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현대도예공모전 수상작가 초대 <전소영 도예전>
2006.11.21 - 2006.11.26
서울신문사갤러리
우주 속에 빛나는 점들
글 이건수 _ 월간미술 편집장
부정형의 형태들이 중력의 흐름대로 자연스레 놓여 있다. 그 모습은 일견 웅변적이다. 그러나 가장 근원적이고 시원적인 형상으로 응결된 것처럼 보이는 내부의 작은 덩어리들은 고정됨 없이 부단한 움직임을 지속하고 있다. 어느 공간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는 이 커다란 덩어리들은 그래서 무겁지 않고 가벼운 느낌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커다란 점으로 부풀어 오르면서 그것은 응결이 아닌 확산을 지향한다. 한지 위에 찍힌 부정형의 검은 점 하나가 한지라는 백색공간의 단순 차원을 포지티브positive와 네거티브negative의 이중적 차원으로 트랜스 하는 것처럼, 이 거대한 흙의 점은 그것이 틀어박힌 공간을 빛과 어둠 사이에서,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트랜스 시킨다.
이 점의 살갗 또한 미묘하다. 고화도의 바탕 위에서 다시 수차례에 걸쳐 반복된 저화도의 불꽃으로 녹아 붙고 가라앉았다가 또다시 긁어냄을 당하면서 안착된 이 색채들의 추상적 컴포지션은 그 자체가 하나의 캔버스가 되어 살아있는 표정을 드러낸다. 어떤 것은 잭슨 폴록, 또 어떤 것은 프랭크 스텔라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면서 근원적 형태에 걸 맞는 선과 색채로 아로새겨진다. 마치 항아리 위에 가라앉은 색 먼지 그림이나 중첩된 지층 밑에서 언뜻 드러나는 광채처럼, 그것은 전체적으로 튀지 않고 가라앉은 듯한 그윽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 도조형식의 도예는 입체적이라기보다는 회화적인 뉘앙스가 더욱 강하고, 그것도 서양화 보다는 동양화의 질감에 가깝다.
요소와 전체와의 관계 짓기를 모색하고 있는 이 작품들은 선이면서도 면이 되고, 면이면서도 입체가 되는 요소들의 다채로운 혼융을 통해 2백여 년 전의 고전주의 미론을 현대적 추상의 어법으로 재해석한 새로운 ‘다양성의 통일’을 획득하고 있다. 그것들은 전체 속에서 하나의 의미가 살아나고, 하나의 의미를 통해 전체가 성립되는 거대한 공간적 컴포지션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이 어찌 보면 전소영이 꿈꾸는 우주론적 정원庭園의 풍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탁자 위에 놓인 사과 몇 알이 단지 탁자의 사각형 속에서의 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방 전체의 공간 구석구석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선으로 긴밀한 역학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전소영의 검은 구형체球形體들은 물리적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더 나아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 속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사색하고 있다.
자신의 형태를 닮은 색채를 품고, 편안하고 자유롭게 놓여 있는 이 점들은 혜곡兮谷이 말한 전통 도예미의 ‘비작위성’에 닿아있으며, 선반이나 서가 위에 있는 듯 없는 듯 허심하게 놓여져 우리의 삶과 공기 속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던 전통 도자기의 ‘은자隱者적 미학’의 공간을 연상시키고 있다. 질퍽한 흙이 스스로 ‘흙다움’을 넘어 유리 같이 투명하고 단단한 질료로 극적으로 변신하는 것이 도예의 매력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먼지 같은 자신의 몸이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로 변하는 신비가 도예의 영원한 생명력이라고 한다면, 그런 매체적 전환의 장점을 지켜나가는 일은 우리 예술계에 이로운 행보가 될 것이다.
불火과 물水과 나무木와 흙土과 철金을 섞어 하나로 만들고, 그것을 하늘天과 땅地의 광대한 공간 속에서 빛나는 해日와 달月처럼 승화시킨 전소영의 검은 점들은 평면과 입체, 물질과 정신, 안과 밖이 서로 뒤섞이는 새로운 공간 역학의 꼭지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손창귀 도예전
2006.11.8 - 2006.11.14 가나아트스페이스 1층
모델링을 통한 창작 열정의 표출
글 김진아 _ 홍익대학교 도예연구센터 연구원
고이에 료지Koie Ryoji 도예전
2006.10.31 - 2006.12.17 아주미술관
불을 훔친 소년
글 김민경 _ 아주미술관 큐레이터
고이에 료지는 지난 70년대 일본에 서구 현대미술이 유입되던 시기, 전통적인 도자작업과 서구의 도자 오브제 사이에서 독자적인 길을 모색해온 작가로서, 일본 도자사陶瓷史 속에서 대표적인 아방가르드avant-guard 작가로 거론되곤 한다. 전시 작품은 모두 200여점으로 다완 20점을 제외한 대부분이 지난 2월과 9월 사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제작된 작품들이다. 그동안 고이에는 세계 각지에서 작업, 전시해 오면서 그 지역의 재료를 그대로 사용하고 또 그곳의 문화나 역사를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의 흙과 물, 불을 기본 재료로 하여 솟대,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십장생十長生 등의 한국 문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 그리고 아직도 풀리지 않은 한일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을 선보이며 눈길을 끌고 있다.
