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존 제시먼 도예가 번역/최석진 도예가
나는 뉴잉글랜드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그리고 농장이나 제재소에서 인생을 보낼 것을 기대했었다. 스케줄로 보면 나는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랐었고 아주 부족한 학생이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나는 소설이나 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다. 어떠한 외형이나, 겉치레들로부터 나를 숨기고 싶어 했고,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도 단절하였다. 선생이 된 후에 왜 미술사를 공부해야하는지, 왜 소설이나 철학을 읽어야 하는지 물어보는 학생과 마주칠 때, 경험들과 그러한 지식들이 나에게 준 가치들을 생각하며 학생들에게 답변한다.
우리 인격형성기에는 더 많은 경험을 하면 할수록, 예술가로써 표현할 것이 더욱 많아진다. 우리는 섹스피어나(Shakespeare) 키츠(Keats), 하딩(Harding), 프로스트(Proust)를 읽거나 이해하려고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모차르트, BB킹(BB King),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행크 윌리엄스(Hank Williams)를 듣거나 듣고 즐기려고 시도해야하는 것인가? 우리는 피카소, 미로(Miro), 마더웰(Motherwell), 로스코(Rothko)의 그림을 봐야하는 것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명백한 답변은 “아닙니다”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앉아서 물레를 돌릴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의 깊이와 지적 호기심 없이 위대한 예술작업이 요구하는 다양하거나 깊고 풍부하거나 감각적이 될 수 없다 나의 사고는 제임스 조이스가 말한 다음의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인생의 깊이야말로 예술을 탄생시킨다” 예술가로서 우리는 진부한 방식이나 편리한 해법만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이런 표피적인 것들은 예술세계에 자리할 수 없다. 생명력과 개인의 비전 없는 단지 기교적 숙련에 의존하는 작품은 덧없고 어떠한 영감도 담지 못한다. 숙련된 기능공들이 말하는 기술이란, 예술에서 어떤 판단 가치가 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에게 방향 없이 어떠한 단순한 작업만을 달성하도록 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디 쿠닝(De Kooning), 마더 웰(Motherwell), 키린(Kline), 스텔라(Stella), 볼커스(Voulkos), 오티오(Autio) 그리고 아네슨(Arneson)은 램브란트(Rembrandt), 르노와르(Renoir), 예츠(Wyeth), 덕워쓰(Duckworth), 라이(Rie), 하마다(Hamada) 그리고 빈스(Binns)와 작업의 숙련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일맥상통 한다. 이러한 작업의 스타일이나 장르는 어렵지만 정적인 그림이나 사고, 의미를 전달하는데는 적절하다.
몇 년 전 쯤, 나는 아더 루벤스타인의 라디오 인터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탈출에 성공한 소련의 투어콘서트 초청으로부터 막 돌아 왔었다. 인터뷰하는 사람은 그에게 어떻게 개인적으로 음악과 피아노의 재능을 개발했는지를 물었다. 그의 답변은 아주 놀라웠다. 그는 그보다 더욱 훌륭히 연주할 수 있는 학생들을 무수히 만나왔다고 대답하였다. 면담자는 잠시 주춤했고 다시 그에게 재차 물었다. 루벤스는 덧붙여 비록 그들이 대단히 훌륭하게 연주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음악을 이해하는 데는 모자랐었다고 답변했다.
마가렛 웰덴하인(Marguerite Wildenhai)은 ‘기교 그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다. 시인으로서 가장 완벽한 운율이나 감정만으로는 시를 만들 수 없다’라고 썼다. 나는 비평시간에 학생들에게 그들이 어떤 문제가 없는지 설명하라고 요구하곤 한다. 언제나 학생들은 형태를 얇게 만들 수 없었거나 크게 만들 수 없었거나 뚜껑에 맞도록 둥근 형태를 만들 수 없었다고 말한다. 나는 학생들의 작품의 내용에 대한 질문은 거의 받아 보지 못했다. 학생들은 기교적인 문제에만 고정되어 있을 뿐 작품에 대한 어떤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독창성은 기교적 숙련도만큼이나 힘들면서 어떠한 정답도 없다. 학기가 시작되면, 나는 아이디어의 독창성과 스타일이 작품의 성취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바로 이런 개념이야말로 예술과 사회 사이의 경계를 짓게 한다.
우리는 현 시대의 예술은 새롭고 개인적이며 전통으로부터의 완전한 이탈이라고 배워왔다. 우리는 폴락(Pollack), 드 쿠닝(De Kooning), 워홀(Warfol), 루쏘, 넬슨(Nevelson) 그리고 마더웰(Motherwell)의 자유로운 작품들을 보아 왔다. 몇 년 후 나는 마더웰, 피카소, 미로 그리고 다른 분들의 글을 읽고 난 후 사물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그들이 발전시킨 많은 영향력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피카소와 마티스로부터 아프리카예술의 발견을, 마더웰과 로스코로부터는 미국 인디언 미술을 그리고 헨리 무어에게서 콜롬비아 형태 이전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독창성의 의미에 대해 전통을 부정하거나 상반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전통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번은 테드 랜돌이 나에게 본인이 만들어온 도자기 만들기를 중단하고 모든 도자기라고 불리워지는 것을 만들기 원했었다고 말했다. 나는 도예가들이 자신들이 순수 예술세계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며 이 이유들에 대해 그들의 작품을 평범하게 만드는 기능적인 요구 탓으로 돌리는 것을 간혹 들어왔다. 도예, 그림, 조각, 건축, 그리고 모든 다른 형태의 예술에 있어서, 심오한 점의 판단은 단지 기능적인 면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는 가벼운 어떠한 영감이 없는 건축물이나 조각 작품 같은 것들은 교외로 가는 동안 쉽게 볼 수 있다. 학생들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점은 진지함과 신념이다. 미로가 말했듯이 회화나 시는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듯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야 한다. 완벽한 기교는 단지 덧없을 뿐이다.
