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전신연 도예가
2003년 여름 필자는 12월에 있을 비중 있는 전시회를 앞두고 그 동안 형태적 암시와 붓놀림으로만 표현해 오던 여성의 몸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도조의 형상으로 표현하고자 지인의 소개로 몽고메리 대학 도예과에서 아론 퀸 브로피를 만났다. 그는 지금까지 이 지역 도예분야에서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도 작품으로서, 한 사람의 예술인으로서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의 삶과 작품세계, 그리고 인터뷰 과정과 내용을 상세히 소개해 본다.
“비평가, 수학자, 과학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이 땅의 모든 것들을 분류하길 원하고, 경계짓고, 제한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술(미술)은 모든 가능성에 열려 있다.”
- 파블로 피카소 (1881~1973)
작가의 작품을 보면 조각인지 도자 조소인지, 믹스드 미디어인지 명확히 구분 짓기가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나 그는 분명 5살 때부터 그의 이모 낸시의 스튜디오에서 흙과 첫 만남을 가졌고, 어린 시절을 회상해볼 때 흙과 물레에 관련되지 않은 시절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낸시의 작업장에 들어선 순간 발차기 물레의 둥그런 돌을 보며 프린스톤에 나오는 고인돌을 연상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발로 차서 돌리려 시도해 보다가 넘어져서 머리를 윌 헤드에 여러 번 부딪치는 사고를 경험하기도 했다.”라고 말하며 그 이후 큰 물레를 보면 무서움과 함께 경외감이 들었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청소년기까지 물레성형에 푹 빠져 기능적인 그릇, 물병들을 만들어 왔었고, 죠지 스쿨에 입학한 이후 그의 첫 번째 도자조형 작업이 시도되었다. 그는 “죠지스쿨은 마치 피어나는 아티스트에게 훌륭한 인큐베이터와 같다.”라고 회상하면서, 그 시절 언제나 도예 스튜디오에 있었고, 종종 테입을 문 잠금 장치에 붙여 놓았다가 한밤중에 몰래 살그머니 되돌아와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작업하곤 했다고 한다. 그 후 뉴욕주 북쪽에 위치한 알프레드 대학에 입학한 후 그는 기능적 물레 성형 작업에 찢고, 일그러뜨리고, 찌르고 하며 도자조형작업으로 서서히 작업방향을 잡아 나갔다. 그리하여, 흙으로 만든 토루소에 같은 컨셉으로 일그러뜨리고, 찢고, 다시 모양을 잡아나가는 작업을 반복했었다.
작가는 알프레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미래에 대한 특별한 계획은 없었지만, 단 한 가지,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로부터 6~7년이 지난 지금까지 다행스럽게도 풀타임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그는 적어도 10여개의 도조작업을 한꺼번에 시작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각의 작품들이 서로 도전 받고, 이어지며, 그것으로 인해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루해진다”고 한다. 가끔 그는 그의 끝마치지 않을 형상들이 스튜디오 한켠에서 그를 보고 있을 때 압도당하기도 하지만, 바로 새로운 작품을 하나 시작함으로써 그것에 응답한다. 그 예로서, 대표적인 작품 중의 하나인 ‘Unfinished Man’을 통해 “작업에 임하면서 언제나 그가 만약 그 작품을 끝마칠 경우 그것이 숨쉬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위험을 느꼈다.”고 설명한다. 이 작품은 그에게 있어 혁명과도 같은 작품이다.
