업분야의 우수한 인재양성을 위해 열의를 불살랐던 이희수 박사에게서 여전히 식지 않은 열정이 느껴진다.
이희수 박사는 중앙공업연구소 요업과에서 대학 졸업논문을 쓰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요업분야에 몸담기 시작했다. 이 박사는 요업을 선택하게 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제가 요업을 선택할 당시에는 요업이 우리나라 전통산업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1956년경에는 판유리, 시멘트, 비료 산업 등 요업계통의 산업이 국가기간산업으로 선정이 되었을 정도로 유망한 분야이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해방 이후인 1950년대 경에는 일본 기술자들이 떠나간 빈자리를 채울 한국의 기술자들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우리나라 전통산업이자 주요 산업인 요업의 발전을 위해 힘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또한 요업분야에 안도엽 박사, 김동일 박사, 남기동 회장과 같은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요업을 선택할 충분한 동기가 되었다고 이 박사는 덧붙였다. 이희수 박사는 요업 중에서도 특히 유리 및 원료분야의 연구에 주력했으며, 세라믹 분야의 인재양성을 위해 인하공대 부교수에서 한양대 교수, 연세대 교수직 등을 역임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한양대 요업과가 창설될 당시 교수로 임명되어 요업관련 인재양성을 위해 힘썼다. 이뿐 아니라 이희수 박사는 국방부 과학연구소 연구관, 공업표준심의회 요업부회위원, 한국동력자원연구소 자문위원, 한국세라믹학회 원료부 회장, 유리부 회장직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기관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현재는 유리건장신문 고문, 요업(세라믹)기술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요업계에 우수 고급 인력 투입한 이 박사의 값진 노력
반세기 동안 요업분야의 우수한 인재양성 및 인재발굴을 통해 실질적인 요업발전에 기여해 온 이 박사는 학생들을 가르쳤던 지난날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요업분야 강의를 도맡아 했던 그때는 요업분야의 업체 경영진 및 사주와 돈독한 유대관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었지요. 그래서 업체들로부터 학생들에게 필요한 연구비 및 현장기술체험 등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어요. 이러한 적극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열과 성을 다해 제자들을 가르친 덕분일까요? 제자들 중에서 요업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 꽤 많은 편이예요.” 이렇게 말하는 이 박사에게서 가슴깊이 제자들을 아끼고 위했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이 박사는 특히 방학을 맞이할 때면 고급 인력채용에 대한 요업계의 부족했던 인식을 조금이라도 바꿔 나가기 위해 직접 요업 관련 업체들을 방문하느라 가장 바쁜 시기를 보냈다고 설명했다. “요업을 전공한 제자들의 취업을 위해 제가 직접 학적부를 들고 업체를 찾아다녔죠. 대학출신 요업인력이 꼭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해서 무진장 노력했지요.”
이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일반 노무자들에게 맡겨도 요업제품 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에 굳이 인건비가 비싼 대학출신 요업인력을 쓰지 않으려는 업체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박사는 제품의 근본적인 개발 및 품질향상을 위해서는 대학출신 요업인력이 필요하다고 보고 업체들을 직접 설득하기에 나선 것이었다. 결국 오늘날 요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고급 인력들이 요업 발전에 힘을 쏟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이 박사의 노력 덕분이 아닐까.
요업발전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이희수 박사는 요업관련 종사자로서의 자부심도 뛰어났다. 현재 발간되고 있는 “학회지의 전신이기도한 요업 학회지를 만들던 당시가 생각이 나네요. 서울대 박사였던 임응극 박사와 함께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 직접 주보를 만드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죠. 외국 잡지에서 필요한 정보를 뽑아내 직접 인쇄하고 등사지에 붙이는 일 등 일일이 손으로 만드는 학회지는 상당한 정성을 쏟아야 했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처해서 성심성의껏 학회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박사의 요업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남달랐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한다.
‘溫故知新’의 마음으로 세라믹산업을 바라봐라!
