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가이면서 도예가가 아니라는 작가?
도자 재료 물성을 이용한 회화가 그의 작품 모토
내가 하는 작업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에게
자세히 알려주고 싶다고
도예를 전공한 후 공예인이 될 것이냐 예술가가 될 것인가의 선택이 작품의 큰 갈릴김이 된다. 자신이 선택한 도조나 도벽에 장식이라는 말로 애써 실용을 부여하기보다는 좀더 과감하게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이 시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작가가 있다.
작가 백종환씨(49)는 도예가 이면서 도예가가 아니다. 도자재료의 물성을 이용한 회화가 그의 작품의 모토이다. 일반인이 그의 회화 작품에 도예재료가 쓰였다는 것을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도예재료를 아는 사람이면 알아챌 수 있다. 경기도 여주, 농촌에 터를 잡고 혼자 일하고 생활하는 그에게는 자연과 자신의 작품이 친구가 된다. 작업이 힘겨울 것 같은 작은 체구에 사슴처럼 맑은 눈을 가진 그는 강인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전북 나주가 고향인 작가 백종환은 미대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입시를 준비하면서 평면이 아닌 입체 작품을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런 이유로 홍익대 도예과에 지원했고 학부기간동안 열심히 물레질하고 유약과 번조를 공부했다. 그러나 그가 가는 길은 물레를 잘 차는 도예가의 길이 아니다. “도공이 되기 위해 도예과에 진학한 것은 아닙니다. 전통도예를 계승해 훌륭한 작품들을 남기는 분들이 계시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작가로서 제 작품의 표현기법을 제한하고 싶지 않습니다.”
90년 서울프레스센터에서 선보인 그의 1회 개인전은 도예전시로는 드물게 캔버스처럼 이동이 가능하도록 제작된 그림(도벽)들로 채워졌다. 이 작품들은 물감으로 그린 것이 아니고, 석고캐스팅을 이용해 만든 작은 유니트들에 다양한 유약을 시유하고 연을 먹여서 나온 색과 형태를 회화적으로 조합한 것들이다. 전시를 거듭하며 그의 그림들은 더 과감하게 도자작품의 선입견을 깼다. 성형해서 구운 것들을 화면에 배치하기도 하고 토분을 구워 흙이 갖고 있는 여러 색을 물감처럼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이밖에도 연필, 아크릴칼라, 오일칼라 등을 혼용했다. 재료의 특성 때문인가 그의 그림에는 따뜻함이 흐르고 볼수록 편안하다.
95년 4회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 ‘누구왔냐’는 시골 장짓문에 붙여진 작은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할머니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장짓문은 창호지를 바른 것이고 쪽마루는 오래돼 나뭇결이 깊이 드러난 나무를 석고로 캐스팅해 붙였다. 소결한 흙에 짚을 섞어 바르고 댓돌위의 흰고무신을 도자로 만들어 올려 문밖을 내다보는 할머니의 존재감을 더욱 강조했다.<사진1> “제 그림은 공예가가 회화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순수미술 계열의 작가들은 공예, 영상, 행위, 소리 등 모든 분야를 넘나들 수도 있는 특권을 누린다. 또 그림에 붙일 수 있는 건 뭐든 붙이는 콜라쥬기법도 자유롭게 사용한다. 도자를 통해 알게된 다양한 물성을 이용해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을 회화라고 해도 좋고 도예라 해도 무관하다. 누구나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자유로운 작품을 할 수 있다.
흙이나 유약 등의 광물에서 얻어지는 색은 화학물감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흙이나 유약재료들, 갖가지 광물들을 소결해 나오는 색으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색을 얻을 수 있다. 밤껍질이나 마른 나뭇잎 등의 모든 자연물이 나름의 색을 갖고 있어 그것들을 이용해 자연염료를 추출할 수 있으며 작가든 이 모든것을 적극적으로 작품에 사용한다.
그의 작업장을 채우고 있는 그림들은 ‘어떻게 작업했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다음 전시의 테마를 모노톤으로 설정해 준비하는 대부분의 그림들이 회색과 옅은 흙색, 검은색 등으로 주를 이루고 있다. 화면에 등장하는 것들도 소박한 지붕의 작은 집, 나무, 꽃, 새 등 그가 지내고 있는 경기도 여주의 농촌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백종환씨는 올해안에 경기도 광주 곤지암에 자신의 갤러리를 열고 이 작품들을 선보일 계획이다. “그쪽으로 이전하려고 여러 가지로 분주하게 지냅니다. 그곳에서는 작품을 전시하며 내가 하는 작업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이 좀 더 가깝게 느끼도록 하고 싶습니다.” 외곽에서 작업하면서 일부러 자신의 작업공간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편안히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그가 중심에 두고 있는 ‘자연의 물성을 이용한 회화작업’ 외에도 그가 만든 다기들이 그의 재주를 뽐낸다. 대학시절 실기실 문을 닫을 때까지 학교에 남아 물레작업에 몰두했다. “도자를 이용해 다른 작업을 하고 싶은 데 ‘도자기를 잘 못해서 다른 것을 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 유약연구와 불때기를 심도 있게 공부한 것이 현재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다관의 작아도 날렵하게 뻗은 수구와 조형적 변화를 가미한 뚜껑과 손잡이는 차(茶)를 마시기에 불편함이 없으며 절제된 선과 색은 현대와 와서 동양미의 대표로 꼽히고 있는 선(禪)과 통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가 그의 다기들은 스님들이 즐겨 찾는다.
물레를 차다가 자연스럽게 일그러트린 듯한 다관의 손잡이와 그림이 그려진 둘레가 일정하지 않은 둥근 접시 등은 그가 비범함을 추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다기들은 전시를 통해서나 아는 사람들이 구입한다. “다기는 제가 아니어도 잘하시는 분들이 많잖아요. 제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하기 위해 다기를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 스스로 깨야할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백종환 작가는 젊은 작가들에게 ‘자신이 속해 있는 울타리 안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지 말 것’을 당부한다.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을 하라고 말한다. “천재가 아닌 이상 ‘다작’만큼 좋은 선생은 없습니다. 작은 찻잔을 하나 만들더라도 100개중 10개를 고르는 것과 1000개중 10개를 고르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후대에 천재로 인정받는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천재성에 의존해 작업하지 않고 성실히 많은 작품을 남겼고 그중 명작을 꼽아낸다. 작가 스스로도 자신이 천재가 아닌 보통의 재능이기 때문에 이유를 묻지 않고 많은 작업에서 길을 찾아나가고 있다. “젊은 작가들이 의욕적으로 새로운 작품을 많이 시도해야 우리 도예문화가 다양성을 갖고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희영기자 rikkii7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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