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필 이학박사 삼조실업(주) 연구소장
전자현미경학의 선구자에서 무기재료공학 지도자가 된 액티브한 실천가
국내 최초로 전자현미경을 도입하여 전자현미경학회를 창립하고, 화학과와 무기재료공학과에서 우수한 제자들을 배출했던 안영필 박사.
안영필 박사는 일본 京都大學 이학부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이학부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특히 안 박사는 우리나라 연구자들 중에서는 최초로 전자현미경학 이학박사 학위를 받아 전자현미경계의 발전에 힘써온 전자현미경학의 선구자로 손꼽히고 있다.
안 박사는 1958년 일본에서 학위를 마친 후 귀국하여 경북대학교 교수 겸 전자현미경실 실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당시 안영필 박사는 원료의 기기분석 연구와 동시에 우리나라의 고령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고령토는 일본의 고령토와는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즉 우리나라의 고령토는 관태 구조의 Halloysite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고령토가 도자기 제조는 가능하나 제지나 산업용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알 수 있게 됐습니다. 당시 100%수입해 사용했던 제지용 원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고령토의 구조를 분쇄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전자현미경을 이용해 미세한 입자의 원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안 박사의 능력은 향후 무기재료공학계의 연구 개발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안 박사는 경북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었던 1960년경, 당시 국립공업연구소 원료과에서 근무하고 있던 이종근 박사와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안영필 박사는 “이종근 박사님의 만남은 요업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경북대학교와 건국대학교 화학과를 거쳐 한양대학교 무기재료공학과에 근무하게 된 안영필 박사는 “결국 좋은 관계를 유지해오던 이종근 박사님과 함께 요업관련 연구를 하게 됐다”며 “한양대학교로의 이직은 연구설비 시설이 잘 갖춰진 곳에서 깊고 다양한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어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안 박사는 1973년부터 요업원료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도자기원료, 내화물원료, 흑단원료 등에 대한 다양한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특히 좋은 원료를 얻기 위한 안영필 박사의 노력은 대단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경기도 연천지역에만 내화도가 높은 알루미나 원료가 묻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지역이 모두 군사지역이라 함부로 드나들 수 없을 뿐 아니라 원료 채취도 불가능했죠. 하지만 끝내 정부의 허락을 받아내고 연천지역 광산의 현장조사를 시작했죠. 그때 망태를 짊어지고 함께 고생했던 조교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불타는 연구의지로 불 꺼지지 않는‘일하는 연구실’만들다!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지도자 안 박사의 연구실은 불이 꺼지지 않는 ‘일하는 연구실’로 유명했다고 주위사람들은 전한다. 안 박사의 연구의지는 한국요업학회 학술상, 한양대 요업과 동창회 공로패, 대한요업협회 학술상, 건국학원 학술원 학술상 등을 수상하는 밑거름이 됐다. 침착하고 이성적인 안영필 박사의 모습 이면에 숨겨진 액티브한 기질은‘일하는 연구실’을 만드는데 충분했으리라.
안 박사의 액티브한 기질은 그가 한때 대한체육회 요트협회 대의원, 감사직을 수행한 적이 있다는 사실로도 증명할 수 있다. 연구실에서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연구에 몰두하는 안 박사의 모습과 수상 스포츠, 요트의 활성화를 위해 애쓰는 액티브한 박사의 모습에서 감춰진 열정이 느껴진다.
안 박사는 “한때 요트의 매력에 푹 빠져 결국 대학 내 요트부를 신설하기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결국 안 박사는 요트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던 국내에 요트부를 직접 신설하고 요트기술을 지도하는 등 요트부문에 있어서 큰 성과를 이끌어 냈다. 이쯤하면 안 박사에게 액티브한 실천가라는 수식어가 딱 들어맞는 듯 하다.
“순수 국내기술로 산업 발전위해 끝없이 전진하리라!”
1977년 이후부터 안 박사는 파인세라믹스분야인 애자, 절연체, 유전체, 반도체, 초전도, 고유전체, 센서 등의 연구에 주력하여 후학들과 함께 정밀한 파인세라믹스 분야의 활성화에 공헌했다. 1989년에 퇴직한 안영필 박사는 현재 한양대학교 세라믹 연구소의 연구교수와 요업기술원 자문위원, 삼조실업(주)의 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꾸준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의 뒤안길에서도 안 박사는 지금껏 쌓아온 연구물들을 산업현장에 적용하는 등 실질적인 산업발전을 위해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안영필 박사가 연구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삼조실업은 본차이나 도자기의 주요 성분인 본애쉬를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인공골 및 인공 치조용 바이오 세라믹을 개발하는 등 첨단소재산업에 활발히 진출하고 있는 소재개발 전문 선도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순수 국내 기술 개발로 국내 소재산업의 활성화를 이끌기 위해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안 박사의 열정은 지금도 식을 줄 모른다.
“뛰어난 손재주 이용한 나노기술 개발만이 살길이다!”
안영필 박사는 최근 세라믹 분야의 흐름과 후학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아쉬운 마음을 이렇게 토로했다.
“최근 한국의 세라믹 분야는 발전도상국인 중국에 추월당하고 있는 것이 기정사실입니다. 더욱이 한국 기업들 중에는 새로운 기술은 개발하지 않고 인건비가 싼 해외에 생산거점을 둔 채 경쟁력을 도모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이렇듯 흔들리고 있는 생산구조에서 우리나라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가지 일 것입니다. 바로 나노기술에 대한 투자 및 연구개발로 세라믹 분야의 다양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노기술분야는 촉매의 효율성 증가, 전기 화학적 특성 변화, thin film, 전기도금, 인쇄기술에 필요한 색소 개발 등 응용분야가 다양해 기술개발이
무궁무진한 분야라고 안 박사는 설명했다. 특히 안 박사는 “우리나라 민족은 뛰어난 손재주를 지니고 있어 미세한 나노기술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민족이라고 생각한다”며 “한국을 기술 강국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에 적용 가능한 나노기술 개발만이 살길이므로 세라믹 분야의 후학들은 이점을 명시해하고 나노기술 분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후학 양성을 위해 지도자로서 덕망을 실천해 왔던 안 박사는 은퇴 후인 지금도 후학들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아서인지 현재 중·고등학교 설립을 위해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고민 중이라고 기자의 끈질긴 질문에 살짝 귀뜸했다. 말보다 실천이 앞섰던 안 박사였기 때문에 이 질문에 답하기 힘들었으리라 생각하며 바로 이런 면이 안 박사를 지탱해 온 성공의 열쇠가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윤나리 기자
안영필 박사 주요 약력
1958~1962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강사 조교수, 부교수
1959~1964 경북대학교 부설 전자현미경실 실장
1962~1964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부교수, 교수
1964~1968 건국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 교수, 학과장
1965~1967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지도위원
1966~1969 한국전자현미경 학회장
1967~1970 건국대학교 이과대학 교수, 부학장
1968~1970 국립공업연구소 무기화학과 연구지도위원
1970~1989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1971~1989 한양대학교 부설 산업과학연구소 연구실장
1972~1978 대한요업학회 평의원
1979~1981 대한체육회 요트협회 서울지구 대의원
1983~1985 대한요업학회 부회장
1981~1990 대한체육회 요트협회 감사
1985~1987 대한요업학회 회장
1995~현재 한양대학교 세라믹연구소 연구교수
1998~현재 (주)삼조실업 연구소장
2002~현재 요업(세라믹)기술원 자문위원
기사를 사용하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s://www.cerazin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