이 박사는 ‘溫故知新’의 관점으로 요업계를 바라본다며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원래 규산염공업이라는 명칭이 1960년대 무렵에 요업으로 바뀌었고, 이어 1980년도 후반에는 세라믹공업으로 명칭이 바뀌었죠. 즉 옛것을 받아들여 새로움을 창출해 나간다는 ‘溫故知新’의 의미와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해요. 이렇듯 전통세라믹스와 파인세라믹스가 존재하는 것은 결국 전통세라믹스의 발전이 밑받침이 되었기 때문에 파인세라믹스가 발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만약 전통세라믹스가 없었더라면 파인세라믹스의 발전도 불가능 했을 겁니다. 결국 옛 것인 전통세라믹스를 받아들여 새로운 것인 파인세라믹스를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 박사는 현재 세라믹 분야의 전반적인 흐름에 있어 안타까운 점에 대해서 덧붙였다. “현재 세라믹공학과가 제구실을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학과, 특히 전자·전기공학과 등에 자리를 뺏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라믹공학과의 전공 분야를 점점 타 학과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괴롭고도 안타까운 일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전통세라믹스에 대한 확실한 이론적 체계없이 파인세라믹스 분야의 연구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전통세라믹스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파인세라믹스를 이끌어 나가야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탕이 튼튼한 사람이 세라믹스를 이끌어 나가야 엄격하고 치밀하며 실수없는 세라믹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박사는 세라믹산업의 향후 발전을 위해 중요시 여겨야 할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세라믹 소재의 구성, 조성, 상태와 그로 인해서 얻어지는 제품의 물성 및 기능성과의 연관성을 잘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나노 하이브리드 분야를 깊이 연구해서 새로운 기능성 개발과 동시에 활용분야를 확대해 나가는데 주력해야 할 것입니다. 향후 세라믹산업은 점차 경량화, 소형화 분야 활동에 더욱 치중했으면 합니다.” 세라믹 분야의 발전을 위한 진솔하고 아낌없는 조언을 통해 이 박사의 식지 않은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적당히는 필요없다 오로지 완벽한 기술만 필요할 뿐!”
세라믹 분야의 인재양성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던 이 박사는 후배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지닌 만큼 그 기대 또한 컸다. 이 박사는 “도자기 공업이 주를 이루던 과거의 전통세라믹스에서는 적당하게 제조되어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파인세라믹스가 주를 이루는 지금은 적당히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즉, 파인세라믹스는 정밀, 정확, 엄격한 산업이기 때문에 완벽한 기술력을 통해서만이 발전을 이뤄나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희수 박사는 향후 세라믹 분야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향후 산학연관이 스스로의 역할에 충실히 임할 뿐 아니라 상호상부상조하여 효율적인 실용화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학회는 연구소와 산업체를 연결·접목하는 역할에 좀더 힘을 쏟아야 할 것 입니다.” 이어 학회는 학회지의 SCI등재 추진을 통해 우수한 국내 논문들의 확보로 세라믹 학술 활동을 제대로 반영하여 학회의 질적 향상을 이뤄나가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이렇게 될 때 산학연의 상호 신뢰성을 바탕으로 긴밀한 유대를 통한 효율적인 시스템 구축이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희수 박사의 ‘溫故知新’적 관점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세라믹 분야의 위치 정립을 위해 실천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한번쯤 깊이 반성해 보는 자리를 가져봄은 어떨까.
윤나리 기자
요업계의 우수한 인재양성을 위해 힘썼던 이희수 박사
이희수 박사는 유리분야 및 원료분야 연구에 주력했다
우수한 인재가 많았던 요업계는 이 박사가 요업을 시작한 동기가 됐다
이희수 박사 주요 약력
1950. 5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졸업(공학박사)
1950. 10~1953. 7 국방부 과학연구소 연구관
1957. 4~1962. 3 인하공과대학 부교수
1957~현재 한국세라믹학회회원
(이사, 학회장, 원료부 회장, 유리부 회장 역임)
1960~1978 대한화학회 평위원
1962. 4~1970. 2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1963~2003 특허청 특허 및 실용신안등록출원 외부 심사위원
1964 기술사(제1회)자격 획득
1970. 3~1991. 2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공과대학장 역임)
1972~현재 대한세라믹총협회 회원(이사 역임)
1975~1978 국방부 과학기술연구소 위촉
1979~1991 대한화학분석시험검사소 이사
1983~1991 한국동력자원연구소 자문위원
1992~현재 과총 주관 과학기술자문봉사단 회원
1992~현재 한국엔지니어클럽 회원
1998~현재 한국과학기술 한림원 원로회원
1998~현재 유리건장신문 고문
2002~현재 요업(세라믹)기술원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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