이번 전시는 지난 50여년간 도예의 한정된 영역을 뛰어넘어 탈장르화를 시도한 고이에의 다양한 시도와 실험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도자기의 ‘안’을 제시하며 도공의 손가락과 흙이 만난 그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나 이미 온전한 기형器形을 이룬 그릇들을 서로 자르고 조합하여 만들어낸 형태들은 작가의 자유분방한 실험성을 대변해준다. 이와 함께 그의 실험성은 완벽하게 정리되거나 계산된 결과물로의 작품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의 의외성과 즉흥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도자 미학에 대한 개념을 혁신적으로 전복시키는 작품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마치 달필로 휘갈겨 쓰거나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그리듯 유약의 느낌을 표현한 작품, 두 점의 항아리가 불 속에서 서로 붙어버려 하나를 이루게 된 작품 등은 불과 자연의 힘에 최대한의 존중감을 부여하고 규제를 넘어서 자유의 일탈을 시도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읽게 해준다.
형태와 불의 다양한 실험과 더불어 고이에에게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해 준 것은 그 안에 강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는 설치작품들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인간의 생生과 사死의 접점이 되는 흙에 대해 상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흙으로의 귀환>, 물레를 돌려 레코드판 형태를 만들고 이 판과 턴테이블의 바늘이 만나 이루어내는 음향을 들려주는 작품 <흙의 소리>가 대표적인 설치작품에 속한다. 또한 전시장 외부의 수면공간에는 알루미늄을 결합하여 만든 오브제 <숲길>이 설치되어 관람객들을 자연스럽게 전시장 입구로 끌어가고 있고, 미술관 2층의 야외에 설치된 <흙벽돌>은 자연의 순환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전시장 안과 밖을 넘나들며 설치된 작품들은 도자작품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 자연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예를 제시하며 전시 구성의 묘미를 보여주고 있다.
고이에는 완벽하고 규정된 형태보다는 의외성과 즉흥성에 최대한의 허용치를 부과하며, 작업의 결과물보다는 오히려 인간과 자연이 만나 작품이 이루어지는 과정 자체를 중요시하는 작가이다. 그러하기에 작품을 미적 호오好惡에 따라 선별하기보다는 자연의 힘에 의해 태어난 생명체로서 작품 한점 한점에 그 가치를 부여한다. 이번에 전시된 대부분의 작품 역시 약 30일간 한국에 머물면서 모두 하나의 가마에서 나온 결과물들이다. 이와 같은 다작多作과 독특한 미학적 시각은 그의 천재성과 자신감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작품이 완벽함과 절제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비판적인 견해를 낳으면서, 그의 작품에 대한 상반된 의견들이 공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김영진 도예전
2006.11.2 - 2006.11.12
대전 대청 문화전시관
공간에 부조된 지난 역사의 흔적들
글 박영택 _ 경기대학교 미술학부 교수, 미술평론가
김영진은 도자기 파편처럼 보이는 것들을 공간에 가설했다. 흙과 불과 작가의 손, 노동이 개입되어 만든 이 작은 조각들은 전통문양이 새겨진 옛 그릇, 유물들을 떠올려준다. 실제 그릇에서 깨져 나온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만든 조각들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벽과 바닥에 서식하듯 중식된 작은 단자들은 온전한 그릇의 몸에서 이탈해 정처없이 흩어져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것들은 끝없는 윤회나 순환을 상징하듯 원형의 고리로 나선형으로 혹은 벽과 바닥으로 연결되어 줄지어 서있다. 전시장 공간 전체를 장소 삼아 산개되어 있는 도자기 편린들을 하나의 풍경처럼 접하고 있다. 일종의 설치적인 도예의 전시방식이다. 그 조각들은 공간을 점유하고 공간 속에 형상을 만들고 나아가 역사와 시간을 떠올려준다.
자연스럽게 깨지고 떨어져 나아간, 비교적 균질한 크기를 지닌 그 작은 사금파리 조각들 안에는 꽃문양이 소박하게 그려져 있다. 흙을 화면 삼아 그 표면에 저부조로 새긴 음각화된 그림들이다. 흙의 피부에 그려진 이미지들은 비로소 불에 의해 그림으로, 형상으로 완성되었다. 흙의 물성과 손놀림이 불에 의해 단단하고 결정적인 순간으로 멈춘 것이다.
