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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에블라의 딸라베라 Talavela
  • 편집부
  • 등록 2003-03-20 15:33:28
  • 수정 2016-04-17 20:3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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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도자기 뿌에블라의 딸라베라 Talavela 글/사진 유화열 도예가 딸라베라(Talavela) 라는 말은 에스빠냐의 도자기 생산지였던 딸라베라 데 라 레이나(Talavera de la Reina)에서 유래한다. 일반적으로 딸라베라 보다는 마요리까(Mayolica)1)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뿌에블라에서는 에스빠냐의 여러 도자기 중심지 중에서도 특히 딸라베라 데 라 레이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배경에서 딸라베라 라고 부르게 되었다. 결국에는 딸라베라나 마요리까나 같은 도자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딸라베라는 주석, 납, 모래, 소금, 물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주석불투명의 백색유약을 바른 것인데, 때로는 라스타 장식을 한 도기 종류를 말한다. 에스빠냐의 딸라베라는 이 백색유약을 바른 것과 라스타 장식을 한 두가지를 다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멕시코에서는 백색유약을 바른 방법만이 건너와서 발전하게 되었다. 뿌에블라市는 식민지시대 동안에 멕시코뿐만 아니라 신세계 도시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딸라베라의 중심지였다. 1531년에 에스빠냐에 의해 도시로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1532년에 뿌에블라 데 로스 앙헬레스(Puebla de los 뇆geles)라는 도시 이름이 붙여졌다. 뿌에블라는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였던 베라크루즈(Veracruz)로 가는 중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상인들이 몰려드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발전하는 한편 도자기 생산의 중심지로서 문화, 예술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어느 식민지 시대의 도시구조와 마찬가지로 에스빠냐에서 온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으로 멕시코에서 태어난 백인들 끄리올료들은 도시 중심부에 살았으며 인디오들은 도시 주변에 정착하였다. 1550~1570년 사이에 드디어 멕시코에서는 처음으로 유약을 바른 딸라베라와 아술레호스를 만들게 되었다. 1580~1585년에는 체계적인 계획에 의해 도공들과 작업장들이 배치되는데 대부분의 중요한 공방들은 당시 도자기 산업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도시의 중앙부에 자리를 잡게 된다. 뿌에블라 도자기는 1650~1750년 사이에 최고의 절정을 이룬다. 1653년에 ‘도공들의 규칙(Ordenanzas de loceros)’이 만들어진다. 도자기의 생산 규칙과 도공 조직에 대한 기본적인 틀은 에스빠냐의 것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들의 노동조합도 구성되었고 이들은 단합하여 제품의 가격을 정하고 일정한 품질관리도 꾀하였다. 도공들은 교육정도, 숙련도, 기술, 개인 배경 등에 따라 크게 견습생(aprendiz), 정식 도공(oficial), 마에스뜨로(maestro)로 3단계로 등급이 나누어진다.2) 견습생의 작업이 향상되면 감찰관(veedores)의 판단으로 정식 도공으로 승격할 수 있다. 정식 도공들이 하는 일은 주로 딸라베라나 아랍 아술레호스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그러나 식민지시대에는 실력만으로 최고의 도공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던 인종차별의 사회였다. ‘도공들의 규칙’에서는 다음과 같이 도공을 선발하는데 있어 인종적인 판단을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다. “에스빠냐인들을 만족할 수 있고 그들에게 믿음을 얻는 게 중요하므로 어떠한 흑인(negro), 물라또(mulato)3), 인디오는 정식 도공(oficial)으로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식민지시대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 규칙을 지속하기란 상당히 어려웠다. 초창기에 딸라베라 기법을 전수할 때 만해도 정식 도공과 마에스뜨로의 위치는 에스빠냐인들이 독점해왔지만 더 이상 에스빠냐의 인구로 그 많은 이들을 충당할 수는 없게 되었다. 또한 인디오 도공들은 기술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에스빠냐의 기술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점차적으로 인디오와 메스티소도 도공 최고의 위치인 마에스뜨로가 될 수 있었다.4) 17세기를 거치면서 뿌에블라의 작업장에서 제작되는 도자기들은 매우 다양해진다. 17세기 중반에 등록된 공장의 수는 23개로 알려졌는데, 그 중에서 라 뜨리니닫(La Trinidad) 도방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매우 깔끔한 색상의 표현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현저하게 산업화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젖 같은 유상액의 광택있는 백색 유약의 발달로 매끄럽고 광택이 나는 작품들이 대량으로 생산된다. 백색 유약 위에 입히는 강하고 약한 톤의 코발트 색조는 다채색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높이 평가받는데 이는 이전에 비하여 유약 성분의 실험과 발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말에 이르러 뿌에블라의 도공들은 푸른색의 표현에 좀더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되어 이 색깔을 과감하게 응용하기 시작한다. 또한 노란색, 녹색, 오렌지색, 푸른색, 검은색 등이 장식에 보다 다양하게 사용된다. 