그는 그것의 왼쪽 발을 1995년에 만들었다. 그것은 원래 ‘Fragmented Man (조각난 사람)’에 기대게 하는 또 다른 작품에 속한 발이었다. 그 후 1997년, 아직 알프레드 대학의 학생일 때 오른쪽 발을 브론즈 캐스트했고, 나무 블록 받침대는 1997년 볼티모어의 한 선착장에서 발견했다. 이 작품의 토르소는 1998년에 흙으로 만들어 소성 후 조형 이미지에 맞게 가슴 밑 부분을 부쉈고, 왼쪽 다리는 워싱턴 DC의 넘어진 나무들 사이에서 1999년에 구했다. 그리고 파이버 글래스로 만들어진 오른쪽 다리는 작가가 뉴욕 시에 있었던 2000년에 마네킹 스토어에서 잘려진 채로 구입하였다. 이후 그것들은 2001년, 에폭시로 모든 조각들을 합체돼 하나로 만들어 지기까지 따로 떨어져 있었다. 그는 이 작품의 탄생과정과 관련해 “깨뜨려서 조각난 것들을 받아들여서 다시 하나의 완성품으로 재결합하는 것이 나의 창조적 작업의 일부이다.”라고 설명한다.
“조형작품에는 언어장벽이 없다. 심지어는 시각장애인들도 나의 작품을 만지고 그것에서 어떤 무언가를 끄집어내고 연상할 수 있다.”
작가의 작품들은 그의 개인적인 과거의 경험들의 반영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일부러 알리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과 상호작용하고, 들어주며, 말하기를 원한다. 그 예로써 때때로 자신의 전시회에 방문하여 사람들이 작품에 대해 무엇이라 얘기하는지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작품들을 통해서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틀 때문에 작품들이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또 다른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고민, 혹은 관심거리에 기준해서 그들 나름대로 작품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필자가 작가와 인터뷰하며 재미있게 들었던 또 하나의 이야기는, 가끔 자신의 전시회에 익명으로 들러 자신의 작품 앞에서 보러 온 방문자에게 그 작품에 대해서 나쁘게 얘기한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 죄 없는 희생자가 그에게 맞장구치며 더한 혹평을 할 때에 가장 재미있어 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사랑하게끔, 혹은 싫어하게끔 만들기를, 작품이 어떤 힘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가 종종 작업에 있어서 인체의 썩음이나 병으로 악화되는, 쇠약하고 병든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은 청소년기 때 아버지가 백혈병으로 9년을 고생하며 육체가 쇠약해지고 변형되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곁에서 본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인체 조형작업에서는 뚜렷하게 육체적인 인간의 존재와 다른 외적인 요인으로 인한 그것의 허물어짐, 그리하여 맞이하는 아름다운 죽음을 표현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질병과 인간의 나약함, 세월의 덧없음 등을 인간의 형상을 조각내고 절단함으로써 상징화하여 그의 작업에 활용되었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질병으로 부풀어 오른 작품의 배를 보고는 여성의 임신을 연상하곤 한다. 작가의 초기 인체 조형작품 시리즈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그것들은 앉아있고, 서있고, 어딘가에 기대어 있는 형상인데, 이것을 그는 이렇게 비유한다. “어떤 사람들이 보잘것없는 우월감에 젖어 있을 때, 또 다른 사람들은 인간의 질병, 의지할 데 없는 무력감등으로 쓰러져 간다”며 이런 느낌을 작품에 투영한다고 했다.
작가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나는 인간의 나약함, 세월의 덧없음 등을 미묘하게 나타내는 방법을 찾아냈다.”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그가 사이프러스에 있을 때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이다. 지중해 연안의 그곳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 그리고 이집트의 오래되어 스러져가는 유물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것들을 보면서, 그 유적은 나일강의 어귀에서 홍수와 모래폭풍, 지진, 산성비들을 겪으면서 깨어진 상태로서 전체를 유지하며 바로 그 자리에서 수천 년간을 견디어내며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한 유적과 같이 자신의 작품이 시간을 통해 자연적으로 쓰러져 가기를 원한다. 혹자는 그의 작품의 일부로서 나무조각을 사용하는 데에 그 내구성에 대해서 의심을 할 수 있지만 그는 자연적인 부식이야 말로 작품의 생명력의 일부라고 설명한다고 했다.