연꽃이나 꽃 봉우리, 구름 등이 간략하게 선으로 윤곽 지워진 그림들은 더없이 소박하고 청초하다. 그것들은 백자나 청자 혹은 대접이나 막사발, 흔한 그릇의 피부를 장식했던 다채로운 식물 문양, 길상문양들이다. 이 전통적인 문양들은 한국인의 기층의식에 자리한 원시신앙과 원초적인 삶의 기원과 욕망에 의해 시술된 것들이다.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고자 했던, 더없이 소박하고 간절한 주술적 이미지들인 셈이다. 기복과 희구, 염원, 우주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에의 소망들을 추상적, 기호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이 문양들에서 작가는 선조들의 순박한 마음과 삶의 흔적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역사와 문화, 미의식의 한 자락을 접했나 보다.
작가는 그 문양을 재해석하고자 한다. 크고 작은 흙덩어리에 분장을 하고 조각을 해 그 문양을 오롯이 환생시켰다. 그러니까 여러 모양으로 파내고 깎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각기 다른 형태를 분장했고 그 작은 조각들을 시간의 흐름, 세월의 흔적을 나타내는 의미에서 바닥에 원형으로 설치하기도 했다. 마치 고분 발굴 현장에 흩어져 있는 사금파리나 백자, 청자의 파편들을 접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완성된 그릇이나 기물의 형태를 띤 것들이 아니고 몸의 일부에서 추출된 것들이자 원래의 형상을 연상시키고 상상케 하는 흔적들이다. 제 몸을 갖지 못하고 분열되고 훼손된 이 도기의 자취들은 순간 부재와 상처를 떠올려주며 완성과 미완성, 시간의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소멸을 겪는 모든 존재에 대한 회상을 가능케 한다. 그런가하면 고고학적 내음을 짙게 풍기는 인증들이다. 그런가하면 얼핏 불교적 사유의 한 자락을 만나기도 한다. 한결같이 완성되고 영원한 미를 간직한 완벽한 몸을 요구한다면 이 도자기 편린들은 역설적으로 생의 무상함과 시간의 입김 아래 모든 것들이 소멸을 겪을 수 밖에 없음을 일러준다. 작품이란 것도 일시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유한한 삶을 살다가 가는 존재들이라고 말이다.
또한 작가는 선조들이 그릇에 새겼던 문양의 의미를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려 놓고 그 풍경 아래 목도케 하려는 연출을 보여준다. 결국 이 작품들은 한국전통문양의 재해석을 통해 그것이 작품으로서의 예술성과 조형적 아름다움을 충실히 반영할 수 있는 지점, 그리고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선에서 풀려나온 것들이다. 물론 흙과 불과 손, 상상력이 만나 빚어내는 도예만의 힘과 그것의 새로운 전시방식에 따른 또 다른 이야기의 증폭을 고려하면서 말이다.
김판준 개인전
2006.11.15 - 2006.11.20
대백프라자갤러리
유년의 기억
글 김임수 _ 계명대학교 미대교수, 미학철학박사
도예는 가장 원초적인 예술이다. 그것은 물과 불, 흙과 공기 등의 자연을 구성하는 가장 원초적인 요소에서 비롯되어 인간의 미적욕구가 자연의 한계 속에서 추구하는 갖가지 삶의 애환과 정서를 담는다.
접시가 주류를 이루는 김판준의 도예는 그 원형의 우주 속에 자라나는 갖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것은 흙으로 다져진 단순하게 둥근 평면이 얼마나 깊이 있는 입체적 공간을 포용할 수 있으며 또한 따분하고 지루한 현실적 시간을 추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시간의 순환과 공간의 중심을 상징하는 그 원형의 이미지 속에서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끌어올리고 그 기억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다. 유년기의 추억이 서려있는 경주 남산의 산자락과 그 산기슭 틈틈이 요지부동의 자세로 산의 정적을 끌어안고 있었던 수많은 불상들의 기억,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낡은 절터 곳곳에 흩어져 있었던 파편 짙푸른 하늘과 싱그러운 초목을 고스란히 투사하고 있었던 맑은 계곡, 그 물 속을 헤엄쳐 다니던 물고기들, 너무나도 한가해보이는 그들의 여유와 자유… 새삼스레 그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현실이 너무나도 메마르고 각박하기 때문이 아닌가? 중첩된 산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문자들의 파편이나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이미지는 한정된 작가의 기억의 회화적 재구성의 의미를 넘어서 메마르고 각박한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우리 인간 삶의 의의와 가치를 각인하고 있는 것이다.