나의 작품은 명확한 종결을 내리는 형태와 형태 언어학적 탐구의 밸런스로부터 나온다. 각 작품은 표면에 나타내게 되는 재료의 특성을 반영하는 점토와의 공조에 의해 제작되어야 한다. 봅 터너(Bob Tuner)는 내게 너무 지나치지 않으면서 형태가 그 스스로 말하게 하라고 가르쳤다. 그는 점토가 신선하게 반응하도록 해야 한다고 일깨워주었다.
나는 훌륭한 작품은 작품에 어떤 강제적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작가와 점토 그리고 작업과정이 서로 대화하며 협력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작품은 이러한 과정의 결과로부터 나와야 하며 이것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을 발견해야하고, 시각적으로 표현되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의 작업 형태들은 지적인 계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간동안 수없이 많은 제작을 통해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이고 직감적인 결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작업은 자연적으로 변화되어 가면서 하나 하나 천천히 성숙되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어떠한 무리한 영향력이 가해지면 내 작업은 무언지 어눌함으로 반영되어 진다.
언젠가 학생들과 에버슨 박물관(Everson Museum)을 방문했을 때 피터 볼커스의 작품에 감동하게 된 기억이 있다. 한 학생이 왜 이 작품들이 그렇게 훌륭한 것인지를 물었다. 그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생각하는 동안, 나 자신이 어떤 답변을 찾기도 전에 볼커스 작품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이 작품은 시각적으로 쉽게 발견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작품들은 표면의 각 선들과 찢는 것에 대한 결과로 만들어지는 모든 행동이 쌓여진 것을 의미한다. 마치 춤추는 것을 찍기 위해 노출을 열어놓은 사진 같이 그의 작품들은 작업의 모든 기억을 내포하고 있었다.
피터 볼커스는 아주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분이었다. 나는 그의 형태로부터 나오는 원시성을 특히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런 힘들을 따라하곤 한다. 매순간 실패를 하지만… 결국 피터 볼커스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고, 나의 것을 아끼고 타협할 때 좋은 결과를 가질 수 있었다. 그토록 좋아한 볼커스의 황홀한 원시성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학생들은 자주 특별한 유약이나 슬립 그리고 점토의 조합비에 대해 묻곤 한다. 항상 이러한 정보들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만 새로운 유약 조합비나 소성과정 같은 것이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답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궁극적인 해답은 독창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한 모든 요소들의 총합이 되어야 한다. 나는 장작가마에서 소성된 기물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단지 한 방법으로 작업의 한계를 정하진 않는다. 도예가는 항상 그것이 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도자기는 겉 표면 아래 열정과 혼을 담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소성하는 단계에 너무 집착하여 더 중요한 점들을 잊곤 한다. 데이비드 샤너(David Shaner)는 “표면 그 속에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아주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많은 현대 장작가마 작가들은 일본 중세의 작품들을 모방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있는 듯 하다. 이러한 작업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풍부한 영감을 주기도 하지만, 이국적인 문화와 시대의 산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찻잔, 물 주전자. 그리고 용기들은 14세기에서 16세기 동안 일본에 거주한 사람들의 삶에 적합한 것들이었다. 영국의 비평가 필립 로슨(Philip Rawson)은 ‘이러한 것들의 현대적 시도는 단지 외관상 진품의 느낌을 만들어 낼 뿐’이라고 썼다. 미국 원주민 도예나 미국 소금유약 항아리를 복제하며 윌리엄스 버그에서 일했던 일본 도예가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일본의 부유하고 다양한 도예 역사는 점토로 작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흥미로움임에 틀림없다. 비젠의 평범한 그릇들은 나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의 시간과 문화를 반영하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시도를 해왔다.
최근에 코이에 료지(Ryoji Koie)와 몇일 함께 보낼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의 작업의 근원적 영향을 끼친 것이 볼커스, 솔드너 그리고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었다는 것을 배우고는 크게 감탄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것이며, 그는 그 영향력들을 개인적 시각으로 성공적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역사가 시작되었던 이래로 우리는 모든 시대와 문화로부터 훌륭한 예술작품을 접할 수 있다. 학생들은 이러한 다양한 작품을 공부하고 그것이 주는 영감과 영향력을 발견할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다.
나의 가장 큰 희망은, 어느 날 훌륭한 도예가가 내 작품들 중 하나를 보고는 그가 찾아 헤매는 어떠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얻을 수 있다거나 그의 도예 여정에 영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마치 내가 로산진의 작품을 보고 그랬듯이 말이다.
(연재 끝)
※이 글은 Ceramics Monthly 2002년 11월호 38페이지의 글을 미국 도예협회(www. ceramic.org)의 동의 하에 번역한 것입니다.
“Reprinted from Ceramics Monthly, November 2002, page 38. Reprinted with permission of the American Ceramic Society, www.ceramics.org. Copyright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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