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의 재조명
현대시각으로 본 조선백자의 의의
글 장기훈 _ 조선관요박물관 학예연구팀장
생각해 보면, 조선백자朝鮮白磁 만큼이나 대중성를 띄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공예품도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조선백자가 왕실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또 500여 년 동안 꾸준히 사용되면서 조선사회가 지닌 의식意識과 미감美感, 생활상生活相을 두루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청자나 분청사기에 비해 오늘날 조선백자를 탐구·계승하는 분위기는 미약한 편인데, 이것이 근대 이후 우리사회가 서구 주도의 산업화된 백자문화에 경도傾倒되어 있었기 때문은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우리나라 백자의 역사는 이미 라말여초에 청자와 함께 시작되었다. 고려백자는 청자와 비슷한 회유계 투명유를 입힌 연질軟質백자가 주로 제작되는데, 비록 소량이 만들어졌지만 매우 값비싼 고급품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특히 12세기 강진康津과 부안扶安의 가마에서는 상감백자를 비롯해 청자에 뒤지지 않는 높은 수준의 백자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경질硬質백자는 조선시대에 유행하였다. 국초부터 명나라明, 1368~1644로부터 들어온 백자, 특히 청화백자靑畵白磁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급증하면서 새로운 양식의 백자가 생산되기 이른 것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명나라 백자의 영향을 고유의 양식으로 승화시킨 순백자(사진 1)와 청화백자(사진 2)가 사옹원 분원司饔院 分院, 1467~1883에서 제작되어 왕실의 각종 의례 등에 사용되었다. 백자는 청자나 분청사기에 비해 깨끗하고 견고하여 실용적이기 때문에 조선의 도자문화가 백자 중심으로 변화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새로운 백자는 곧 전국적으로 유행하여 민간에서도 제작되었으나,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을 계기로 17세기에는 일시적인 도자산업의 침체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자는 이미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기 때문에 회청색을 띠거나 청화대신 철화문양(사진 3)을 넣을 정도로 백자의 품질이 조잡해진 조선 중기에도 그 수요는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침체기를 자주적으로 극복한 조선 후기, 특히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와 정조正祖, 재위 1777~1800 동안에는 다시금 크고 당당한 자태에 섬세한 청화문양을 그려넣은 고급 백자(사진 4)들이 많이 생산되고, 시장에서 널리 유통됨으로써 전례없는 백자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조선의 역사와 흥망을 함께 한 백자는 조선사회에서 몇가지 특징적인 성격과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중 첫 번째는 조선백자가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상징물이었다는 점이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8년(1616)조에는,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의장儀章에 구분이 없고 명기名器가 엄격치 않습니다. …대전大殿은 백자기白磁器를 쓰고 동궁東宮은 청자기靑磁器를 쓰며, …사대부는 조질백자常白器; 포개구이한 것를 사용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여,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자기의 품질을 엄격히 구분하고자 했던 사실을 알려준다.
또 1790년대 정조는 여러차례 민간에서 갑기匣器; 갑번백자와 화기畵器; 청화백자를 쓰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데, 표면적으로는 사치풍조를 경계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분원의 청화백자가 민간에 유통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 역시 왕실 도자의 수준을 일반과 구분함으로써 권위를 유지하려는 의식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두 번째는 조선백자가 사용계층, 특히 지배계층의 이념을 가시화하는 도구였다는 점이다. 유교를 새로운 국시國是로 채택한 조선은 유교적 예의식禮儀式을 실천함으로써 지배이념을 드러내 보여주려 하였다. 따라서 초기부터 『세종실록 오례의世宗實錄 五禮儀, 1454년 간행』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1474년 간행』같은 규범집에 각종 제기祭器와 명기明器 등 의례용기의 모양과 문양, 재질과 용도를 자세하게 정해 놓았던 것이다. 분원백자가 너무도 단정하고 엄중한 형식미를 보여주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규범을 엄격하게 지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왕실 뿐 만 아니라 문인사회에서도 백자는 나름대로의 이념과 취향을 잘 반영하고 있다. 조선후기에 특히 유행한 다양한 문방구(사진 5)와 분재용 화분, 주기酒器들은 이와같은 양반사대부 계층의 선비문화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백자가 지닌 세 번째는 성격과 의의는 조선인들 누구나 사용한 생활필수품이었다는 점이다. 백자는 제기나 동전銅錢의 재료가 되는 구리에 비해 값이 싸고, 질그릇이나 목기보다 품질이 우수하면서 보편화된 반상기의 재료였다. 따라서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69책 숙종 42년(1716년)조에 ‘민가가 1270호인 전라도 변산의 한 마을에는 사기점이 무려 27호에 달할 정도’라고 할 만큼 왕실이나 사대부 계층 뿐만 아니라 지방의 서민들까지 사용하는 대표적인 그릇이었던 것이다.
