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건강한 참살이(웰빙)를 선도하는 우리 도자산업(1)
행남자기의 도자식기 역사와 식문화
정 호 정_ ㈜모디 기술연구소 소장/전무이사
웰빙이 우리 식문화를 바꾸고 있다. 2000년대 초 웰빙 바람에 맞춰 우리 도자식기산업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웰빙은 건강한 식탁에서 시작된다는 인식하에 다양한 기능성 및 디자인의 도자식기를 선호하고 있다. 인류 식생활은 생활양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로 자리해 왔다. 어떤 음식을 어떤 그릇에 담아 먹을 것인가에 대하여 민족에 따라 여러 형태로 발전해 왔다.
식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장 직접적으로 접하는 문화요소이지만 오랫동안 그저 음식을 담는 그릇 또는 용기로만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현대인은 활발한 경제활동과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으로 웰빙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식기는 점차 중요한 생활문화의 한 분야로 주목받게 되며 식생활 취향에 따라 다양한 식기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도자기산업은 세계장기경기침체, 핵가족 및 외식문화 변화로 국내소비 감소, 인건비 상승으로 생산성 악화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본고에서 근대 도자식기산업의 발달 과정과 식기문화 변화 및 앞으로의 발전 방향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근대 도자기산업의 발달과정
일제하의 도자기 제조업체는 땔감을 연료로 사용하여 수동식 물레성형의 재래식 방법으로 제품을 만들었고 전국에 산재해 있었다. 그러나 제조설비를 재대로 갖춘 회사는 부산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한도자기와 여주의 조선도자기 밖에 없었다.
일제가 전쟁 준비를 위해 놋그릇 까지 공출해가 식기의 품귀현상이 심화되고, 대한도자기와 조선도자기의 횡포가 심했던 1942년, “우리민족의 식기는 우리 손으로 만들자”며 순수 우리 자본과 기술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도자기 공장인 행남사가 설립됐고 지금의 (주)행남자기가 되었다.
이후 밀양제도소, 중앙도자기, 계림요업 등 근대 도자기 회사가 설립되었다. 지금의 한국도자기의 전신인 충북제도사도 이때 출범했다.
해방이후 환원자기1)인 막사발, 대접, 밥공기 등은 귀한 대접을 받았다. 사기밥그릇 하나에 쌀 두되와 교환됐다.
근대 우리나라의 도자기 산업의발달 과정은 행남자기의 역사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행남자기는 1942년 백자(환원자기)제품을 시작으로, 1974년 국내 최초로 Stone Ware를 개발 할 때 까지 약 30년간 백자기를 생산하였다.
Stone Ware는 전량 미국에 수출하였으며, 1977년 국내최초로 뉴본차이나(Ivory china)를 개발, 국내 최초의 고급 산화자기2)를 시장에 내 놓게 되었다. 이 제품은 원료 전체가 국내에서 채광한 원료만 사용한 제품으로 제품의 고급스러움은 국내 시장을 석권했다. 후발업체들은 산화자기인 아이보리 차이나 개발을 하려고 엔지니어를 스카웃 하는 등 노력하고 있었다.
1981년 행남자기는 아이보리 차이나보다 백색도가 훨씬 뛰어나고 투광성이 좋은 Snow Bone china와 Bone china를 차례로 개발하였다. 아이보리 차이나는 국내원료로만 만들어 졌지만 Snow Bone china와 Bone china는 국내 원료와 수입 원료를 함께 사용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당시 Bone china는 색감이 너무 좋고, 투광성이 좋아서 아이보리차이나와 너무 구별되므로 Snow Bone china를 먼저 출시키로 하였다.
Bone Ash를 이용한 Snow Bone china는 출시되자마자 영업이 필요 없었고 상인들이 서로 먼저 가져가려고 차를 대고 기다리는 호황까지 누렸다 고 한다. 1957년 국내최초로 본차이나를 개발, 제품을 전라남도 물산공진회에 출품하여 특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본차이나를 1984년 비로서 생산, 판매하게 되었다.
행남자기는 도자기 중의 최고급인 Bone china까지 자체 기술로 개발, 출시하여 명실상부한 고급도자기 제품생산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행남자기의 역사는 도자기 산업의 역사와 같다는 말이 나온 이유도, 모든 신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하여 생산하였기 때문이다.
또 1984년도에는 옛 선조들이 생산했던 자기(환원 분위기에서 소성한 제품 : 백자)를 획기적으로 Up Glade 시킨 최고급 초정자기를 개발하였다. 이 제품은 초정밀 가공된 원료를 사용하고, 1340℃의 초고온에서 구워냈다.
1280℃에서 화공 소성한 In Glage화공기법(안료를 사용, 무늬를 만드는데, 고온에서 안료를 유약과 완전히 반응시켜, 안료에서 나올 수 있는 유해물질에 안전하게 함)을 사용하여, 세계 최고급 환원자기인 초정자기, Ultra Fine을 신제품으로 출시하였고, 유럽 왕실에만 납품하는 에밀 베어나도(유약에 조각을 하여 거기에 금이나 백금을 입힌 최고급 도자기)도 제작 기술을 전수받아 생산판매 하였다.
이 제품들은 지금 세계시장에 내 놓아도 최고급으로 인정받는 최고의 자기제품 이었다.
1970년대와 80년대는 저 임금에 싼 원료 가격으로 인해 노동집약 업종인 도자기산업은 고용 증대 및 수출 효자 품목이 되었다.
경쟁력이 생기자 정부에서는 도자기를 우리나라 10대 수출 전략 품목으로 지정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아 너도 나도 도자기 공장을 설립했다. 500명 이상 종업원을 가진 큰 공장만 해도 10개가 넘었다. 그렇게 되자 거기에 맞춰 도자기 생산 기계공장도 생겨났고, 소지공장도 생겨서 소재를 직접 만들지 않고 구입하여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로인하여 작은 도자기공장들도 급격히 늘어났다. 행남자기만 해도 1공장부터 5공장까지 있었고 공예공장, 특수인쇄공장, 함평의 행천자기공장, 인도네시아 공장 등 공장을 늘리고 생산량도 계속 늘려갔다.
자세한 내용은 본지 10월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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