이 중에서도 특히 노란색과 코발트색의 강한 대비는 자연스러운 색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흑색의 안료를 이용하여 색깔의 테두리 윤곽을 잡아가는 것 역시 성공적인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외부에서 온 도자기를 새로운 형태나 기법으로 소화해 낸 고통의 흔적이 보이지는 않지만 외형적으로 뿌에블라의 도자기는 외형적인 면에서 멕시코 소비시장을 만족할 만한 충분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는 생산의 꾸준한 증가로 이어진다. 결국 뿌에블라 도자기는 철저한 모방의 단계를 충실히 밟음으로써 17세기 말까지 창조적인 변화를 준비하는 잉태기를 가지게 되었다고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신부였던 아구스틴 데 베딴끄르뜨(Fray Agust뭤 de Vetancurt)가 뿌에블라 도자기에 대해 언급한 말을 인용해 보면 당시 이러한 기술적인 완성도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뿌에블라에서 만들어진 광택 도자기는 매우 아름다운데, 정교함에 있어 중국의 청화백자와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던 청화백자와 견줄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뿌에블라의 도자기는 품질의 향상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1745년에 후안 비야 싼체스(fray Juan Villa S뇆chez)신부의 말을 빌리자면 “뿌에블라에서는 많은 양의 도자기가 제작되는데…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운 이 도자기는 에스빠냐의 딸라베라 도자기와 비슷하거나 훨씬 뛰어나다… 뿌에블라 도공들의 훌륭한 도자기를 만들고 싶어하는 야심은 중국 도자기의 아름다움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려고 애쓰고 있다.”5) 이와 같이 뿌에블라 도자기는 아랍, 에스빠냐, 중국에서 들여온 각종 기술과 미적인 요소들을 아메리카 대륙에서 접목시키는 것을 실험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당연히 여기저기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아랍의 영향은 약을 담는 알바레로(albarelo)와 초코릿, 바닐라와 같은 향기있는 재료를 보관하는 띠보르(tibor)에서 잘 나타난다. 또한 딸라베라의 원조 격인 에스빠냐의 안다루시아(Andaluc뭓)와 까스띠야(Castilla)의 도자기에 풍부하게 흡수된 르네상스의 장식적인 요소와 색상도 이곳의 도자기에 강하게 나타난다. 6) 특 성 뿌에블라의 딸라베라는 분명히 어딘가 모르게 원조격인 에스빠냐의 것과는 다르다. 에스빠냐의 딸라베라 역시 원조 격인 아랍의 것과는 달랐다. 외지에서 수입되어 온 새로운 도자기의 기법, 형태, 색상 등의 시각적인 요소를 모조리 모방한다 해도 누가 모방했느냐에 따라 도자기가 주는 느낌은 달라진다. 아마도 인디오들은 그리고 에쓰빠냐인들은 모방한 것조차 표시 나지 않도록 완벽에 가까운 모방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예술이라는 조형물 안에는 숨겨지지 않는 것이 있는 것 같다. 즉 예술가의 손을 통해 전해지는 어떤 힘을 말한다. 이것은 민족성, 지역성, 개개인의 성격, 당시의 상황에 이르는 다양한 환경적 요인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뿌에블라의 딸라베라는 에스빠냐의 것과 비교해서 어떻게 달라졌고 그렇게 해서 형성된 그들만의 독특한 성격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에스빠냐 안에서도 딸라베라의 도자기는 “중국을 모방한 도자기 제작지”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이렇게 뿌에블라의 도자기도 딸라베라 도자기에서 추구하는 방향과 무관하지 않았다. 뿌에블라의 딸라베라는 중국 청화백자의 형태, 무늬, 화면 구성의 표현 방법을 따와 에스빠냐의 딸라베라 기법으로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7) 여기에다가 멕시코 도공들의 전통적인 감각을 가미하여 만든 것이 뿌에블라의 딸라베라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에스빠냐의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보자. 당시의 도자기에는 회화적 표현이 장식의 주된 흐름이었는데, 에스빠냐의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다르게 바뀌게 되었다. 화면의 중심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제비, 백로, 토끼, 노루는 더 작게 그려지기도 했고, 인디오 도공들이 처음으로 접한 동물을 그리는 데 있어서 도자기의 그림만으로 보고 정확한 형태를 그려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잘 알아보기 힘든 동물의 형태는 나무 잎사귀로 가려서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멕시코의 자연환경에서나 볼 수 있는 소재들을 중국적인 화면 구성에 곁들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소나무 위에 서있는 백로를 표현할 때 소나무가 아닌 선인장 위에 백로가 서있기도 한다. 또한 푸른색의 코발트를 사용함에 있어서 딸라베라의 것은 색상이 부드럽고 섬세한 데 반해, 뿌에블라의 것은 안료를 매우 두껍게 칠해 부조처럼 보일 정도로 표면 위로 도톰하게 올라와 있다. 그리고 화면의 구성에 있어서 불합리한 비율과 포화상태의 공간을 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옆에 한 여인이 서 있을 때 여인의 키는 나무보다 훨씬 더 크게 그린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동화 속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천진함, 자유로움이 묻어 나온다. 이것이 멕시코적인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뿌에블라에 있는 까사 베요(Casa Bello) 박물관에는 17세기부터 유래되는 훌륭한 딸라베라 도자기가 잘 전시되어 있다. 이들을 통해 식민지시대의 멕시코적인 고유한 딸라베라의 멋을 느낄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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