네 번째는 조선백자가 당시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한 산업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백자는 토기에서 회유도기로, 다시 청자를 거쳐 완성된 자기磁器의 결정체로서 순수한 백토를 가공하여 1300℃에 이르는 고온에 번조하는 기술은 아무나 쉽게 모방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따라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이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9을 통해 그 기술을 얻기까지 세계에서 백자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중국과 한국 뿐이었다.
근대에 이르러 조선백자를 보는 시각은 이와같은 조선사회 속에서의 성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낙후된 기술로 치부하는 편견을 키웠다. 즉, 조선으로부터 얻은 기술로 만들어진 일본백자가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성공시켜 근대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던데 반해 조선백자가 산업화하여 국부國富로 연결시키지 못한 점은 아쉬움을 넘어선 무능력으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이와같은 근대기 중상주의적重商主義的 관점은 조선백자의 미감마저 폄하하여 소박하고 애상哀傷에 찬, 민예적인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일제강점기동안 백자가 지배층의 몰락과 함께 왕실의 권위와 지배층의 이념을 보여주는 위세품威勢品이나 의례품儀禮品으로서의 성격이 사라지고 생활용기로서도 산업화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시각이 일제의 도자산업 침탈에 이용되고 올바른 전통계승의 기회를 차단함으로써 이후 우리나라 도자발전에 적지 않은 걸림돌이 되고 있는 점은 실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당시 백자를 산업화의 대상으로만 치부하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은 일제강점기에 촉발된 고려청자의 재현과도 관련이 있다. 도예陶藝가 성립의 기초를 이룬 근대기에 대내외로 관심이 주목된 것은 청자였으며, 청자의 재현이야말로 수공예적 예술성을 지닌 전통도예의 시작이자 목표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인식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전통도자에서 ‘청자는 작품이지만 백자는 생활용기’라는 관념이 은연중에 남아있고, 오히려 해방이후 들어온 서구의 백자들이 현대도자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오늘날 다변화된 도자 속에서 조선백자는 전통의 힘을 드러낼 자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발달된 사회일수록 전통은 중요시되고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는 더욱 절실해진다. 자전거를 예를 들어보자,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 보다 빠르고 편안한 탈것은 많다. 그러나 자동차가 있다고 해서 자전거를 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건강을 생각해서, 또는 환경을 생각해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웰빙이라고 하는 트렌드에 걸맞는 레져용품으로 거듭나고 있다. 도자기도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오늘날 조선백자 역시 새롭게 이해되고 재창조될 필요가 있다.
현대의 시각에서 보아야 하는 조선백자는 더 이상 비非산업화된 민예품이 아닐 것이다. 조선백자는 유교적 관념과 미의식이 담긴 고도의 정신적 대상이며, 여기에 나타난 본질은 사물의 물성物性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념을 당당하게 표현한 자신감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청자나 분청사기와 달리 흰 맨살을 여지없이 드러내야 하는 조선백자는 극도로 정제된 재료의 강하면서 보드라운 질감, 조형의 원천을 이루는 엄정한 선과 절제된 색상의 발견 없이는 완성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백자가 지녔던 보편적 생활의 가치와 함께 잠재된 정신성, 엄정하고 절제된 조형성을 현대적으로 이끌어낼 때 비로소 조선백자의 진정한 의의는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1) 백자소문‘현’자명 발(白磁素文‘玄’字銘 鉢) 조선 15세기, 높이 10.0cm, 조선관요박물관
(사진 2) 백자청화 매조죽문 병(白磁靑畵 梅鳥竹文 甁) 조선 15~16세기, 높이 16.5cm, 국립중앙박물관
(사진 3) 백자철화 삼엽초문 병(白磁鐵畵 三葉草文 甁) 조선 17세기, 높이 23.2cm, 조선관요박물관
(사진 4) 백자청화 운룡문 항아리(白磁靑畵 雲龍文文 壺) 조선 18세기, 높이 40.8cm, 조선관요박물관
(사진 5) 백자청화철화 포도산수문 팔각연적(白磁靑畵鐵畵 葡萄山水文 八角硯滴) 조선 19세기,
높이 13.1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필자 장기훈(張起熏)은 홍익대학교 도자사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덕성여대·국민대·단국대 출강, 해강도자미술관 학예연구과장을 역임했다. 현재 문화재청 감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조선관요박물관 학예연구팀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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