중첩된 산 속에 드문드문 떠오르는 불상들의 이미지나 상감기법으로 각인된 일렁이는 물결들을 배경으로 꽃잎을 물고 여유자적하게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이미지는 배경과 형상의 표현효과를 더욱더 적절하게 가중시킨다. 둥글둥글한 산자락의 동세 속에서 요지부동의 불상들은 더욱 더 조용한 안정감을 획득하고 있다. 박진감있게 출렁이는, 심도있게 각인된 물결들의 흐름 속에서 평면적으로 도안된 물고기들의 이미지는 한층 더 느긋한 여유를 즐기고 있다. 그 안정과 여유는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 인간 삶의 욕구를 반영한다. 청회색이나 갈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작가의 색채취향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펑퍼짐하게 배가 부르고 밑이 무거운 그릇의 아래쪽이 안정감을 더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김판준의 도예는 바로 그 안정과 여유 속에서 인간 삶의 순수성을 되찾고자 하는 작가적 열망을 담고 있다. 경주 남산에 서려있는 어린 시절 기억의 파편들을 끌어올려 그들의 이미지를 재구성해 자연에의 회귀를 꿈꾸는 그의 도예는 흙이라고 하는 원초적인 질료를 통해서 인간 삶의 허구를 자연의 진실에 접근시키고자 하는 또 하나의 색다른 도예의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흙의 시나위 - <천개의 꽃>전
2006.11.15 - 2006.11.21 가나아트센터
여성도예가들의 도전적인 논제들
글 이진숙 _ 한향림갤러리 큐레이터
1970년 대 초 린다 노클린의 <왜 위대한 여성미술가들이 존재하지 않았는가?>라는 논고이후 사회적 구조에서 여성이 당하고 있는 불평등과 억압을 미술로 표출시키고 그것을 변혁시키고자 했던 여성미술가들의 노력은 지금까지 페미니즘 연구에 중요한 논제로 남아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여성 도예가 그룹으로 15년 이상 활동을 지속해온 ‘흙의 시나위’는 1989년 제 3공간에서의 첫 전시회를 가진 이후 여성성에 대한 정체성과 사회적 성역할 구조에 관한 주제들로 중심으로 전시를 개최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밥 부엌 여자>전이나 <女子>전 등의 전시는 쉽고 유쾌하면서도 현실감 있게 사회적 구조 안에서의 여성 또는 여성성을 잘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까지 ‘흙의 시나위’그룹은 회원들 간의 교류와 돈독한 관계를 통해 매년 정기전을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지속해 온 진취적 여성도예가들의 모임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해마다 다른 전시의 주제를 통해 관람자들에게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줌과 동시에 개성이 강한 작가들에게 새로운 발상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특히 <컵과 함께하는 시나위>, <천개의 머그컵> 전은 도자기의 실용적인 쓰임새를 부각시킨 전시판매전의 일환으로 일반인에게 도자예술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번에 열린 <천개의 꽃>전 역시 이러한 전시활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 하다. 사실 천千이라는 단어는 숫자를 의미하기보다는 다多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한 기존의 작업성향에서 탈피하려는 작가들의 적극적인 시도는 흙이라는 재료와 더불어 유리나 마그네틱, 섬유 등의 이질적인 재료의 혼합 또는 회화적인 기법의 시도, 과감한 설치 방법 등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꽃이라는 주제의 연결장치에 집중하려는 작가들의 의지와 새로운 실험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작가 개인으로서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시도들은 매우 긍정적인 반면 단체전에서 전달되는 메시지는 관객이 공감하기에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결국 한정된 시간, 공간, 작품으로 주제를 표현해야 하는 어려움은 단체전의 한계이기도하다.
뿐만 아니라 매해 꾸준한 전시에도 불구하고 흙의 시나위는 초창기 명분이었던 여성주의에 관한 진취적인 목소리는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주제적인 면에서 일관성 없는 작품들이 불협화음으로 혼란스럽기까지 하다고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작가들 스스로의 비판적 자각에 의한 문제인식과 회원들 간의 주제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토론, 마지막으로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문제를 고민해야한다.
따라서 ‘흙의 시나위’가 여성 도예가들의 모임으로 주목받았던 만큼 개인적인 경력이나 단체전에서의 명분을 뚜렷하게 갖추기 위해서는 작가들에서만 이루어지는 전시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전시기획과 의도가 필요하겠다. 또한 여성도예가들의 대표적인 그룹으로 자리매김한 ‘흙의 시나위’가 현대도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그에 부응하는 역량을 지닌 그룹이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앞으로 여성이 아닌 여성도예가들로서의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기사를 사용하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s://www.cerazin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