작가의 가장 최근 전시회는 지난해 여름 조지타운에서 가진 전시회였다. 그 전시회에서는 반투명한 플라스틱 토루소를 제작하여 천장에 매달아 빛을 비춰 생기는 벽면의 그림자가 인체의 델리케이트한 형상을 나타내도록 시도하였다. 이것은 갤러리 라이트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는 전시회였다. 그는 인체 모양의 플라스틱을 이용해 원하는 형상이 나타날 때까지 자르고, 혹은 프로팬 토치로 모양을 변형시켜서 작품을 만든다고 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알프레드 재학 시절 블로잉 글래스를 하는 친구들의 작업을 관찰한 데에서 나왔다고 한다. 당시 그는 글래스 불기, 녹이기 등의 그들의 작업 과정을 통해 뜨거운 열로 인해 변형되는 유리의 형상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작가는 중국, 지중해 연안 국가, 캐나다를 비롯한 세계 곳곳을 여행했던 자신의 경험, 다양한 친구들의 작업 과정 등 여러 곳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한다. 그는 직관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며, 그 진행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형상을 존중한다. 그러므로 그의 다음 작업은 언제나 바로 이전 작업의 응답이 된다. 최근 들어 자연에서 가져오는 나무, 우연히 발견한 오브제 등, 여러 재료들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 재료들은 작업실 한켠에 놓여져서 그가 어떻게 그것을 이용할 수 있을지를 알게 될 때까지 몇 달, 혹은 몇 년간을 그대로 방치되기도 한다. 이렇게 대부분의 최근의 작업은 재료에 대해 발견하고, 연구하고, 다시 자신의 조형작업에 이용하는 순서로 이어진다.
작가는 “예술이란 그것이 어떤 사람의 손에 넘어감으로써 완성된다고 본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전시하는 것과 작품이 판매되는 것도 창조적 과정의 일부이다”라고 한다. 즉, 예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관객이 필요하고, 예술가는 그것을 창조하면서 살아갈 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그는 “누군가가 값을 치르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고 한다면,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에게는 지난 몇 년간 제작한 작품들 중에 개발할 가능성이 있는 몇 개의 작품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팔지 않기로 작정하고는 자신의 응접실 곳곳에 근사하게 배치해 놓았다. 그러나 실은 그것들도 모두 가격이 매겨져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준 도예가로는 알프레드 대학에서 공부할 때 교수로 재직 중이던 스테판 디스테블러 (Stephen Destaebler), 시애틀 워싱턴 대학의 더그 잭 (Doug Jeck) 등을, 작품들 중에는 피터 볼커스의 stack 시리즈물, 조각가 자코메티의 조각들, 로댕의 1877년 잘려진 토루소와, 머리와 팔이 없는 ‘걸어가는 사람’ 등을 꼽았다. 또한 최근의 작가 중에는 질리안 재그(Gillian Jagg)와 매그더케나 아브카너빅츠(Magdakena Abakanowicz), 마뉴엘 네리(Manuel Neri)의 작품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아론 퀸 브로피 약력
그는 미국 버지니아 노폭에서 1975년 태어나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자연 속에서 뛰놀며 지냈고, 1993년 죠지스쿨 국제학사 디플로마를 받았다. 뉴욕 주의 알프레드 대학에서 도예와 경제학 학사를 그리고 미술사와 경영관리를 부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사이프러스 아메리칸 아케오로자간 연구소에서 Post-Graduate 과정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그후 Artist-in-Residence 펠로우쉽으로 Ossabaw Island, Casper College, 사이프러스 미술 대학을 거쳐 헨리 루이스 III 미술과 종교 (Henry Ruise III Arts and Religion) 센터에서 1997~2000년까지 작업에 임했다.
그는 워싱턴 디시의 웨슬리 대학(Wesley Theological Seminary)에서 2000년 봄에 가르쳤고, 그 후 지금까지 메릴랜드 베데스다의 랜던스쿨에서 풀타임으로 미술을 가르치고 있고, 락빌에 위치한 몽고메리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도예를 가르치고 있다.
필자약력
이화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졸업
미국 메릴랜드 프레데릭 후드 대학원 도예과 졸업
현, 메릴랜드주 그린벨트시 커뮤니티센터 Artist in Residence로 활동 shinye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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